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례요한과 예수님 (눅 3:1~22)



요한의 복음
예수의 사건을 써 내려가는데 있어서 세례요한을 빼놓고 이야기하기는 힘듭니다. 역사적 예수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아마도 예수님이 공적인 활동을 시작하기 전까지 세례요한의 제자 중에 한명이었을 것이고 그에게 세례를 받았으며 요한이 체포된 후 그의 하나님 나라 운동을 이어받았을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세례요한이라는 존재는 초대교회에도 꽤 큰 이슈였던 것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서들은 예수님의 사역에 있어서 세례요한의 위치를 설명하기 위해서 꽤나 애쓰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세례요한의 메시지는 무엇이었을까? 누가에 따르면 세례요한이 전한 것은 회개의 세례였습니다. 이는 마가의 것을 그대로 가져온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누가는 그런 회개의 세례가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인 설명합니다. 여기서 유명한 독사의 자식 구절이 나오지요. 이것은 독특하게도 마가에는 나오지 않고 마태와 누가에만 공통적으로 나타납니다. 아마도 둘 중에 하나가 다른 것을 보고 썼거나 공통된 또 다른 자료를 사용했다는 소리겠지요. 그런데 마태와 누가가 이 구절을 인용하는 방식과 상황은 조금 다릅니다. 마태같은 경우는 비판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에게 향합니다. 이는 마태복음 전체적으로 나타나는 진정한 율법이라는 논쟁의 선상에 위치해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누가에서는 비판의 대상이 “나아오는 무리”입니다. 왜 누가의 세례요한은 나아오는 사람들을 비판할까요? 그 이유는 다음 구절에서 알 수 있습니다.


8.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누가복음의 세례요한이 비판하는 대상은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이 아니라 그저 유대인들입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지 못하면 하나님이 유대인이 아닌 다른 누군가를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실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는 이방인들을 위해서 쓰여진 누가복음의 목적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누가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결국 세계로 확장되는 하나님의 나라이고 그 과정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특권의식이 아닌 회개에 합당한 행위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의 같은 본문이 진정한 아브라함의 자손과 율법의 문제로 흘러가는 것과는 달리 누가의 본문은 유대인의 정체성 자체에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행위는 어떤 개인적 도덕이 아닌 사회적 관계 안에서 나타나는 사회적 실천으로 나타납니다.


10. 무리가 물어 이르되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11. 대답하여 이르되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 하고


12. 세리들도 세례를 받고자 하여 와서 이르되 선생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13. 이르되 부과된 것 외에는 거두지 말라 하고


14. 군인들도 물어 이르되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이르되
사람에게서 강탈하지 말며 거짓으로 고발하지 말고 받는 급료를 족한 줄로 알라 하니라


이런 사회 도덕은 구약의 소예언서 전통에서 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는 누가가 예수를 참된 선지자로써 그려내고 있다는 점에서 구약 선지자의 사회적 메시지의 회복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누가의 사회신학적인 부분은 앞으로 누가복음을 읽어나가면서 곳곳에서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천천히 하죠.^^ 무엇보다 당장 이 본문에서 나타나는 것은 회개라는 것은 사회적인 행동으로 현실화 되어야 함을 의미하고 결코 영적인 어떤 것으로 약화될 수 없는 철저히 현실적인 삶의 변화를 포함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누가는 바로 이런 행동의 변화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정체성을 규정하는 것이지 결코 유대인이라는 태생을 통해서 규정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이를 통해서 누가는 아브라함의 자손 개념을 이방인들에게까지 확장하고 배타정 정체성을 보편적 정체성으로 넓혀나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누가의 보편적 성향은 그가 상대하고 있는 독자층이 이방인들이라는 이유때문이기도 합니다.

세례요한과 예수
마태복음 같은 경우는 세례요한이 전한 메시지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였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세례요한이 옥에 갇힌 뒤 예수님께서 처음 선포하신 말씀 역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였다고 말하지요. 이와 같은 유사성으로 인해서 역사적 예수 연구에서는 예수가 세례요한의 제자 무리 중에 속해 있었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이해입니다. 아마도 누가 당시에도 이런 논란은 지속적으로 이어졌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세례요한의 위치에 대한 설명이 필요한 상황이었을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누가는 마가나 마태, 요한이 선택했던 해결책을 선택하지 않습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누가복음은 우리가 흔히 세례요한에게 해당되는 이야기로 알고 있는 것들을 다른 사람들의 입을 통해서 대신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그 반대의 전제도 성립합니다. 즉, 원래 다른 사람의 입에 있던 이야기들을 마태 혹은 요한이 세례요한의 것으로 흡수시켰을 가능성도 말이 안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그 자료들이 누가의 최고의 창작이라 할 수 있는 탄생설화 가운데 존재한다는 것은 이런 배치에 누가의 의도가 들어 있음을 짐작할 수 있게해줍니다.

21.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새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22.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일단 다른 가능성들을 전재로 하고 해석하더라도 누가복음에서 예수와 세례요한은 누가복음 상에서 직접적으로 만나지 않습니다. 요한복음처럼 예수를 알아보는 세례요한의 통찰력도, 마태복음처럼 예수를 감당할 수 없다고 말하는 세례요한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은 그저 백성이 다 세례를 받는 중에 함께 세례를 받으셨을 뿐입니다. 누가복음서의 다른 어떤 기록에도 세례요한과 예수님이 실제 만나는 장면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런 예수를 향한 세례요한의 모든 역할은 어머니였던 엘리사벳에 의해서 이미 이루어집니다.

여기서 요한의 세례장면은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초대교회 당시 예수의 신성에 관한 논쟁에서 ‘예수가 언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는가?’의 문제가 대두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인성을 강조하는 종파들은 예수는 철저히 인간이었으며 요한의 세례시에 성령이 임함을 통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런 주장에는 예수의 세례시에 하늘에서 들린 소리의 내용도 한 몫했다고 볼 수 있지요. 반면 예수의 신성을 태초부터 주어진 것으로 보는 주장들도 있었습니다. 물론 그 극단에 있는 집단은 예수의 인성을 거부하는 영지주의였지요. 요한복음의 저자는 이런 태초의 신성을 유지하면서도 영지주의의 가현설을 극복한 좋은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쨋든 이런 주장들이 단순히 후대에 신학적 논쟁거리로 다뤄질 때에서야 드러났다고 보는 것은 순진한 생각이라고 봅니다. 그 이전부터 논란이 있었을 것이고 이런 논란들은 누가가 복음서를 기록함에 있어서 하나의 압박으로 작용했을 것입니다. 누가는 여기서 요한의 세례와 하나님의 아들로써의 예수의 자의식을 분리합니다. 이미 12살 때 예수가 예루살렘에서의 사건을 통해 메시아로서,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고 있었다는 기록은 이런 차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누가는 마리아를 보고 태속의 아이를 자신의 주인으로 알아 본 엘리사벳의 고백을 통해서 예수의 신성이 태어난 후에 주어진 것이 아닌 태어나기 이전부터 주어진 것임을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누가복음은 세례요한의 세례와 예수의 하나님 아들됨의 관계를 철저히 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은 사람의 임명이나 기름부음이 아니라 그 존재자체로 증명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이런 “하나님의 아들됨”의 의미는 뒤이어 나오는 누가의 특이한 족보에서 그 진정한 의미를 드러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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