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은사 땅밟기, 전쟁신화에 사로잡힌 한국교회

땅밟기에 대한 기억


대학교 1학년 시절 지방으로 전도여행을 갔었습니다. 당시에 그 지역에는 통일교 사당이 있어서 그 곳에 가서 기도하기로 했습니다. 들키면 안된다고 하면서 소리도 내지 못하고 그냥 주변을 구경하는 척 하면서 몇바퀴를 돌면서 기도했습니다. 일명 땅밟기라고 하는 의례입니다. 소극적으로는 그 땅이 변화되도록, 조금 더 적극적으로는 절, 사당 등이 무너지기를 기도하기도 합니다. 물론 주된 목적은 상대 종교에 대한 비난이나 저주보다는 복음을 전하는데 방해가 되는 상황들에 영향받지 않고 전도가 잘 이뤄지기를 바라는 기도입니다만 일반적으로 그 표현은 원래 목적에 필요한 수위를 넘어 있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땅밟기가 이뤄지기 위해서는 먼저 선교대상 지역을 정하고 리더들이 정탐이라는 것을 갑니다. 그래서 그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영적지도라는 것을 그립니다. 근처에 있는 우상이나 나쁜 영적 세력의 주도아래 있는 것이라 여겨지는 장소들(절, 점집, 성황당 – 우상의 영 / 사창가, 모텔 – 음란의 영 / 은행가, 사채업 사무소 – 맘몬의 영)을 체크하고 지도에 표시합니다. 그리고 이런 지도가 완성되면 팀원들이 그 지역을 위한 중보기도를 하고 실제 가서 그 지역을 돌면서 땅을 밟습니다. 때로는 그 지역에서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가 지역을 내려다 보면서 기도를 하기도 합니다. 이들은 이렇게 이 지역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영적 전쟁의 한 형태라고 믿습니다. 이런 땅밟기의 성경적 근거라면 여러가지가 있겠으나 보통 ‘평강의 주님이 속히 사단을 너희 발 아래에 상하게 하시리라’라는 로마서 말씀이나 ‘여리고 사건’, 그리고 더 노골적으로는 엘리야의 갈멜산 대결등을 들곤 합니다. 


대학생 때는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모르고 그냥 선배들이 그렇게 하는 거라고 해서 따라 했습니다. 무슨 스파이 놀이처럼 재미있기도 했고 정말 그렇게 하면 뭔가 신기한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국내의 몇몇 선교단체들에서는 전도여행을 가거나 혹은 수시로 이런 의식을 치르고 있습니다. 이번 봉은사 사건이 어떻게 일어난 것인지 그 세밀한 정황을 정확히 알지는 못하지만 땅밟기를 그렇게 드러내놓고 사진을 찍으면서 하는 경우는 별로 없습니다. 물론 이 이유는 상대 종교에 대한 배려라던가 존중 같은 것은 아니고 들키면 곤란해지기 때문입니다. 

일단 저는 여기서 봉은사에 찾아가서 이런 행동을 한 사람들의 몰지각함을 이야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개인적으로 상대종교에 대한 이런 행동들은 같은 기독교인으로서 너무 부끄럽고 불교도들에게 미안할 뿐입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이런 땅밟기같은 행위들이 단순히 일부 기독교인들의 몰지각한 행위가 아니라 꽤 넓게 퍼져있는 잘못된 문화이기 때문입니다. 남의 종교 사찰에 들어가서 기도하는 것은 남에게 피해를 주는 행위이니 안보이는 곳에 가서 하라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문제는 이런 왜곡된 전쟁신학 개념을 개인적인 열심 수준에서가 아니라 꽤 많은 수의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뜻이고 방식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여리고 전투에서 유래하는 전투적인 의미의 땅밟기

이런 영적 전쟁의 상징은 성경에 나오는 여리고 전쟁에 그 모티브를 따온 것입니다. 성경의 기록이 가지고 있는 의미보다는 상징을 그대로 가져옴으로써 성경을 근본적으로 오해하고 있는 사례라고 하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에 참여하겠다며 온 몸에 채찍질을 해대는 고행과 개념상으로는 그렇게 다르지 않은 행동이지만 현재 기독교 내에서는 이런 행동은 마치 순교자적 행동인 것처럼 추앙되며 그에 대한 비판은 십자가를 지고 고난받는 것으로 미화됩니다.
일부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뤄지는 경우들도 있긴 하지만 지금도 일부 선교단체에서는 너무나도 당연하게 선교지에서 지진으로 절이 무너진 일이라도 일어나면 당장에 그것을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일어난 사건에 대한 해석에서 멈추지 않고 조금 더 적극적으로 그런 일들이 일어나게 해달라고 기도하거나 이번 봉은사 사건처럼 실제 그런 퍼포먼스를 하는 경우까지 이르게 됩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따지자면 얼마 전 태풍에 교회 첨탑이 꺽이고 십자가가 거꾸로 쳐박힌 모습이나 바이블엑스포 행사장이 피해를 입은 것도 하나님의 심판이어야 맞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한국 교회의 위기의 상징으로 인식하고 회개를 촉구한 선교단체는 많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런 것은 사탄의 방해라고 보는 경우들도 있습니다. 전형적인 아전인수식 해석의 모델이라고 하겠습니다. 일어난 어떤 사건에 대한 이러한 분석의 밑바닥에는 ‘하나님은 내편이다’라는 잘못된 전제가 깔려 있습니다. 그래서 잘되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이고 못되면 사탄의 훼방이 되는 것입니다. 
구약과 신약의 모순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기에 행한 살육에 대해서는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를 혐오하는 이유가 되고 있습니다. 물론 이런 혐오가 있어온 것이 어제 오늘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이런 거부감의 기원은 기독교가 탄생하던 초대교회 당시까지 올라갑니다. 누구에게든 구약의 잔인하고 무서운 하나님과 예수가 전해준 사랑의 하나님의 이미지를 일치시키는 것은 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선한 신과 악한 신을 구분하고 세상을 이 둘의 전쟁으로 이해하는 이분법적인 영지주의가 기독교 안에 들어오게 됩니다. 이들은 세상의 육신적인 것은 악한 것이고 영적인 것이 진정한 것이며 선한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물적 세상을 창조한 야훼는 악한 신이고 예수가 전해주는 사랑의 하나님은 선한 신이라고 구분하며 구약을 거부했습니다.
이처럼 구약과 신약의 사이에는 신적 폭력이라는 건너기 힘든 강이 있습니다. 수많은 신학자들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갖가지 해석들을 내어놓지만 그냥 그런가부다라고 믿는 사람이 아니라면 머리로는 쉽사리 이해하기 힘든 모순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런 서로 다른 하나님의 모습은 성경 가운데 분명히 존재하는 부분입니다. 문제는 이런 기록들을 당시 사회적 상황 가운데서 이뤄진 신앙의 고백으로 보지 않고 하나의 통일된 신앙체계로 보는 것으로 인해서 일어납니다. 하나님은 한분이고 한분인 하나님은 반드시 하나의 일관된 패턴을 통해서 일해야 한다고 믿는 근본주의자들은 신적 폭력을 악에 대한 심판으로 해석해냅니다. 여기에 영지주의의 선신과 악신 개념이 들어오면서 바울이 말하는 죄의 문제를 독립적 존재인 사탄과 연결시키게 되고 마치 사탄은 하나님을 향해 대적하는 이 세상의 나쁜 신처럼 이해하게 됩니다. 하지만 바울은 만방의 모든 신은 헛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사탄은 하나님에게 대적하는 신적 존재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를 반영하듯 구약에서 사탄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존재가 아닌 고발하는 자로서 하나님의 심부름꾼으로 등장하는 모습들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전쟁 신학은 마치 하나님은 다른 여러 영적 존재들 가운데 가장 힘쌔고 뛰어난 존재라는 다신교적 전제 위에서 생겨난 것이지 유일신적 신앙 위에 자리잡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전쟁 신학의 극을 보여준 좋은 예가 최근에 부시가 보여준 이라크 전쟁의 신앙적 호소와 과거 기독교의 참혹한 실수 중에 하나로 꼽히는 십자군 전쟁입니다. 이런 전쟁 신학은 악은 육적 혹은 영적 폭력을 통해 제압되어야 할 것으로 여깁니다. 악이 마치 하나님을 위협하고 있으며 우리가 하나님을 도와서 일을 해결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우리가 더 기도하거나 더 행동해야지만 하나님의 힘이 세져서 사탄을 이기고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이런 신앙은 너무나도 당연하게 하나님을 지지하는 편에 서는 사람들의 성공을 보장하는 성공신학, 기복신앙의 방향으로 흘러나갑니다. 이것은 기독교 신앙이 아닌 요정신화에 나오는 주술행위이며 정작 엘리야가 싸웠던 바알과 아세라 신앙의 변형된 형태라고 볼 수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하나님의 역사는 하나님이 이뤄나가시는 것이지 인간이 돕거나 인간의 열심을 통해 하나님이 이루실 수 있는 것이라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두가지 상황, 두가지 신앙 고백

이런 전쟁 신학은 외국에 포로로 있던 당시 이스라엘의 상황에서 자신들의 역사를 신의 행동으로 해석하는 과정 가운데 있는 신앙 고백의 책들입니다. 그 당시의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나님은 나를 위해 일하시거나 다른 민족의 신을 공격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약한 자, 타국의 종된 상황 가운데 있던 민족을 위해 세상의 권력과 힘을 심판하시는 분으로 비춰집니다. 여기에는 이스라엘 민족의 열악하고 처참한 삶의 정황이 있으며 하나님의 행동의 근거는 이런 그들의 상황 위에 있습니다.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동의하기 어려운 문제이지만 그 당시로서 이스라엘 가나안 정복이 정당화 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이 약자였고 가나안 정복의 문제는 자신들의 생존의 문제가 걸려있는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반면 예수의 신학은 그 반대가 됩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더 이상 종살이 하는 민족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억압하고 종으로 부리는 자리에 서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는 당시 사회에서 약자, 죄인들로 낙인 찍힌 사람들의 편에서 신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간단히 말해 성경 가운데 나타나는 하나님의 모습은 이스라엘의 편이 아닌 고난받는 자의 편에 서시는 분입니다. 이처럼 성경 안에는 상황에 따라 양면적인 하나님의 태도가 나타납니다. 문제는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자신들의 위치가 예수가 비난한 이스라엘의 위치에 있으면서도 여전히 자신은 하나님의 심판과 판단의 대상이 아닌 보호와 언약의 대상으로 감정이입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구약에서 우상 파괴는 존재로써 사탄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안에서 일어나는 욕망을 제거하고 율법을 다시 세우는 과정이다. 여기서 공격의 대상은 하나님을 떠나려는 인간의 욕망과 마음이지 외국인과 내국인 혹은 타종교인과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성경에는 다른 민족의 우상숭배를 이스라엘을 통해서 심판하시는 경우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을 떠나려 하는 것이고 그들이 끊임없이 하나님 아닌 다른 것(실제 신/신적 존재/영적존재가 아니라)을 자신의 신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심판하고 정죄하시는 대상은 타종교인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그분의 백성이었습니다. 

진정한 영적전쟁을 위해
영적전쟁이란 무엇일까요? 열심히 기도해서 봉은사를 무너뜨리는 것일까요? 한번 생각해봅시다. 그렇게 열심히 기도해서 봉은사가 무너졌다면… 그런데 봉은사의 사람들이 이런 기도에 대해서 알고도 용서해준다면… 이 영적전쟁은 누구의 승리일까요? 기독교인은 정신차렸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영적 전쟁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영적 전쟁은 사랑과 더 나은 행위로 하는 것이지 저주로 하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제가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저도 어린 시절 멋모르고 비슷한 행동을 했던 사람으로써 다시한번 기독교인으로써 봉은사의 모든 분들과 불교도님들에게 대신 사과의 말씀을 전합니다.   

3 Comments

  1. 저는 땅밟기라는 말 요번 사건으로 처음들었는데, 이게 오래전부터 그리고 조직적이고 광범위하게 행해져왔던 행태라는걸 이 글 보고 알게 되었네요. 너무 차분하게 글을 쓰셔서 오히려 더 으스스 합니다. 저들 개신교인들 보면 꼭 좀비 영화(황혼에서 새벽까지) 보는 것 같은 무서움을 줍니다.

  2. 땅밟기는 그 땅이 저주받았다고 마귀가 있다고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보며 그 땅을 축복하며 주님께 돌아오기를 간구하는 것이 올바른 땅밟기이겠지요 저도 스님들이
    교회에서 목탁치며 돌아다니신다면 상상이 안가네요 ㅋㅋ ㅠ 신드롬의 모순된부분들 저도 종종 생각하던건데 잘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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