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함과 타블로 그리고 평균에 관한 인식

쓴지 쫌 지난 글인데… 월드컵 끝나고 올리네요.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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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 처음 들어가서 조직신학 수업 첫시간을 아직도 잊지 못합니다. 학교에서 종교철학을 가르치시던 교수님이 특별강사(?)로 들어오셔서 조직신학의 역사를 쭉~ 훑어 가면서 설명을 해주셨습니다. 초대교부부터 시작해서 어거스틴 아퀴나스 루터와 에라스무스 자유주의 신학과 해방신학, 칼바르트, 폴틸리히, 불트만과 본회퍼로 대표대는 신정통주의 신학과 복음주의까지… 그리고 마지막 쯤에 하신 이야기가 제가 지금껏 신학이라는 것에 곁다리를 걸치고 살면서 가슴에 담아두고 살고 있는 가르침이 된 것 같습니다.


“해 아래 새 것이 없다. 내가 아무리 새로운 것을 생각해냈다고 해도 결국 그것은 이 역사 어딘가에 이미 있었던 것이다. 중요한 것은 내가 어디에 속해있는지를 아는 것이다. 그러면 내가 조심해야 하는 것도 보인다.”


요즘 일어나고 있는 많은 논란들을 바라보면서 느끼는 것은 사람들이 스스로의 위치가 어디인지 모르고 있는 경우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물론 각 사람들은 각자가 옳다고 생각하는 바가 있습니다. 이른바 가치관이라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것이 전체적인 사회인식 속에서 어디쯤에 속해있는지 어떤 사상의 뒤를 따르고 있고 어떤 시대와 비슷한 결과들을 만들어 내는지를 인식하지 않고 그냥 옳은 것은 맞는 것이고 당연히 그렇게 되어야 하고 그것이 일반적이고 평균적인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태양을 손바닥으로 가리려는 어리석은 행위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애석하게도 인간이 가지고 있는 옳고 그름에 대한 인식은 주체적인 판단 기준의 결과이기보다는 대부분 그 사람이 처해있는 상황에 의해서 결정됩니다. 그 시대에 이익을 보고 안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너무나도 당연하게 보수화되게 됩니다. 때문에 사회를 흔드는 것이 좋게 보일리 없지요. 반면 사회에 의해서 대우받지 못하거나 안정을 보장받지 못하는 집단은 너무나도 당연하게 사회적인 개혁이나 변혁을 요하는 입장에 서게 됩니다.

물론 이것은 인간의 판단이 주관적이라는 논리를 설명하기 위해 이 사회를 말도 안될만큼 단편적으로 나눈 것입니다. 사실 인간 사회는 이런 설명에 담을 수 없을만큼 다양하고 실제로 이 경계를 뛰어넘어 진보적인 위치에 서는 분들도 계시고 사회적으로 얻는 것이 없지만 보수적인 성향을 가지고 계신 분들도 계십니다. 대표적으로 참전용사같은 분들이지요. 이전에 워낙에 끔찍한 경험을 했던 분들인지라 그분들에게 공산당과 북한이라는 이미지는 모든 다른 가치들과 맞바꿀만큼 중요한 것입니다. 그렇기에 국가가 그들에게 제대로된 대우를 해주지 않아도 공산당, 빨갱이라면 발벗고 나서서 싸우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물론 뒤에서 누군가 부추기는 것 같기도 합니다만…-_-) 이처럼 다양한 관계들이 있음에도 말도 안되게 단순한 설명으로 이야기를 시작하는 이유는 어떤 이유에서건 그들이 내세우는 선과 악의 판단기준과 가치판단의 척도는 각자의 상황에서 ‘이익’이라는 요소를 따라가는 것이지 어딘가에 존재하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한때 철학자들이 선과 악에 대해서 이런 저런 이론들을 내놓으며 머리를 싸매고 골머리 깨지게 싸우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포스트모던이라는 용어가 사람들 사이에 알려지면서 거대담론의 해체라는 사회적 현상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절대적 기준이라던가 거대한 이념보다 각 개인의 주체적인 세계인식이 더 중요하다는 깨달음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이런 시대적 흐름과 관계없이 절대적인 선악의 기준이 존재한다고 믿습니다. 저 역시 교회에 몸을 담고 있고 신학을 공부한 사람이다보니 어느 정도 이런 틀 속에서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우수운 것은 그렇게 절대적인 선과 악의 기준에 대해서 말하는 사람들이 모두 자기가 믿고있는 기준이 옳은 기준이라고 주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절대적인 선악은 어딘가에 존재하겠지요. 그렇게 믿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 판단을 인간이 할 수 있다는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과는 동떨어진 이야기인 듯 합니다.

얼마 전 우리나라에는 큰 사건이 있었습니다. 바로 천안함 사건이지요. 그로 인해서 현재 참여연대는 곤혹을 치르고 있습니다. 여기에
대한 여러분의 판단은 어떻습니까? 그보다 조금 지난 시점에 또 다른 사건이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가수 타블로에 대한 학력의혹
사건입니다. 얼마전 타블로가 졸업증명서를 공개하면서 일단락되는 듯 하지만 그마저도 조작 의혹을 제기하고 계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여기에 대한 여러분의 판단은 어떠십니까?

이 두가지 사건이 무슨 상관이야?라고 하실지 모르겠지만 참 아이러니하게도 이 두 사건은
의혹을 제기하는 측과 설명을 제기하는 측으로 나눠져서 격렬한 논쟁이 일었다는 측면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그것이 진행되는 수순도 비슷합니다. 의혹을 제기하는
측에서는 합리적 증거라며 반박 자료들을 제시했고 설명하는 측에서도 역시 합리적 증거라며 증거들을 제시했습니다. 서로 합리적이고 과학적 증거라고 하니 잘 모르는 사람 입장에선 여간 헷갈리는게 아닙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서 반대하는 측은
찬성측이 자료를 은폐하고 조작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찬성하는 측은 반대하는 측이 증거를 제시해줘도 믿지 않는 막무가내라고 비판하는 것이
두가지 사건의 개괄적인 흐름인 듯 합니다.

저는 천안함 사태에는 정부측의 발표를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 입장입니다. 반면 타블로 사건 같은 경우에는 의문을 제기하는 자들을 못마땅해
하는 입장입니다. 웃기지 않나요? 한 쪽에선 합리적 근거도 못믿는다고 욕하는 사람들을 상대로 그게 뭐가 합리적이냐고 반대하는
입장에 서 있고 다른 쪽에는 그게 뭐가 합리적이냐고 의혹을 제기하는 사람들에게 증거를 갖다줘도 못믿냐며 한심해하는 입장에 서
있습니다. 물론 두가지 사건은 그 성격이 다르다고 말씀하실 분들도 계실겁니다. 그리고 증거의 정도라던가 주장하는 사람들의
합리성등에 있어서 이 두가지 사건은 서로 같이 취급될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가지 사건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태도와
논쟁의 진행방식 등에서 이상야릇하게 겹쳐지는 것은 저만 느끼는 것일까요?

두사건 모두 의혹을 제기하는 측은 타블로나 정부가
애초에 투명하게 했으면 됐을 것을 공개하지 않고 감추는 것이 의심스럽다고 말합니다. 반대편에 있는 지지자 측은 이미 제기한 증거가
합리적이고 공식적이고 믿을만한 증거인데 반대자측은 도대체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물론 이 두가지 사건이 비교되는 것
자체가 기분나쁜 분도 있을 줄 압니다. 하지만 여기서 제가 말하려는 것은 천안함과 타블로 사건에 대한 입장이 일치해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천안함 사건이 타블로 사건과 같은 취급을 받아야 한다는 말도 아닙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게도 비슷한 양상의 두가지 사건에 관한 누군가의 입장이 다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 그 사건에 대한 한 사람의 입장이 각각 다르고 판단의 기준또한 사건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합리적인지, 누구의 증거를 받아들일 것인지, 이 의혹이 욕먹어야 할만큼 불손한 것인지 아니면 정당한 것인지를 판단하는 개인의 기준은 객관적이거나 일관적이기보다는 철저히 주관적이고 비일관적이라는 것입니다.


제 이야기를 계속하자면 정치적 입장에서도 저는 어떤 때는 한나라당의 정책에 동의하면서도 다른 정책에는 민주당에게 동의합니다. 대외적으로는 진보신당을
지지한다고 말하지만 그들의 주장이 달가웠던 적은 별로 없습니다. 나와 입장이 다르지만 이 사회에는 그런 사람들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지지하는 것이지 그들과 생각이 같기 때문에 지지하는 것은 아닙니다. 신학적 노선은 자유주의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예수전도단에서 훈련을 받았기 때문에 찬양집회나 간증집회에 가서
누구보다 뜨겁게 찬양도 하고 그리스도의 복음과 구원등에 대해서 열정적으로 설교하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비일관적입니다. 그리고 저는 극소수의 사람을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비일관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판단하고 옳다고 믿는 것이 상황이 달라지면 정반대로 작동하기도 합니다. 남이 하면 불륜이고 내가 하면
로멘스라는 말이 있듯이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처럼 다른 상황에 대한 다른 판단의 잣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처해있는 상황과 내가 자라온
환경에 의해서 나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려는 말은 “비일관적인게 잘못이다.”하는 것입니다. 비일관적인게 나쁜건가요? 저는 오히려 이 비일관성이 우리의 일반적인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비일관성”이라는 말이 소위 일관적이라고 말하는 어떤 입장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과 다른 입장을 가진 사람들을 비판하거나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사용하는 말이 아닌가요?

비일관성을 비논리적인 측면을 이유로 비일관성을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워낙에 논리라는 것이 사회를 지배하는 원칙처럼 여겨지다보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소위 일관적인 사람들의 논리성에 혹합니다. 그리고 “내가 잘못됐구나” 생각합니다. 정말 그럴까요?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인간은 언제나 논리적인 이유에 따라 일관된 입장을 취할만큼 단순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관계 혹은 상황이라는 것은 둘 혹은 셋으로 나누거나 열몇가지로 구분할 수 있을만큼 단순하지 않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7색깔이라고 말하지만 사실 그 속에 우리가 구별할 수 없는 수 많은 색깔들을 포함하고 있는, 그리고 어디까지가 보라색이고 어디까지가 남색이라고 정의할 수 없을만큼 다양하고 애매모호한 무지개의 색깔처럼 다양한 의견을 가지고 서로 다르게 살아가는 것이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보라색 같은 사람이 어떤 때는 남색처럼 행동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원래 그 사람의 위치가 그 경계 어디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더 나아가 보라색같은 사람이 빨간색처럼 행동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 속에 빨간색과 보라색이 함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무지개에서는 정반대편에 있는 색깔이지만 실제 색깔그래프에서 보라색은 빨간색과 연결되는 색깔로 나타납니다. 더군다나 우리는 우리의 가시범위를 넘어선 자외선이나 적외선으로 통칭되는 빨간색과 보라색 밖에 있는 색깔의 존재를 쉽게 무시하곤 합니다. 그리곤 빨간색과 보라색은 반대라고 말합니다. 그 사람을 비일관적이라며 보라색처럼 살던가 빨간색처럼 살던가 둘 중에 하나만 하라고 강요하는 것이 오늘날의 사회가 만들어내는 집단주의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가진 기준이라는 것은 때에 따라 다를 수 있는 것이지 절대적인 것이 아닙니다. 어떤 하나의 기준이 옳다고 생각되던 시대에도 그것은 정의 혹은 객관, 합리라는 이름으로 행해지지만 결국 누군가의 이익을 위해 선택된 것입니다. 반대로 잘못됐다고 생각했던 시대에도 그것은 같은 이름으로 행해지지만 역시나 누군가의 이익을 위해 선택된 것일 뿐입니다. 우리나라처럼 극단적인 역사를 가지고 있는 곳에서는 보수는 곧 독재이고 진보는 곧 빨갱이로 여겨지는 차원의 인식을 하고 있지만 사실 역사에서 진보와 보수는 옳고 그름의 문제라기보다는 시대의 요구에 의한 선택이라고 해야 옳습니다.
우리가 좋아하는 ‘합리성’이란 결국 대부분의 사람들의 이성에 합치하는 것일
뿐 모두가 인정하거나 인간이라면 당연히 옳다고 생각해야 하는 기준이 아닙니다. 즉, 합리성의 기준은 시대에 따라 사회에 따라
그리고 상황에 따라 바뀔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시대도 어떤 사상도 100% 옳았던 적도 100% 잘못됐던 적은 없습니다. 물론 이것은 옳고 그름의 개념을 깡그리 치워버리자는 말은 아닙니다. 다만, 평균이 어느정도인지 내가 얼만큼 어느쪽으로 치우쳐져 있는지 그리고 나의 편향성이 갖는 어두운 면이 무엇인지를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가진 신념, 사상이 갖는 어두운 면으로 인해 아파하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을 조금은 더 이해해줘야 하지 않을까요?


보수는 권위주의적입니다. 권력이 누군가에게 몰리기 쉽고 은폐되기도 쉽습니다. 정보가 통제되기 쉽고 부폐하기도 쉽습니다. 이분법적이며 이중잣대를 들이대어 편파적으로 판단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부자는 더 부자가 되고 가난한 사람은 더 가난해집니다. 나와 다른 존재에 대해 배타적이기 때문에 선긋기를 좋아하고 편나누기를 좋아하며 이로인한 사회적인 분열을 조장할 수 있습니다. 사회로부터 소외되고 무시당하는 소수자들의 입을 막아버리는 일들이 많습니다.


진보는 불안정합니다. 어떤 것을 추진하기 전에 너무 많이 고민하고, 정보가 개방되다보니 불필요한 정보들에 대한 통제력을 잃는 경우가 많습니다. 당연스럽게 루머나 음모론등을 걸러낼 능력이 없다고 봅니다.(집단지성? 글쎄…) 나와 다른 존재에 대해 개방적이다보니 평균적인 사람들은 그것을 받아들이기 벅찹니다. 다수의 목소리보다 자기가 옳다고 믿는 것만 따라가다보니 유연성이 떨어집니다.우리나라의 전쟁세대처럼 자신과 다른 존재로 인해 상처받은 사람들에게 이들은 배신자처럼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이런 전제 가운데서 평균을 인식한다는 것은 격렬한 논쟁 가운데 고고한 척 서서 중도의 길을 걸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어느 누구도 완벽하게 중립을 지키거나 어떤 사건을 완벽하게 독립되어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평균을 인식한다는 것은 저울위에 서는 것과 같습니다. 정확히 중심을 맞춰서 서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있음을 인정하는 것이고 나아가 이 무게중심의 어디쯤 서 있는지를 파악함으로써 그것을 통해 나와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을 인정하고 때로는 내 위치를 조정할 수 있는 유연함을 갖는 것을 의미합니다.

저울에서 완벽하게 균형을 잡을 수 있는 점은 단 한 곳 뿐입니다. 운이 좋아서 정확히 거기를 짚어 낸다면 좋겠지만 보통은 여러번 실패하고 위치를 조금씩 옮겨가면서 균형을 잡습니다. 한쪽에 너무 많은 추가 놓여져 있으면 반대편에도 그에 상응하는 만큼의 추를 놓아야지만 균형이 잡힙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나 조금씩 한쪽으로 치우쳐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꽤 왼쪽으로 가 있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조금 오른쪽으로 가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때로는 왼쪽에 서 있다가 다른 때는 오른쪽에 서게 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것은 결코 잘못되거나 비일관적이라고 욕먹어야 할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서로 다름의 결과입니다. 내가 어디쯤에 있는지를 알고 그 반대편에 선 사람들을 이해하고 때로는 내 위치가 가진 단점들을 보완하기 위해 자리를 옮겨갈줄도 아는 유연성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포스토모던, 포스트모던 하지만 아직 우리 사회는 모던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니, 사람들은 이미 포스트모던화 되었지만 정치 시스템이나 사회를 구성하는 체계들은 모던속에 살고 있는 것도 같습니다. 진정한 포스트모던은 현재의 사회를 개혁하고 뒤집으려는 움직임이기보다는 내가 알고 있는 것, 내가 옳다고 믿는 것, 내가 사랑하는 것의 반대편에 있는 것 또한 옳은 것일 수 있음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는 사회가 아닐까요? 요즘 전도서를 다시 읽기 시작하면서 이 사회가 인간의 다양성에 대한 조금은 넓은 인식을 가져줬으면 하는 마음에 글을 올려봅니다.

데렉시버스 TED 강연 : 이상한? 혹은 단지 다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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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Comment

  1. 확증편향, 인지부조화 등의 심리학 용어들이 생각나게 하는 글이네요. 제 판단이 잘못되었을지도 모르는 가능성을 염두에 둔 채 말하자면, 저는 천안함 사건은 “북한의 소행인 것은 맞는데, 증거는 정부가 조작했다”는 쪽이구요. 타블로에게 제기되는 의혹들은 정말 반반이네요. 타블로 본인의 말과 행동으로 유발된 의혹들이라 상당히 냄새는 나지만, 지금 정도 상태라면 입증책임은 타블로가 아닌 반대쪽이 져야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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