게네사렛 호수의 기적 (눅 5:1~11)

앞에서 나는 누가가 의도적인 삽입구를 통해서 예수를 따르는 것에 신중한 베드로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고 말했다. 다른 복음서와 달리 여기서 베드로는 다시 한번 등장한다. 그것이 망설인 것이든 신중을 기하는 것이든 일단 베드로와 예수의 첫번째 만남은 베드로가 예수를 따라갈만큼의 무엇을 던져주지 못했다. 그리고 두번째 이야기가 시작된다.

당시 지중해를 중심으로 한 문화권에서 ‘명예와 수치’라는 사회적 관례가 성서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은 현대 신약학이 가진 일반적인 이해이다. 이에 기반한 ‘상호성의 법칙’은 호의를 받은 자가 어떤 방식을 통해서든 그에 대한 보상을 해야했다는 법칙이다. 요즘으로 따지면 기브 앤 테이크(Give & Take) 같은 개념이 사회적으로 강제되는 분위기였다고 생각하면 쉬울 것이다.

이런 전제 속에서 이 이야기를 접하게 되면 첫번째 사건이 완전히 의미없는 사건이 되지는 않는다. 예수와 베드로가 이야기 속에 다시 등장했을 때 이제 베드로는 빚진 자(은혜입은 자)가 된다. 이 사회 속에서 매장되지 않으려면 베드로는 어떻게든 이 은혜를 갚아야 한다.

시몬은 “선생님, 우리가 밤새도록 애써 봤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이 말씀하시니 한 번 더 그물을 쳐 보겠습니다” 하고

분명 누가는 시몬과 그의 친구들이 밤새 조업을 마치고 빈손으로 돌아온 상태임을 설명했다. 그런 상태에서 예수님은 다시 바다로 나가라고 하신다. 그것도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던지라니, 물고기를 잡을 줄 아는 시몬의 입장에서는 말도 안되는 요청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베드로는 거절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 사람은 자신의 장모를 고쳐준 은혜를 베푼 사람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개역성경에 ‘말씀을 의지하여’라고 되어 있는 부분은 사실 적절한 번역은 아니다. 현대인의 성경이 그나마 그 의미를 잘 살려서 번역하고 있지만 조금 더 느낌있게 그 문맥을 살려본다면 다음과 같다.

“예수님 우리가 밤새 생고생하다가 방금 돌아왔습니다. 보시다시피 한마리도 잡지 못했다구요. 날 다 샜는데 다시 고기를 잡으러 나가자구요? 거기다 깊은 곳이라니… 장모님을 고쳐주신 선생님의 부탁이니 일단 따르긴 하겠습니다만 이게 얼마나 쓸데 없는 짓인지는 아시지요?”

우리가 흔히 ‘주의 말씀 의지하여 깊은 곳에 그물 던져’라며 부르는 찬양의 가사와는 달리 이것은 믿음의 고백이 아니라 자신의 장모를 고쳐준 예수에게 되돌려 주는 베드로의 선심같은 것이다. 어쨌든 예수는 베드로를 바다 한가운데로 끌고 가는데 성공한다. 30년 가까이 어부 혹은 어부의 아들로 살아온 베드로가 가장 자신만만해 하는 그 자리에 베드로와 예수가 섰다. 그리고 그곳에서 기적이 일어난다.

그런 다음에, 그대로 하니, 많은 고기 떼가 걸려들어서, 그물이 찢어질 지경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다른 배에 있는 동료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자기들을 도와달라고 하였다. 그들이 와서, 고기를 두 배에 가득히 채우니, 배가 가라앉을 지경이 되었다.

이건 그냥 운이 좋아 벌어질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이 잡혔다는 말은 베드로가 이 정도 양의 물고기를 잡을 준비가 전혀 안되어 있었다는 말이다. 왜? 그 바다에서 누구도 그렇게 많은 물고기를 잡아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 조금이라도 가능성이 있었다면 시몬은 혹시 자신에게 닥칠지 모를 대박 행운을 기대하며 대비했을 것이다. 더 나가 누가는 옆에 있는 배까지 불러서 가득 채우고도 배가 가라앉을만큼 잡혔다고 말한다. 이건 기적이다!!!

이 말씀은 많은 교회에서 믿음에 대한 응답을 강조하는 설교본문으로 사용된다. 예수의 말씀을 의지하고 살면 그분은 우리의 삶에 기적을 일으키신다는 설교가 너무나도 쉽게 행해지고 사람들은 그 메시지에 귀를 기울인다. 더 크게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며 삶의 문제들이 해결되길 기도하고 더 큰 부자가 되길 소원한다.

베드로가 예수를 따르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무엇보다 그가 예수를 따르지 못할 이유는 그의 삶의 상황 때문이다. 당시 갈릴리 지역의 어부들의 삶은 그다지 여유롭지 못했다. 게다가 그는 장모를 모시고 사는 대가족의 가장이었다. 그런 베드로 앞에 잡혀있는 엄청난 물고기는 그런 모든 걱정을 날려버린다. 그는 이제 떼부자가 되었다. 조금 불안해 보이는 인생에 자신을 걸어도 될만큼, 집에 있는 노모 걱정하지 않아도 될만큼, 먹고 사는 걱정 없이 의미있는 일만 하면서 살아도 될만큼 충분히 부자가 되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이야기의 주인공은 베드로를 떼부자로 만들어 줄 물고기가 아니다.

시몬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예수의 무릎 앞에 엎드려서 말하였다. “주님, 나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나는 죄인입니다.” 베드로 및 그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은, 그들이 잡은 고기가 엄청나게 많은 것에 놀랐던 것이다.

이것은 이상한 장면이다. 떼 부자가 된 베드로가 갑자기 엎드려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장면이다. 우리는 성경의 많은 사건들을 볼 때 정작 봐야 하는 것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많다. 이 장면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같은 실수를 한다. 자신의 욕심을 위해 신을 이용하려는 인간의 마음, 그 마음은 우리의 시선을 물고기에 머물게 한다. 그런 이들에게 베드로의 이 한마디는 굉장히 낯설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 우리들도 우리의 욕심과 이 장면의 부대낌을 조화시키는 방법을 너무 잘 알고 있다. 영적인 이야기로 바꿔버리면 된다. 하나님의 기적 앞에 자신의 영적인 죄를 깨우치는 베드로의 믿음과 겸손의 고백으로 말이다.

우리는 흔히 이 장면을 보면서 ‘스타킹’ 같은 TV프로그램에서 강호동이 마술사의 말도 안되는 마술을 보고 “언~빌리버블!!!”이라고 외치는 식의 놀람을 생각한다. 하지만 여기서 ‘놀랐다’라고 번역된 부분을 직역하면 ‘두려움이 그들을 사로 잡았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주어는 베드로와 그 친구들이 아니라 그들을 집어삼킨 ‘두려움’이다. 다시 말해 지금 시몬과 그의 친구들은 엄청나게 잡힌 고기를 보면서 신기해하고 환호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신의 영광 앞에 겁을 잔뜩 집어먹고 있는 것이다. 떼부자가 되었다는 기쁨보다는 신 앞에서 당장 죽을까봐 벌벌 떨고 있는 상황이다. 시몬의 죄고백은 믿음의 반응이 아니라 죽기 싫어하는 발악이다.

예전에 나들목교회에 김형국 목사님을 뵐 일이 있었다. 마침 목사님은 새신자를 면담 중이셨다. 그런데 그들에게 처음 꺼낸 목사님의 말씀이 내 마음을 두드렸다.

“기독교는 위험한 종교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든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소명은 감정이 아니다. 무릎꿇고 눈물 뚝뚝 흘리면서 잘못한 거 줄줄 늘어놓는 것은 소명도 회개도 아니다. 그것은 삶을 걱정해야할만큼 위험하고 심각한 일이다. 베드로가 신중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눈 앞에 뻔히 보이는 가이사의 나라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가 나사렛 촌동네에서 온 어떤 미치광이가 전하는 오지도 않은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본다는 것은 쉬운 일도 아니고 쉽게 결정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다. 이것은 인생이 걸린 일이다. 그렇다면 이 장면을 통해서 누가가 자신의 공동체에 전달하려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우리는 이와 비슷하게 신 앞에 두려움에 떨고 있는 또 다른 인물을 알고 있다.

하나님이 또 말씀하셨다. “나는 너의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다.” 모세는 하나님을 뵙기가 두려워서, 얼굴을 가렸다. (출애굽기 3장 6절)

나는 부르짖었다. “재앙이 나에게 닥치겠구나! 이제 나는 죽게 되었구나!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인데, 입술이 부정한 백성 가운데 살고 있으면서, 왕이신 만군의 주님을 만나 뵙다니!” (이사야 6장 5절)

누가가 그 공동체를 향해 전해주고 있는 베드로의 이야기는 구약에서 선지자를 부르는 장면과 너무나도 닮아 있다. 신적인 권능 앞에서 나약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살려달라는 외침 뿐이다. 이것은 겸손이 아니다. 경외는 우리가 하나님께 져주는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이 무너지는 자리, 목숨을 걱정해야할만큼 나의 삶을 조여오는 거룩의 무게, 그리고 그 뒤에서 그의 인생을 뒤집어 엎는 부르심의 사건이 있다.

여기서 누가가 베드로의 이야기를 선지자의 소명 기사와 유사한 형태로 배치하는 이유는 베드로에게 투영시켜 얻고자 했던 누가 공동체의 정체성 문제에 답을 하기 위함이다. 그들이 누구이며 어떤 존재인지, 그들이 예수가 당신들을 부르셨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한 누가의 답은 단순하다. 당신들은 선지자이다. 베드로가 그랬던 것처럼 오늘 당신들을 부르시는 하나님은 선지자의 사명감으로 부르시고 계신 것이다.

앞으로도 지속적으로도 살펴보겠지만 누가복음 곳곳에는 제자 집단의 선지자적 정체성을 강조하는 부분들이 많이 나온다. 그리고 이런 선지자적 정체성은 누가가 예수 그리스도를 참 선지자로 그리고 있다는데 더 큰 의미가 있다. 그리고 이 정체성 위에서 베드로를 부르는 부르심은 선지자에게 주는 하나님의 사명이 된다. 그리고 그 첫마디는 여호수아를 부르실 때의 약속을 떠오르게 한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그리고 베드로는 그 부르심의 순종하는 첫걸음을 실행에 옮긴다.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마 4:20)
곧 그물을 버려 두고 따르니라 (막 1:18)
그들이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눅 5:11)

이 부분에 있어서 누가는 다른 복음서들과 확연히 다른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가장 분명하게 나타나는 차이는 다른 복음서들이 베드로가 그물을 버렸다고 적고 있는 반면 누가복음은 베드로가 ‘모든 것’을 버렸다고 적고 있는 점이다. 동일한 현상이 다른 제자인 마태의 경우에도 나타나고 있다.

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마 9:9)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막 2:14)
그 후에 예수께서 나가사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따르니라 (눅 5:27-28)

이것은 그들이 무엇을 버릴 수 있는지 재무조사를 해 봐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모든 것이라고 했을 때 그것은 단순히 그가 가지고 있는 재산의 총액이 아니다. 지금 그의 앞에는 지금껏 그가 가져왔던 소유라는 개념을 무의미하게 만들만큼 엄청난 양의 물고기가 있다. 그가 선택하는 길에 그 물고기가 보장된다면 가진 것을 버리는 계산이 뭐가 문제겠는가? 여기서 살펴봐야 할 것은 물고기가 상징적으로 의미하는 것이다.

IMG_0317[1].jpg 그에게 물고기는 어떤 의미였을까? 베드로는 어부였다. 그는 물고기를 통해 사람들과 만나고 물고기를 잡아 가족을 먹여 살리고 물고기를 잡아 빚을 갚고 그것으로 성전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다. 모든 어부가 그렇듯 그는 더 나은 삶을 위해 더 많은 물고기를 잡기 원한다. 그 사회 속에서 물고기를 잡아야만 그는 사람으로서 존재의 가치를 인정받는다. 그에게 물고기는 단순히 돈을 버는 도구가 아니라 인생이다.

하지만 성경은 우리가 베드로의 믿음에 대한 응답이라 착각하는 수많은 물고기 중에 단 한마리도 베드로의 것이 되지 못했다고 말한다. 이것이 베드로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간 행위의 의미이다. 누가가 이것을 굳이 ‘모든 것’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물고기를 버리고 더 많은 물고기를 낚기 원하는 우리 삶의 포커스를 물고기가 아닌 예수에게 끌어오기 위함이다. 다른 복음서의 ‘그물을 버렸다’는 표현이 누가에게 부족했던 이유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그물을 버리고 선택하는 새로운 인생의 의미를 더 많은 물고기를 바라며 사는 삶으로 대체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를 만난 후부터 베드로는 끊임 없이 계산한다. 늙은 장모와 가족들, 하루하루 먹고 살아야 하는 상황, 나를 도와 함께 일하는 일꾼들과 친구들… 그에겐 예수를 따라가기 위해 버리고 포기해야 할 것이 너무 많다. 누가의 청중들도 베드로처럼 너무나도 많은 버릴 것, 희생할 것, 포기할 것으로 인해 계산하고 있었을 것이다. 사회속에서 나를 지켜주고 나를 ‘나’답게 만들어준 삶의 근간들을 어느정도까지 포기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것은 어쩌면 자신의 삶에 책임감 있는 사람으로서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그 고민은 부르심 앞에서 다른 가치를 갖는다. 왜냐하면 부르심은 ‘어디까지’가 아니라 ‘모든 것’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누가는 끊임없이 자신의 청중을 향해서 모든 것을 버리는 제자의 모습을 강조한다. 물고기가 베드로에게 단순한 직업이나 소유물이 아니라 인생이었듯이 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선택하는 것은 새로운 직업이나 더 많은 물고기가 아니라 새로운 인생이다. 누가복음이 말하는 새로운 인생은 더 많은 물고기를 보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인생은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6:20)라고 말하는 인생이 될 것이다. 새로운 인생은 더 많은 물고기에 대한 약속이 아니라 물고기로부터 우리를 자유케하는 선포이다.

부르심은 해방이다. 사회로부터 강요된 가치 기준으로부터, 나의 삶을 가두고 제한하는 상황들로부터, 나 아닌 다른 것에 의해 규정된 나로부터, 하나님의 아들 앞에서도 여전히 물고기를 향해 있는 나의 시선과 욕심으로부터의 해방이다. 그리스도의 부르심은 물고기에 목숨 걸고 하루하루를 살려 하는 소모적인 삶의 굴레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 사람을 향해서 그리스도의 사랑과 정의를 외치는 선지자의 삶으로 이끄신다.

부르심은 가이사의 나라를 넘어 우리의 시선을 하나님의 나라로 향하게 한다. 그리고 그 나라는 ‘모든 것’에서 시작한다.

– iPad에서 작성한 글입니다.

4 Comments

  1. 좋은 글입니다. 설교를 준비하다가 우연히 읽게 되었네요. 이 내용 모두가 자신의 생각인가요? 아니면 다른 분의 관점도 담겨있나요. 궁금합니다. 

    1. 과분한 칭찬 감사합니다.^^ 글을 준비하면서 여러 주석을 뒤져봤지만 아마 이 본문을 이렇게 해석하는 분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완전히 독창적이라고 할 수는 없겠네요. 여러가지 성서학적 개념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하지만 메인 아이디어와 전체적인 연결은 저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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