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의 의심 [눅 7:18-23]

요한의 제자들이 이 모든 일을 요한에게 알렸다. 요한은 자기 제자 가운데서 두 사람을 불러, 주님께로 보내어 “선생님이 오실 그분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하고 물어 보게 하였다. 그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말하였다. “세례자 요한이 우리를 선생님께로 보내어 ‘선생님이 오실 그분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하고 물어 보라고 하였습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는 질병과 고통과 악령으로 시달리는 사람을 많이 고쳐주시고, 또 눈먼 많은 사람을 볼 수 있게 해주셨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셨다. “너희가 보고 들은 것을, 가서 요한에게 알려라. 눈먼 사람이 다시 보고, 다리 저는 사람이 걷고, 나병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먹은 사람이 듣고,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이 복음을 듣는다. 나에게 걸려 넘어지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다.”

복음서에 묘사되고 있는 세례요한의 모습 중에 이 장면은 가장 연약한 요한의 모습을 보여주는 구절로 유명하다. 예수님의 가장 강력한 증언자로 여겨지는 세례요한이 예수를 향해 ‘오실 그 분이 당신이냐’고 묻는 장면은 그의 믿음이 흔들리는 장면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자칫 이 장면은 예언자 개인의 신앙적 갈등을 다루는 장면으로 오해될 수 있다. 하지만 누가복음의 저자는 세례요한을 그런 방식으로 다루지 않는다.

누가복음이 이 구절을 다루는 독특한 방법을 이해하려면 누가복음 전체에서 세례요한이 어떻게 다뤄지고 있으며, 그것이 다른 복음서와 어떻게 구별되는가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

마태복음 : 광야의 외치는 소리 →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려고 요한을 찾아감(3:13) → 예수가 요한을 설득하여 세례를 받음 → 시험받으심 → 요한이 잡혔다고 하는 말을 들이시고 → 예수의 사역 시작 → 요한의 의심(11장) → 요한의 죽음(헤로디아: 14장)

마가복음 : 광야의 외치는 소리 →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다(1:9) → 시험받으심 → 요한이 잡힌 뒤 → 예수의 사역 시작 → 예수가 요한의 환생으로 여겨짐(6:16) → 요한의 죽음에 대한 설명(헤로디아: 6장)

요한복음 : 광야의 외치는 소리 → 요한을 보내서 세례를 주게 하심 → 성령이 머무는 것을 목격 → 보라 하나님의 어린양이다 →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를 따라감 → 예수와 요한이 경쟁관계로 사람들에게 인식됨 → 요한이 체포가 전제됨(3:24) → 요한의 죽음이 등장하지 않음.

누가복음 : 요한과 예수의 잉태 → 마리아의 엘리사벳 방문 → 요한과 예수의 탄생 → 광야의 외치는 소리 → 요한의 체포(헤로디아)예수의 세례(요한에게?) → 시험받으심 → 예수의 사역 시작 → 요한의 의심(7장) → (죽음 생략) → 예수가 요한의 환생으로 여겨짐(9장)

누가복음의 이야기 구조에 따르면 예수의 세례는 요한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다른 복음서(특히 요한복음서)에 따르면 세례요한은 이미 그가 오실 메시아라는 것을 성령이 그 위에 내리는 것을 보고 확인했기 때문에 독자는 당연히 이 장면을 요한의 확신이 흔들리는 장면으로 이해하게 된다. 그런데 누가복음의 진술에 따르면 이런 관계가 명확하지 않다. 누가복음은 다른 백성이 모두 세례를 받을 때 예수도 세례를 받았다고 표현할 뿐 누가 세례를 줬는지 언급하지 않는다. 예수의 세례가 특정인(예를들면 세례요한)과 관계 없는 일반적인 사건이라는 말이다. 더 나아가 누가복음에서는 성령이 예수에게 머무시는 사건에서 요한이 등장하지 않는다. 요한은 그 전에 이미 체포되었다. 누가의 이야기 속에서 예수의 세례는 요한이 체포 된 뒤에 ‘요한을 생략한 채’ 언급된다.

그렇다면 세례요한은 예수를 몰랐을까? 누가복음의 진행상 그렇게 이해하기는 어렵다. 요한은 예수와 인척관계였고, 엘리사벳은 이미 예수의 존재와 그 의미를 알고 있었다. 즉, 누가복음은 요한이 예수를 알고 있었고, 이미 태중에서 알아봤음을 기록하고 있다. 다만, 누가복음 상에서 예수와 요한은 직접 만난 적이 없다. 물론 그들의 부모 세대에서는 서로 왕례가 있었고 어린시절 만났을 거라는 가정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누가 복음에서 요한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할만한 표적을 가지고 있지 않다. 요한의 의심은 이미 가지고 있던 신앙의 갈등이 아니라 유대교의 선지자로서 어찌보면 당연한 확인의 절차이다. 아니, 어찌보면 세례요한은 새롭게 나타난 예수와 경쟁하는 경쟁자 또는 그에게 반대하는 기득권으로 비춰지기도 한다. 이런 누가의 기술이 세례요한을 평가절하하려는 목적인지 아니면 그의 의심을 정당화해주려는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누가의 이야기 속에서 세례요한은 예수의 사역에 직접적인 관계를 형성하고 있지 않았고 그의 의심은 신앙적 갈등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요한이 가졌던 의심의 근원은 무엇인가? 누가복음은 그 원인에 대해 ‘요한의 제자들이 이 모든 일을 요한에게 알렸다’는 말로 적고 있다(18절). 물론 이 언급은 마태복음에도 동일하게 등장하지만, 두 복음서가 ‘이 모든 일(περὶ πάντων τούτων)’이라고 지칭하고 있는 사건이 서로 다르다. 마태복음에서는 예수가 자신의 박해와 자신에 대한 실존적 선택의 요청에 대해서 암시하는 구절 다음에 이 구절이 등장한다. 하지만 누가복음에서는 지금껏 봐온 것처럼 가치 기준을 뒤집는 예수의 비유와 그 비유가 현실화된 백부장과 과부의 사건이 요한의 의구심을 자아낸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세례요한에게 있어서 예수의 이런 말과 행동은 예수가 메시아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이 의심에 대해서 예수의 답은 그가 치료하고 있던 사람들을 보여주신다. 이것은 아마도 사 29:18-19의 반영으로 보인다.

그 날이 오면, 듣지 못하는 사람이 두루마리의 글을 읽는 소리를 듣고, 어둠과 흑암에 싸인 눈 먼 사람이 눈을 떠서 볼 것이다.
천한 사람들이 주님 안에서 더없이 기뻐하며 사람들 가운데 가난한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 안에서 즐거워할 것이다.

이 구절은 ‘그 날’에 대한 이사야의 예언으로, 예수는 새로운 시대/새로운 나라가 이미 왔음을 요한의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제시하시는 것이다. 예수는 자신에 대한 증거를 제시하지 않고, ‘그날‘이 왔음을 말하고 있다. ‘그날’의 도래는 예수가 아니라 의문을 제기한 ‘세례요한’을 판정대 위에 세운다. 이제 예수가 누구인가가 아니라 ‘그날’에 세례요한은 누구인가의 문제로 이야기의 흐름이 바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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