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의 종려주일 풍경 돌아보기 “내가 무엇을 하여주기 원하느냐?”

혹시 종려주일 설교를 할지도 모른다는 말에 준비하면서 가볍게 읽어봤던 마가복음의 종려주일 풍경을 남겨본다. 설교가 취소되는 바람에 준비하다 만거라 정교하게 다듬어진 설교는 아니고 그냥 아이디어 수준이다.

때는 유월절이 다가오던 즈음의 예루살렘, 갑자기 거리가 시끌거리며 성문에서부터 한 무리의 사람들이 행진을 한다. 어떤 이들은 길거리에서 꺽어온 종려나무 가지를 길에 깔고 어떤 이들은 신난 듯 흔든다. 그도 찾지 못한 사람들은 자기 겉옷을 벗어서 거리에 깔고 속옷바람으로 뛰면서 난리다. 마치 개선장군이라도 들어오는 듯, 무언가 다가온다는 희망에 들뜬 사람들의 외침이 성 안을 가득 메우고 그 외침과는 너무나 대조적으로 초라한 어린 나귀의 등에 탄 한 사람이 그 사이로 들어 온다. 사람들의 외침이 들린다. “오소서!!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그 순간 나귀 등에 탄 사나이의 깊이 패인 눈이 오후의 뜨거운 햇살 아래 살짝 찌푸러진다.

우리가 종려주일의 모습이라고 알고 있는 장면이다.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흔들었다고 해서 종려주일이라고 한다. 교회력으로 이 날은 부활절 전 주일로 예수님께서 잡하시고 고통당하신 성금요일이 속해있는 주일이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장면때문에 사순절에 속해있고 고난 주간이 포함된 주간임에도 기쁨의 흔적이 자리하고 있는 주간이다. 하지만 나는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고 자신을 돌아보며 회개하는 기간 가운데 어설프게 끼어있는 이 주일이 무척이나 낯설다.

예수가 제자들이 가져온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간다. 그를 알아본 사람이 호들갑을 떨며 기쁨의 탄성을 질러댄다. 여기서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말이 나온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자,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복음서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대충 이런 식의 말이다. 문제는 앞에서 재현한 마가의 이야기 속에서 사람들이 외쳤던 한마디 말이다. 이 말은 마가복음에만 등장한다. 마가는 그 날 사람들이 외친 말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호산나!” “복되시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분!” “복되시다! 다가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더 없이 높은 곳에서 호산나!” (새번역)

당시 예수의 입성 장면은 수많은 환영의 인파로 가득했다. 그들이 과연 이 말만 했겠는가? 모두 다 입을 맞춰서 노래라도 부른 것일까? 아니다. 아마도 그들은 각자 다른 수없이 많은 말을 했을 것이다. ‘얼씨구, 지화자’라고 외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와! 대박! 대~박’이라면서 엄지 손가락을 치켜드는 아이들도 있었을 것이다.

문제는 그 많은 외침의 소리를 마가가 한 문장으로 요약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가가 사람들의 외침 속에서 무언가를 들었다는 것이고,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 그 한 문장을 예수의 행진 장면 속에 집어넣은 것이다. 그리고 그 기록은 마가의 전체적인 흐름 속에서 볼 때 그리 듣기 좋은 소리는 아니었던 것 같다.

마가복음에서 예수님의 공식적인 첫마디가 무엇이었을까? 많이들 알고 있겠지만 다시 한번 되짚어 보자.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라. 복음을 믿어라.”

무슨 차이가 있는지 이해하겠는가? 두 외침 속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때가 찼다. 그리고 무언가 다가오고 있다. 다가오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인가? 아니면 다윗의 나라인가?

복음서에서 하나님 나라의 개념은 핵심 중에 핵심이다. 특히나 마가복음에는 이런 하나님 나라 개념이 예수님의 삶과 메시지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예수를 맞이하는 이들의 입에서 들려오는 외침은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라 다윗의 나라였다.

이 두 나라에 대해서 이해하기 위해 이야기를 조금만 거슬러 올라가보자.

예루살렘을 향한 여행이 시작될 때 쯤 세베대의 아들인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나와서 자기들의 청을 들어달라고 한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묻는다.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느냐?” 뒷 이야기가 어떻게 되는지는 많이들 아실 것이다.

그 사건이 지나고 여리고를 자나가실 때 쯤 디메오의 아들인 소경 바디메오가 예수님을 부른다. “다윗의 자손 예수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요” 사람들의 눈총과 꾸짖음에도 그는 다시 한번 예수를 부른다. 이렇게 외치는 바디매오를 곁으로 부르신 예수님은 그에게 이렇게 묻는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바라느냐?” 뒷 이야기가 어떻게 되는지는 많이들 아실 것이다.

참 이상하게도 예수는 두가지 상황에서 동일한 질문을 하신다. 하지만 그 결과는 다르다. 이 두 이야기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그 해답은 마가복음의 전형적인 A-B-A’ 구조에서 찾을 수 있다. 즉, 두가지 이야기 사이에 핵심적인 이야기가 끼어 들어가는 구조이다. 가장 좋은 예가 예루살렘 입성 사건 바로 뒤에 나오는 무화과 나무 이야기이다.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신 이야기와 무화가 나무가 말라있었다는 보고 사이에 성전 청결 이야기가 들어가면서 무화과 나무가 성전과 이스라엘에 관한 상징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세배대의 아들들과 디매오의 아들의 차이는 그 사이에 있는 내용 속에서 찾을 수 있다. 그리고 그 핵심은 ‘그들이 무엇을 구했는가?’가 아니라 예수가 그들에게 물었던 ‘예수가 그들에게 무엇을 해줄 것이라 기대하는가?’ 즉, ‘그들이 예수를 통해서 바라본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모습이었나?’에 있다. 그 사이에 있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41 열 제자가 듣고 야고보와 요한에 대하여 화를 내거늘 42 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43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44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45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개역개정)

두가지 이야기에서 사람들은 예수에게 와서 무언가를 구한다. 두 경우 모두 무언가를 요청하는 사람의 자세라고 하기엔 지나치리만큼 뻔뻔하다. 그리고 두 경우 모두 자신의 필요를 아뢰었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없다. 다만 그들이 그려내는 하나님의 모습은 다르다.

세배대의 아들들이 예수를 통해 기대한 하나님의 다스림은 자신들에게 힘과 권력을 보장해주는 다스리는 자의 모습이었다면, 디메오의 아들이 예수에게 기대한 하나님의 나라는 자신의 외침에 귀 기울여주는 섬기는 자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예수를 통해 드러나는 하나님은 더 큰 자로 있기보다는 더 작은 자의 외침에 귀 기울이는 하나님이시다.

그렇다고 이 말이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라는 식상한 현대의 기복신앙적 하나님의 모습으로 오해되어서는 안된다. 바디매오의 외침과 그에 대한 응답이 제자들의 그것과 상반되는 이유는 바디메오의 외침에 사람들이 보여주는 반응처럼 그가 당시로서는 종교적으로 가장 하나님과 멀다고 여겨졌던 ‘죄인’이며 사회로부터 “잠잠하라”고 강요당하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섬김이라는 것은 사실 그렇게 어려운 주제가 아니다. 어찌보면 이 말은 사람을 대하는 겸손함 정도로 희석되어버릴 수도 있는 주제일지 모른다. 더군다나 우리는 교회에서 장로님을 섬기고, 목사님을 섬기고 형제자매를 섬긴다. 교회를 섬기고 눈에 보이진 않지만 주님도 섬긴다. 뭐 그리 어려운가? 매일 하고 있는 일이 아닌가? 때론 섬김이라는 말 속에서 희생과 착취를 정당화 하기도 하지만 어떤가? 주님이 섬기라고 하셨다. 그래야 큰 사람이 될 수 있다.

세배대의 아들들도 섬기겠다고 했다. 누가 예수님보다 큰 사람이 되겠다고 했는가? 요즘의 시각으로 성경으로 보는 것이 약간 오바일 수는 있지만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국민을 섬기겠다며 선거에 나오지 않는가? 그들의 속마음도 그랬을지 어찌 아나?

하지만 과연 이것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섬김의 의미일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섬기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바디메오가 예수를 부른다. 예수는 어떻게 하는가? 여기서 원래 문제가 되어야 하는 것은 예수가 바디메오의 청을 들어주느냐 들어주지 않느냐가 아니라 ‘그가 바디메오의 청을 들어주는 것이 옳으냐?’의 문제이다. 이것은 사람 됨됨이나 겸손의 문제가 아니라 거룩과 성결 그리고 하나님의 정의에 관한 문제다. 왜냐하면 그는 ‘죄인’,’부정한 자’이기 때문에 그렇다.

오늘 날도 이런 바디메오와 같은 사람들이 많이 있다. 다 용서해도 이 사람만은 안된다는 사람, 다 구원받아도 이 사람만은 안된다는 사람, 내 마음 속에 선을 그어놓고 끊임없이 하나님 나라의 복음으로부터 밀어내고 있는 사람, 근처에 있으면 사람 물들이고, 이슈화 되면 세상 어지럽히는 탓에 끊임없이 ‘잠잠하고 짱박혀 있으라’라고 강요당하는 그 사람이 우리 마음 속에 있다.

누군가의 마음 속에 그는 좌파 빨갱이이고, 누군가의 마음 속에 그는 동성 연애자이며, 누군가의 마음 속에 어릴 적 자신을 아프게 한 아버지일지 모른다. 우리는 그 선을 넘어서 그를 섬길 수 있는가? 그가 더 나아지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나와 같은 사람이 되기 때문이 아니라 그냥 그를 섬길 수 있는가? 그의 말을 들어주고 그를 위해 노력할 수 있는가?

세상의 왕들이 그렇듯 그를 짓누르고 억압하고 지배하여 자기 입맛에 맞게 바꾸려 하지 않고 그를 섬길 수 있는가? 중요한 것은 섬김이 아니라 우리가 섬겨야 하는 대상이다. 예수는 말한다.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

예수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니가 누구냐고 묻지 않는다. 그는 믿는 자만을 위해 죽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 우리는 너무나 많은 잣대로 예수의 은혜를 제한시킨다. 하지만 샌더스에 따르면 율법은 은혜로 들어온 자가 머물기 위한 것이지 들어오기 위한 조건이 아니다.

우리는 끊임 없이 다윗의 나라를 구한다. 내 마음에 드는 사람을 섬기고 그와 같이 되기 원한다. 그러기 위해서 대상이 되는 타자를 내 맘에 들게 바꾸고 심지어는 하나님의 나라마저 다윗의 나라로 바꿔버린다. 오늘 마가의 본문 속에 나타나는 종려주일의 모습에는 기쁨보다는 다윗의 나라를 향한 어긋난 기대가 가득하다. 이 어긋난 기대를 등에 지고 예수는 더 큰 섬김을 위해 십자가의 길로 간다.

예수는 바디메오를 바꾸려 하지 않았다. 그가 회복되었기 때문에 예수와 만난 것이 아니라 그를 만났기에, 예수가 그의 외침을 들었기에, 사회적 틀을 깨고 그를 섬겼기에 그가 회복된 것이다. 예수는 군중들의 어긋난 기대로 바꾸려 하지 않았다. 그 길 끝에 십자가의 죽음이 기다리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그가 선택한 길은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 교육이나 갱생 프로그램이 아니라 그 속에서 하나님나라의 삶, 섬김의 삶을 사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의 섬김을 통해 우리는 회복되었다.

이것은 예수가 제자들에게 삶을 통해 가르치는 하나님 나라의 섬김이다. 그리고 두 이야기 사이에 있는 예수의 당부 속에는 예수뿐 아니라 우리도 그리 해야 한다는 당부가 담겨 있다. 내가 섬겨야 할 대상은 교회의 목사님도, 장로님도, 교회 공동체도 아니다. 내 안에서 끊임없이 밀어내고 있는 어떤 사람… 그 사람을 향해 나를 십자가에 못박는 과정이다. 내 세계속에 사람을 맞춰넣는 것이 아니라 그 세계 속에 나를 내어 맡기는 과정이다.

예수가 우리에게 묻는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하여주길 원하는가? 내가 어떻게 했는지 보았느냐? 너도 가서 모든 이를 섬기는 자가 되라.

– iPad에서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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