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가장 위대한 기도 – 존 도미닉 크로산

#열며…
‘가장 이상한 기도’라는 소제목의 프롤로그와 함께 시작하는 이 책은 역사적 예수 연구의 권위자인 존 도미닉 크로산이 주기도문을 주제로 쓴 책이다. 크로산이 밝히고 있는 것처럼 이 책은 지금껏 크로산의 연구가 올바른 방향을 가지고 진행되었는지 시험해보는 역할을 한다. 물론 이 책이 크로산의 연구를 객관적으로 보장해주는 역할을 하지는 않겠지만 전통적인 예수상과 다른 파격적인 예수상을 주장했던 크로산에게 주기도문은 어쩌면 한번쯤 넘어야 하는 산이었는지도 모른다.

#내용 살펴보기
이 책 각 장의 주제를 간추려 보면 이렇다.

먼저 크로산은 1장에서 주기도문을 유대 시문학 전통과 비교하면서 대구와 확장이라는 큰 틀로 주기도문을 분석해 나간다. 이런 크로산의 방법은 주기도문을 [이름 – 나라 – 뜻], [양식 – 빚 – 시험]이라는 두가지 점층법의 대구 속에서 보도록 한다.

본격적인 논증의 첫 장면에서 등장하는 것은 의외로 ‘바바타’라는 고대의 여인에 관한 내용이다. 2장에서 크로산은 이 여인을 통해 가부장적 의미로 해석되는 ‘아버지’라는 용어의 본래 의미가 중성적인 ‘집주인’이라고 논증한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향해 ‘아빠(abba)기도’를 드리는 것은 ‘집주인의 의무’를 포함하는 상속자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이 집주인은 어떤 사람인가? 3장에서 크로산은 거룩의 의미를 안식일, 안식년, 희년의 개념으로 확장하면서 그 이름이 거룩해지는 것은 하나님께서 분배적 정의를 실현하는 정의로운 집주인으로 알려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4장에서 크로산은 이런 분배적 정의를 위해 기존의 하나님의 세계 대청소 개념을 뒤바꾸는 페러다임 쉬프트를 예수가 시도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예수는 세례요한의 묵시적 종말론과 달리 하나님 나라를 현재적인 것으로 이해했으며 그것은 비폭력적이고 또한 인간의 협력을 통해서 이뤄지는 것이다. 이 인간의 협력이라는 개념이 후반부 세가지 기도가 필요한 이유이다.

기도의 앞부분과 뒷부분을 연결하는 다리 역할을 하는 5장에서 크로산은 ‘하나님의 뜻’이라는 개념에 딴지를 건다. ‘하나님이 예수가 죽는 것을 뜻했는가?’라는 의문에서 시작되는 물음이다.

이 부분에서 크로산은 전통적인 형태의 대속교리를 정면에서 반박한다. 크로산은 단호하게 ‘성경에는 대속 같은 개념은 없다.’라고 선포할만큼 자신만만하다. 구약의 희생제사에서 제물은 누군가의 죄를 대리하는 것이 아니라 신에게 바쳐지기 위해 신성하게 되는 것이다.

즉 구약의 희생양적 모티브를 따르고 있는 예수의 십자가 죽음은 우리 죄의 값을 대신 치뤄 신을 만족시키는 행위가 아니라 ‘대의를 위해(혹은 타인을 위해) 신성하게 된 최고의 선물’이라고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신이 예수를 죽이기로 작정했다는 폭력적 이미지의 예정이 아니라 세상의 폭력에 저항하다 죽은 예수를 통해 하나님의 비폭력성이 드러나게 되는 ‘결과로써의 뜻’으로의 전환을 의도한 것이다. 그 뜻이 하늘에서처럼 땅에서도 이뤄지길 바란다는 예수의 기도는 이런 바램을 담고 양식, 빚, 시험에 관한 기도로 이어진다.

6장에서 흔히 우리가 갈릴리 바다라고 알고 있는 디베랴 바다를 둘러싼 헤롯의 정치적 야망과 예수를 비롯한 갈릴리 예언자들의 대립을 재구성한다. 헤롯은 티베리우스 황제 시절 티베리아스라는 도시를 건축하고 디베랴 바다를 개발하여 세원을 늘리려는 친로마적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예수의 사역에 있어서 디베랴 바다라는 장소가 중요한 이유는 예수의 사역이 헤롯의 정치적 계략과 대립각을 세우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대립 속에 ‘일용할 양식’에 관한 기도가 위치한다.

크로산은 예수의 사역 가운데 빵과 생선이 많아진 사건들을 분석하면서 빵은 모든 하나님의 백성에게 골고루 제공되는 분배적 정의를 의미하며 생선은 갈릴리 바다에 대한 하나님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는 갈릴리 바다를 디베랴 바다로 바꾸면서 헤롯이 의도했던 친로마적인 정책을 정면에서 반박하는 것이다.

여기서 갈릴리 바다에 대한 하나님의 소유권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의 먹을거리 문제(일용할 양식)와 평등한 공동식사의 ‘사회적 평등’ 문제로 연결된다. 크로산은 ‘오늘을 위한 충분한 양식의 다른 측면은 내일의 빚이 없는 것’이라고 말하며 자연스레 다음 기도로 넘어간다. 흔히 우리가 죄의 문제로 알고 있는 주기도문의 후반부 두번째 기도는 빚을 탕감하는 문제로 풀어나가야 한다는 것이 주요 논지다.

크로산은 원래 예수의 기도가 부채 탕감의 내용을 담고 있었으나 복음서를 기록한 제자들의 손을 거치면서 죄의 문제로 변질되었고 결론적으로 우리는 이 기도에서 탕감의 문제를 ‘문자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마지막 8장에서는 시험(유혹)을 예수의 세가지 시험과 연결시키면서 이 유혹은 종말론적 왕국을 제국으로 바꾸는 것, 쫌 더 구체적으로는 제국의 폭력 앞에 대항적 폭력을 행사하려는 유혹으로 정리하면서 예수의 주기도문은 철저히 비폭력적인 방향을 지향하고 있음을 분명히 한다.

#그가 그려내는 예수는 한없이 강하다.
역사적 예수를 연구하는 사람들의 글을 읽다 보면 상당히 무미건조한 느낌을 받는다. 거기에는 그들의 삶이 묻어난다기 보다는 그들이 연구하면서 가졌던 ‘객관성’이라는 이름의 거리감이 존재할 뿐이다. 하지만 크로산의 책을 읽고 있으면 거기에는 거리감보다는 ‘헌신’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그의 글은 예수를 연구하는 연구자의 자세보다는 예수를 따르는 제자의 모습이다. 물론 크로산의 연구에서 객관적인 면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역사가로서 그의 자세는 냉철하며 그의 자료들은 방대하다. 하지만 그런 것 이전에 그의 연구가 힘을 가지는 이유는 그가 제시하는 방향이 확신에 차 있으며 많은 사람들에게 꽤 매력적으로 다가온다는 것이다.

많은 학자들이 크로산의 예수상은 그의 어린 시절 경험에 기초한 것이라고 비판하지만 어쩌면 그가 가진 경험들이 그가 그리는 예수상을 더 생동감있게 보여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런 비판에 대해 크로산은 책 속에서 쿨하게 인정하고 넘어간다.)

#그가 그려내는 예수는 한없이 약하다.
이런 매력에도 불구하고 그가 보여주는 예수는 낯설다. 크로산의 예수상은 미리 그려놓은 밑그림 위에 색을 칠해 넣는 작업같다. ‘아일랜드의 트라우마’라던가 ‘미국식 예수’라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도 이런 그의 방법론(?)때문이다. 하지만 최근 그의 저작에서 보여지는 이런 성향은 조금 더 진화된 모습을 보인다.

최근에 마커스 보그와 함께 쓴 [첫번째 바울의 복음]에서 그는 소위 미국 내 진보 기독교의 조직신학적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듯한 모션을 취한다. 그리고 그가 [가장 위대한 기도]를 통해 주기도문에 손을 대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라고 보여진다. 물론 이것이 실제 그의 의도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고 기존에 존재하는 기독교의 체계들이 그가 제시하는 것보다 깔끔하다고도 말할 수 없지만 여기저기서 삐걱대는 불협화음을 만들어 낸다는 느낌은 지우기가 어렵다. 앞에서 그가 과도한(?) 확신으로 주장하던 한 구절을 다시 살펴보자.


234페이지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의 문자적인 부채를 탕감하시기 위해서는, 우리가 하나님께 문자적인 부채를 지고 있다는 말인데, 그런 문자적인 부채들은 무엇인가? 우리는 하나님께 무엇을 – 문자적으로 – 빚지고 있는가? (중략) 하나님의 형상과 상속자, 청지기와 관리인, 소작농과 임시 거주자들은 자신들에게 맡겨진 재산의 소유주에게 문자적인 부채를 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부채는 그 소유주가 기대하는 것을 산출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그런 부채를 지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세상을 책임적으로 운영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는 세상의 집주인에게 이 세상 집을 보존하며 또한 이 지상의 집을 거룩하게 만들 책임을 지고 있다.

위의 인용문에서 크로산은 우리가 부채 탕감의 메시지를 문자적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물론 이 구절을 부채 탕감이라는 구체적인 행동과 연결시키는 것은 헬라어 번역에서부터 요청되는 것이다. 하지만 크로산의 말처럼 이것을 문자적으로 이해해야 한다면, 그래서 죄의 문제가 아닌 부채 탕감의 문제가 주기도문의 내용이 된다면 우리가 하나님께 탕감받아야 하는 부채는 무엇인가?

크로산은 이 문제에 대해 ‘하나님의 형상과 상속자, 청지기와 관리인, 소작농과 임시 거류자들은 자신에게 맡겨진 재산의 소유주에게 문자적인 부채를 지고 있는 것이다.’라고 설명한다. 문제는…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빚을 탕감받는가? 내가 내게 빚진 자를 탕감해주고 하나님께 받는 탕감은 무엇인가? 탕감받으면 우리는 세상에 대한 관리 의무로부터 해방되는 것일까? 더 이상 우리는 세상을 관리하지 않아도 되는가?

크로산은 스스로 이 문제를 지적하면서도 명확한 답을 주지 못한다. 이처럼 그의 주장들은 먼저 만들어진 전제 속에 듬성듬성 끼워 맞춰져 있는 느낌이다. 그가 기존 교회 시스템 속에서 무언가를 대체하려는 듯한 모션을 취할 때 이처럼 깔끔하게 맞아떨어지 않는 모습들을 종종 볼 수 있다.

#마치며…
그 동안 수많은 주기도문에 관한 서적이 나왔다. 그 많은 서적들 속에 이 책은 어떤 의미일까? 수많은 책 위에 그저 또 하나의 책을 더할 뿐일까? 크로산은 이 책을 통해서 지금껏 자신이 그려왔던 예수의 가르침을 오늘을 사는 우리 앞에 재현했다. 크로산이 들려주는 주기도문에는 로마라는 제국 앞에 비폭력이라는 방법으로 저항하는 외로운 사나이의 외침이 있다.

그의 예수상이 수많은 비판을 받고 그의 방법론에 있어서 거부하기 힘든 약점이 존재하지만 그의 예수상은 새로운 제국주의적 폭력이라는 거대한 힘을 마주한 현시대를 살아가는 예수의 사람들에게 어떤 가치를 위해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그가 그려내는 예수상이 역사적 예수의 모습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예수상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크로산은 독자를 향해 이 길을 함께 가자고 말한다. 이 책을 읽는 사람은 아마도 그 길을 당장 걷고 싶은 두근거림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Leave a Comment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Content Protected Using Blog Protector By: PcDro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