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사명선언문 (눅 4:14~30)

이 구절은 누가복음에서 예수의 사명선언문으로 불리는 부분입니다. 즉, 예수의 삶의 목적과 비젼이 드러나 있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가지 특이한 점은 누가는 이 기사 가장 첫부분에 예수의 갈릴리 사역을 간단하게 요약하고 본격적인 이야기는 나사렛에서부터 시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14 예수께서 성령의 능력을 입고 갈릴리로 돌아오셨다.
 예수의 소문이 사방의 온 지역에 두루 퍼졌다.
15 그는 유대 사람의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셨으며, 
모든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셨다.

이전 본문에서 사탄의 시험을 통해서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자격을 인증받은 예수는 성령의 능력으로 갈릴리로 돌아와 본격적인 사역을 시작합니다. 다른 복음서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갈릴리에서의 예수의 사역은 굉장히 성공적이었을 것입니다. 또한 15절이나 23절이 보여주고 있듯이 누가 역시 이런 성공적인 갈릴리 사역을 인식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누가가 이 부분을 의도적으로 생략/탈락 시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복음서에서는 나사렛 기사가 중반부(마13장/막6장)에 등장하고 있는 것에 비해 누가는 이 기사를 예수의 공생애 가장 첫 사건으로 끌고 올라옵니다. 이것은 누가가 이 사건을 통해서 예수의 공생애를 특징적으로 요약하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측면으로 보면 마태와 마가에서 예수의 첫 복음 전파의 메시지인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를 대체하거나 혹은 재해석 하는 메시지로 이 나사렛 사역이 등장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쨋든 누가의 이런 배치는 예수의 사명선언문이라 할 수 있는 이사야의 말씀과 함께 예수의 사역 전체를 요약하는 의미로 공생애의 가장 첫 단락을 열고 있습니다.

예수의 사역은 성령에 대한 언급과 함께 종말론적인 이미지를 갖게 됩니다. 그리고 그 종말론적 이미지는 예수가 회당에서 읽으신 이사야의 글로 인해서 더욱 증폭되게 됩니다.

18 “주님의 영이 내게 내리셨다. 주님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셔서,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셔서, 포로 된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먼 사람들에게 눈 뜸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 주고, 
19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여기서 누가가 인용하고 있는 이사야의 본문은 바벨론의 포로귀환을 의미하는 구절 가운데 있는내용입니다. 이사야의 문맥에서 이 구절은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들을 위로하고 오래 황폐하였던 곳을 다시 쌓는 그림으로 그려지지만 누가는 여기서 이스라엘을 의미할 수 있는 ‘시온’이라던가 ‘의의 나무’같은 구절들이 위치한 뒷부분을 잘라내고 앞부분만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이런 생략의 효과는 이사야의 메시지를 이스라엘의 회복이 아닌 가난한 자에게 전해지는 복음, 포로된 자를 해방시키고 눈먼 자에게 눈뜸을 선포하는 은혜의 메시지로 집약되는 효과를 나타내게 합니다. 그리고 이 내용은 인용구의 마지막 절에 ‘은혜의 해’라는 말로 표현된 해방과 놓임의 때인 희년을 선포하면서 마무리 됩니다. 여기에 이어지는 예수님의 말이 걸작입니다.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서 오늘 이루어졌다.”
예수는 이 희년의 선언이 오늘 이루어졌다고 말합니다. 당연한 얘기지만 당시에 이스라엘은 희년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로마 식민지배 아래 있던 당시 상황에서 희년이라는 것이 원래의 의미대로 지켜졌을 것이라고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아마도 당시의 희년의 의미는 이스라엘에 대한 회복의 메시지로 종말론화 되어 전해졌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 예수의 희년 선언은 극단적인 현재적 종말의 선언임과 동시에 그 대상을 이스라엘로 한정하던 부분들을 생략함으로써 애매한 긴장을 만들어 내게 됩니다. 하지만 아직까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명확하게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회당 안에 모든 사람들은 예수의 이 말씀에 놀라면서 감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 구절에 나타나는 예수의 비유들로 인해서 생겨납니다.


예수께서 또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아무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누가가 왜 나사렛의 사역을 예수의 공생애 처음에 위치하게 했는지를 짐작해볼 수 있는 실마리를 얻게 됩니다. 복음서의 기록에서 예수가 나사렛에서 배척받은 사건은 공통적으로 기록된 사건입니다. 하지만 누가는 이 기록을 단순히 선지자가 고향에서 배척받는 사건으로써가 아니라 그 배척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마지막 때의 비전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누가가 그려내는 마지막 때의 모습은 고향에서 배척받는 선지자의 이미지를 넘어 엘리야와 엘리사의 이야기를 통해 이스라엘과 이방세계의 극단적 대체로 나아갑니다. 

우리는 앞에서 누가가 의도적으로 나사렛의 기사를 공생애의 가장 처음에 놓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분명 그 앞에 성공한 사역이 있음에도 누가는 예수의 사역을 고향에서의 배척이라는 이미지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배척의 이유는 예수의 사명선언 때문이었습니다. 이 것은 단순히 처음 일어난 사건으로서의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이 모습이 앞으로 누가가 그려나갈 예수의 삶을 요약해주는 사건임을 이해해야 합니다. 예수는 배척받습니다. 이전의 선지자들에게도 그랬듯이 예수는 이스라엘로부터 버림을 받고 죽임을 당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고난과 죽음은 그가 참 선지자임을 증명하는 증거가 될 것입니다.

나아가 누가의 공동체는 이방인들로 구성되어 있는 공동체였을 것입니다. 그 공동체가 로마에 있었는지 어떤지는 정확한 부분은 아닙니다. 다만 그들에게 이방인 선교의 정당성 문제는 피해갈 수 없는 문제였다는 점입니다. 누가복음 전체에 흐르고 있는 이방인 선교의 정당성은 바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참 선지자를 배척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누가공동체의 견해들이 바울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는 한번 연구해볼만한 주제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어쨋든 누가공동체는 예수의 이 선포를 통해서 이방인 선교의 정당성을 바울을 넘어 예수에게까지 끌고 올라갑니다. 즉, 이 구절을 통해서 누가가 노리는 효과는 두가지입니다. 첫째는 배척받는 선지자로 예수를 그려내는 것이고 두번째는 이방인 공동체의 정체성의 기초를 예수에게서 확립시키는 것입니다.

결국 나사렛의 주민들은 예수가 보여주는 마지막 날의 비전에 화가나서 예수를 죽이려고 합니다. 자기들에게 주어졌던 약속의 수혜자가 자기가 아닌 이방인들이 된다는 사실을 그들은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정작 복음의 방향을 이방인에게로 향하게 하는 것은 나사렛 사람들의 거부를 통해 상징되고 있는 하나님의 선지자를 향한 이스라엘 거부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누가는 나사렛 동네 사람들이 예수를 거부하는 사건을 통해서 이방인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거부하는 이스라엘의 모습을 미리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선언은 자기들 앞에 와서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는 참된 선지자를 죽이고 십자가에 못박는 이스라엘의 거부를 통해서 그대로 성취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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