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번째 확장, 여행의 첫 걸음을 내딛다. (눅 4:31~44)

‘갈릴리의 가버나움 동네에 내려오사 안식일에 가르치시매’

누가는 이 단락을 시작하면서 장소를 밝히고 있다. 이것은 지금까지 예수의 사역이 어디에서 이뤄졌는지를 명확히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지금까지 예수의 사역은 가버나움으로 한정되었다. 그 전에 갈릴리에 대한 언급이 나오지만 누가는 그것을 간단하게 요약만 하고 의도적으로 생략하고 있기 때문에 여기서 14절의 갈릴리는 ‘예수가 역사의 현장으로 돌아왔다’는 의미 정도로 봐야한다. 즉, 아직까지 예수의 본격적인 사역은 가버나움과 나사렛 정도로 한정되는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제 그의 사역에 있어서 첫번째 확장이 시작되려 하고 있다.

이렇게 중요한 시점에 가장 먼저 나타나는 이야기가 귀신을 쫓고 병자를 치유하는 이야기라는 것은 의미있다. 예수는 나사렛의 회당에서 자신의 사명 선언문을 낭독했다.(4:18) 그 이후에 이어지는 가버나움에서의 치유 사역은 그의 사명 선언이 현실로 드러나는 순간이다. 중요한 것은 그의 능력이 아니라 그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삶의 목적을 현실로 만들어 나가고 있다. 그의 나라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의 귀에 응하는 것이다.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4:21)

누가가 이야기를 전개해나가면서 밝히고 있는 것은 장소 뿐만이 아니다. 누가는 그 날이 안식일이었다고 말한다.

‘안실일에 가르치시매’

여기서 누가는 안식일 치료 행위가 예수의 사역 초기부터 이미 이뤄지고 있음을 분명히 한다. 그리고 앞으로 몇번의 안실일 치료를 더 언급할 것이다.(6:7,13:14) 누가는 똑같은 것을 그저 반복하는 것일까? 우리는 예수의 죽음에 있어서 이 안식일 치료가 큰 원인이 된 것을 알고 있다. 마가복음은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죽이기로 처음 논의한 시점을 예수의 안식일 치료와 연결시키고 있다.(막 3:6) 마태도 자신의 복음서를 기록하면서 마가를 그대로 인용하고 있다. 하지만 누가는 안식일 치료를 예수의 죽음과 연결시키지 않고 있다. 과연 안식일 치료가 문제였을까? 이 단락에서 청중들의 반응은 마가의 그림자 속에 있는 우리의 예상과 많이 다른 모습이다. 아무도 예수의 사역을 반대하는 사람이 없다. 누가는 오히려 이 안식일 치료로 인해서 예수에 대한 소문이 널리 퍼졌다고 기록한다. 하지만 똑같은 행위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 예수의 이동 경로가 변함에 따라 어떻게 변하는지 앞으로 누가는 지속적으로 보여줄 것이다.

사실 누가에게 중요한 것은 안식일을 범하는 행위가 아니다. 그런 것은 누가가 청중으로 삼고 있는 이방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다지 설득력이 없다. 중요한 것은 ‘무엇이 예루살렘에 있던 통치자들로 하여금 예수의 안식일 치료를 문제삼을 수 밖에 없게 했는가?’하는 것이다. 왜 그들은 이전에는 신경도 쓰지 않던 촌동네 미치광이의 안식일 행위를 문제삼게 되었을까? 그것은 그 날이 안식일이냐 아니냐 보다는 그가 하는 행위가 갖는 의미 때문이다. 그리고 누가는 그 의미를 귀신들린 자들의 입을 통해서 우리에게 들려준다.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특히나 이 서신이 로마교회와 연결되어 있거나 로마교회를 대상으로 쓰여졌을 수 있다는 가정을 감안한다면, 중요한 것은 안식일이 아니라 그가 세상에서 유일하게 로마 황제에게만 적용될 수 있었던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로 알려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누가는 통치자들이 예수의 안식일 치유를 문제시 하는 이유를 단순히 계명의 해석 문제로 축소하길 원치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새로운 시대의 도래라는 민중들의 희망이 통치자들의 땅인 예루살렘을 향해서 올라오고 있음에 대한 위기감이었다. 누가는 예수를 통해서 전해지는 하나님의 통치를 ‘복음’이라는 말로 요약한다.(4:43) 예수라는 전달자를 통해서 도래하는 복음은 이제 갈릴리 외딴 시골, 가버나움을 넘어 갈릴리 전역과 예루살렘을 향해서 나아가는 여행의 첫 걸음을 준비하고 있다.

‘예수께서 일어나 회당에서 나가사 시몬의 집에 들어가시니 …’

앞에서 우리는 누가의 의도적인 사건 배치의 좋은 예를 보았다.(4:16) 다른 복음서에는 전체 이야기의 중간쯤 등장하는 나사렛 사건을 예수 인생 도입부에 배치한 것이다. 여기서도 우리는 누가가 또 하나의 사건을 삽입함을 통해서 이야기의 흐름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끌고 가려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바로 시몬의 장모가 병에 걸린 사건이다. 이 사건은 다른 복음서에는 등장하지 않고 오직 누가복음에만 등장하는 사건이다. ‘뭐 다른 사람들이 빼먹은 것을 넣은 것이겠지’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렇다. 맞는 말이다.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전히 ‘왜 넣었나’의 문제는 남는다. 특히나 이 구절의 삽입이 전체 문맥에서 무게를 갖는 이유는 이것이 예수와 시몬의 첫만남이기 때문이다. 누가복음에서 베드로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누가는 다른 어떤 제자들보다 베드로를 좋아한다. (그 증거들은 앞으로 많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에게 있어서 예수와 베드로의 첫 만남은 곧 그들 공동체의 정체성과 직결되는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누가가 제시하는 제자도의 그림이 독특한 것은 이 사건이 언급되지 않은 다른 복음서들이 예수와 제자들의 만남을 어떻게 그리고 있는지를 살펴보면 더 확실히 드러난다.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거기서 더 가시다가 다른 두 형제 곧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이 그의 아버지 세베대와 함께 배에서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부르시니 그들이 곧 배와 아버지를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마 4:18~22)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곧 그물을 버려 두고 따르니라 조금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보시니 그들도 배에 있어 그물을 깁는데 곧 부르시니 그 아버지 세베대를 품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 두고 예수를 따라가니라 (막 1:16~20)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에 나타나는 제자들에 대한 기사에는 별다른 이야기가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이유로 그들이 예수를 따라나섰는지에 대한 설명이 없다. 예수가 제자들을 부르고 제자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쫓아간다. 하지만 누가가 편지를 쓰고 있는 데오빌로 같은 사람들에게 이런 설명은 아무 것도 던져주지 못한다. 다른 복음서의 청중에 비해서 사회적 지위가 있고 학식이 있는 대상에게 그냥 불러서 모든 것을 버렸다는 것이 설득력 있었을리 만무하다. 어쩌면 할일 없이 빈둥거리는 실패자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누가에겐 뭔가가 더 필요했다. 모든 것을 버리면서까지 예수를 따를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설명해야만 했던 것이다. (이런 노력들을 특히나 후기에 기록 되었고 서술 형식을 띄고 있는 복음서누가와 요한 등에 많이 나타난다.)

이 이야기가 끼어듦으로 해서 5장에서 예수가 그들을 부를 때 그들은 이미 예수가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는 상태였다는 전제가 성립이 된다. 그렇다면 자연히 묻게 된다. ‘그들은 왜 이전엔 예수를 따르지 않았는가?’ 가능성은 두가지다 예수가 베드로를 부르지 않아서였다고 순진하게 생각하거나 베드로가 따를만한 가치를 느끼지 못했다고 보는 것이다.

베드로에게 예수를 따라 나선다는 것은 자신의 생업을 포기하는 것이다. 예수가 자기 장모를 낫게 해준 은인이라고 해서 그를 무작정 따라 나설 수는 없다. 그것은 신앙이 아니라 광신이다. 뒤에서 다시 말하겠지만 누가는 절대 광신같은 제자도를 말하지 않는다. 그의 청중은 그런 이야기가 먹힐 사람이 아니다. 누가는 베드로가 예수를 따를 수 밖에 없었던 감춰진 이야기를 다음 단락에서 자신의 청중들에게 풀어낼 것이다. 그리고 ‘사람을 낚는 어부’라는 말이 베드로의 삶을 어떻게 바꿔놓았는지 말할 것이다. 그 전까지 베드로는 신중하다.

‘해 질 무렵에 사람들이 온갖 병자들을 데리고 나아오매’

‘해 질 무렵’이라는 시간 표현을 통해서 우리는 이 모든 이야기가 하루만에 일어난 이야기라고 이해하게 된다. 누가는 예루살렘을 향해 가는 예수의 발걸음을 재촉한다. 그리고 그 소문이 얼마나 급속도로 퍼져 나갔는지 보여준다. 하지만 이런 소문으로 몰려든 사람들의 지지를 뒤로하고 예수는 자신의 사명이 지시하고 있는 하나의 방향을 향해서 나아간다. 예수를 통해서 전해지는 하나님의 나라는 이제 갈릴리를 넘어 그 경계를 넓혀가고 있다.

– iPad에서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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