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인이 일제고사를 찬성할 수 있는가?

이 내용은 2010년 7월 21일 수요예배 설교 가운데 일부 내용을 발췌한 것입니다.

얼마 전 우리나라 교육계에 큰 이슈가 있었습니다. 바로 학업성취도평가라는 것이지요. 흔히들 일제고사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전국에
모든 학교들이 일시에 동일한 시험을 봐서 어떤 학교의 어떤 아이들이 얼마나 수업을 잘 따라오고 있는지 평가하겠다는 것입니다. 일부
교사와 부모들, 그리고 학생들이 이 일제고사에 반대해서 시험을 거부하고 체험학습을 강행한 것이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었습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굉장히 긍정적인 시험입니다. 학생들의 수준을 정확하게 측정해서 그에 맞는 수업을 할 수 있게 해준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에 몇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단순히 학생들을 위한 것이라면 굳이 전국구 규모의 평가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를 등급으로 나눠서 공개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냥 조용히 담임선생님과 관련 교사들만 연람할 수 있도록 하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 시험의 결과는 총 네 개의 등급으로 아이들을
구분하고 그 결과를 학교별로 비교하여 공개하고 있습니다. 학교 성적이 공개되고 다른 학교와 비교된다면 그리고 내가 만약 그
학교의 교장이라면 어떻게 할까요? 자연스럽게 성적을 올리기 위해서 아이들에게 경쟁적인 수업을 강요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나라처럼
학업성취도라는 것을 국영수 중심의 성적으로 밖에 측정할 수 없는 사회에서는 더 그렇습니다.
(몇일 전 뉴스에 성적이 오른 학교만 공개한다는 뉴스를 봤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다지 많이 변할 것 같지 않습니다.)

물론 이 제도가 어떤 효과가 있는지
없는지, 어떻게 진행될 수 있는지, 정책적으로 타당한 것인지에 대한 것은 저는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 함께 나누고자 하는 것은 “크리스챤이 끝없는 경쟁을 강요하는 세상의 법칙대로 살 수 있는가?”의
문제입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경쟁과 발전이라는 환상을 통해 세상을 힘의 원리와 재물의 원리로 줄 세우고 사람들이 그 법칙에 맞춰
살아가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이해하게 합니다. 하지만 전국에 있는 모든 학생들을 하나의 기준으로 줄 세워서 등수를 매기고 등급을
나누는 곳에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관계를 창조하실 때 목적하신 사랑이나 돕는 자로써의 인간의 역할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너무나도 당연한 얘기이지만 하늘의 백성이 이 땅 가운데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세상의 법칙대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아닌지를 구분하면서 경계하며 살아가는 것과 그것에 어울려 함께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난 길을 향해 달려가는 것은 다른 결과를
가져올 수밖에 없습니다.

얼마 전 한 여고생이 집 창문에서 뛰어내려 자살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죽은 여고생의 유언장에는 딱 네
글자가 적혀있었다고 합니다. ‘이제 됐어?’ 그리고 그 옆에는 훌륭한 점수를 받은 성적표가 놓여져 있었습니다. 엄마가 그토록
바라던 수준의 성적이었습니다. 아마 이 아이가 목숨을 끊지 않았다면 ‘누구네 딸은 그렇게 공부를 잘 한다더라’라며 어떤 엄마의
입에서 오르내리는 훌륭한 아이였을 것입니다.

흔히 크리스쳔 부모님들이 착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나는 아이들에게 그런 거 강요한
적이 없어요.”라고 말씀들을 많이 하십니다. 하지만 지금의 아이들은 세상이 그것을 원하고, 학교에서 그렇게 가르치고, 그렇게 했을
때 칭찬받는 친구들을 보고 자라며 그 경쟁에서 낙오된 사람들을 실패자라 부르는 세상 속에서 살고 있는 아이들이다. 그런
아이들에게 그리스도인 부모의 사명은 아이들이 알아서 가게 내버려 두는 것이 아니라 그 가치가 아닌 다른 가치가 더 값진 것이라는
것을 삶으로 보여주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 아이들의 가치가 단순히 문제 몇 개 더 맞추고 몇명의 아이들을 밑으로 깔고
있느냐로 측정될 수 없는 것임을 알게 해줘야 합니다.


창조론과 진화론이라는 말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창조론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믿는 기독교인들의 세계관을 의미합니다. 진화론은 모든 것이 작은 세포에서부터 진화되었다고 믿는
세계관을 의미합니다. 여기에는 과학적인 논란들이 있습니다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런 진화론이라는 주장들이 나오게 된 배경이
되는 그들의 가치관입니다. 진화론의 논리는 단순합니다. 환경에 따라서 우성인 유전자를 가진 것들은 살아남고 열성인 유전자를 가진
것들은 퇴화해서 멸종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이렇게, 이렇게 생겨먹었는데 어떻게 이렇게 되었을까 역추적하다보니 내린 결론이 ‘아~
강한놈이 살아남는구나’
라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자연선택설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창조론은 조금 이야기가 다릅니다. 창조론은 세상이 되어진 것을 보면서
강한놈이 살아남았다라고 말하지 않고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를 이야기합니다. 이 둘의 차이는 과학적 이론이기 이전에 세상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방식에서 차이를 보입니다. 즉, 내가 어떻게 세상을 보고 있는가? 나는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살아가는가?를 보여주고
있다는 말입니다.

진화론을 믿는 사람들은 세상이 진화론의 법칙에 따라 움직인다고 믿습니다. 더 강한 놈은 살아남고 약한 놈은
퇴화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옆에 있는 녀석에게 뒤쳐지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어떻게든 살아남아서 자기의 씨를 후손에게
퍼뜨리려는 동물들의 본능처럼 살아남기 위해 노력합니다. 하지만 창조론을 믿는 사람들은 세상은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 그리고 목적에
의해서 움직인다고 믿습니다. 창조론에는 경쟁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 뜻에 순종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의 문제만이 있을
뿐입니다. 모든 창조물은 동일한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서 창조되었고 각각의 창조물들은 그들 고유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진화론을 신뢰하는 세상은 끊임없이 죽기 싫으면 남을 밟고 일어서라고 말하면서 경쟁을 강요합니다. 그런 세상 가운데서
하나님의 창조를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것은 우리가 그 법칙대로 살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경쟁에 의해서 강한 자가 살아남아 이끌어 가는 것이 세상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목적하신 뜻에 따라 이끌려 가는 것이
세상의 법칙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은 등급에 따라 구분되어지고 서열 매겨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평등하며 서로를 향해 돕는 자로서 지음 받았다고 말해야 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인 것입니다. 끊임없이 경쟁을 강요당하는 우리 아이들에게 세상의 잣대가 우리
아이들을 줄세우거나 등급매길 수 없음을 알게 해주고 세상의 기준에서 뒤쳐지는 것이 결코 실패자가 되는 길이 아니라 나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발견해 나가는 과정임을 알려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션이라는 연예인의 고백을 들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션은 자신의 아이들 첫돌 때 돌잔치를 하지 않고 그 비용을 모아서 앞을 보지 못하는 아이들의 눈을
수술해주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묻지 않습니까? “아이들이 돌잡이 때 뭘 잡았어요?” 돌잡이 해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아이들의
의지와 관계없이 돈을 잡게 하려고 별 노력을 다하지요. 그 때 션은 그 사람들에게 이렇게 답한다고 합니다. “우리 아이는
돌잡이로 이웃의 손을 잡았습니다.”
여러분의 아이들의 손에는 무엇을 쥐어주고 계십니까?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를 향해 경쟁을 강조합니다. 이것은 세상의 법칙입니다. 이전에도 그랬고 앞으로는 더욱 그럴 것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이런 세상의 법칙으로부터 빠져나와 산 속에 들어가서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주님이 내일
당장 오시지 않는 이상 세상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우리 아이들은 시험도 봐야하고 승진을 위한 경쟁도 해야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창조를 고백하고 사는 사람은 누군가와 경쟁하기 위해서 그 일을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경쟁하는 것은 원래 없던 것이
생겨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래 우리 마음에 담아주신 것이 오염되고 왜곡 된 결과입니다. 바로 사랑소망이라는 가치입니다. 우리
속에 하나님이 주신 사랑과 소망이 원래의 방향을 잃어버리고 하나님과 사람이 아닌 돈과 명예 혹은 다른 안정감을 찾아갈 때 그것은
다른 누군가와 벌이는 경쟁이 되고 그 과정 가운데서 우리의 이웃은 사랑의 대상이 아닌 경쟁의 대상으로 바뀝니다.

하나님의 창조를
믿는 우리들은 그 왜곡된 사랑의 방향을 원래의 자리로 돌려놔야 할 것입니다. 경쟁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소망함으로 공부하게 하고
성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하기 위해서 일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아이들에게 꿈의 가치를 가르치고 세상에 의해서 줄 세워진
가치대로가 아니라 그 사람이 창조된 가치로 사람을 대하는 것이 함께 살도록 지어진, 그리고 다른 누군가를 돕는 자로 창조된 우리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길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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