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 7:1-17] 비유, 현실로 들어오다

luke

누가복음 7장 1-17절1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가버나움의 백부장과 나인성의 과부는 앞에서 이야기했던 두가지 비유와의 연결선 상에 있는 인물들이다. 즉, 이들의 이야기는 “누가 진정한 이스라엘이냐?”라는 물음으로 압축될 수 있다. 누가는 이 두 사람을 통해서 좋은 나무와 홍수를 견뎌내는 집의 예시를 보여준다. 비유는 현실이 되고 그렇게 현실이 된 비유는 불편한 진실이 된다.

백부장

[Luke7] Centurion's Faith가버나움으로 돌아간 예수 앞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등장한다. 예수 앞에 나아온 이들은 유대인 장로들이다. 그들은 한 백부장의 사정을 예수에게 호소하기 위해서 보내어졌다. 그들은 자신들을 보낸 백부장의 인품을 칭찬하면서 그의 종을 고쳐주시길 호소한다. 백부장은 유대인들을 위해 회당을 지어주고 유대민족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표현된다.

여기 등장하는 백부장은 이방인이다. 아마도 이 사람은 이방인들로 구성된 헤롯의 외인부대 소속이었을 것이다. 당시에는 이방인들 가운데 유대교에 호의적인 이들이 많았다. 어떤 이들은 할례를 행하고 정결법을 지키며 유대인이 되기도 했지만, 할례나 정결법에 부담을 느낀 이들은 유대교의 전통과 예식을 준수하면서 유대교 밖에 머물러 있었다. 성경에는 이런 이방인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들’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2 그들은 비록 유대교로 귀의하지 않았지만 유대교의 전통과 여호와 신앙을 존중하며 여러가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었을까? 안타깝게도 그렇지 못했다. 당시에 사용되던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라는 말에는 두가지 양면성이 있다. 유대인들은 그를 칭찬하고 우대하는 것 같았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라는 이름으로 유대인의 경계 밖으로 밀어낸다. 유대인들이 백부장을 위하는 것처럼 하는 말 속에는 그들도 알지 못하는 차별과 배제가 숨어 있다. 그는 유대인을 위해 많은 것을 해주었다. 은혜를 받을만한 사람이고, 민족을 사랑하고 회당을 지어주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의 백성은 아니다. 우리와 함께 하지만 결코 ‘우리’가 되지는 못한다.

그는 원래 그런 사람이다. 그가 어떤 삶을 살건 상관없이 그는 유대인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다. 이런 것을 차별이라고 한다면 어쩌면 유대인들은 억울했을지도 모른다. 개돼지만도 못하게 여겨도 이상하지 않을 이방인을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라는 이름을 통해 자신들과 어울릴 수 있도록 했다. 이정도면 되지 않는가? 아무리 그들이 호의를 베풀려 해도 태생까지 바꿀 수는 없는 일 아닌가? 본질은 그가 착한 사람인지 아닌지에 따라서 뒤바뀔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이방인이고 그것이 그들의 본질이다. 유대인들은 그를 사랑한다. 하지만 아닌 건 아닌 것이다.

차별우리의 사회 속에는 언제나 이런 차별이 존재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이런 차별과 배제를 감지하지 못한다. 그것은 내가 정한 것이 아니기 때문있다. 그것은 원래 그래왔던 것이다. 누군가의 노력으로 바꿀 수 없는 본질적인 부분이다. 이처럼 차별과 배제는 언제나 ‘당연함’, ‘마땅함’, ‘자연스러움’이라는 이름 뒤에 숨어 쉽사리 감지되지 않는다. 3 일단 이런 전제를 인정해버리는 순간, 지금 그가 어떤 삶을 살고 있는가는 평가의 기준에서 탈락한다. 흑인이, 여성이, 동성애자가 아무리 선한 삶을 살아도 그들의 본질이 흑인이고, 여성이며, 동성애자이기 때문에 노예가 되고 성적인 폭력의 피해자가 되고 혐오의 대상이 된다. “전라도 놈들은, 경상도 놈들은 원래 그런 놈들이다. 민중은 개 돼지이고, 일본인은 오랑캐요 중국인은 떼놈이다. 지 아비가 빨갱이면 그 아들도 빨갱이다. 그 피가 어디 가겠는가? 그것이 그들의 본 모습이요, 본질이다.”

물론 어떤 사회 속에서나 본질을 돌이킬 수 있는 방법은 존재한다. 단, 그 댓가는 그의 인생을 통째로 거부해야할만큼 폭력적이다. 유대인 사회 속에서 이방인이 유대인 안으로 들어오는 방법은 할례를 받고 안식일과 정결법을 지키는 것이었다. 이는 이방인이 살아가야 하는 삶의 바탕을 깡그리 포기하는 것과 같다. 이런 폭력이 정당화 될 수 있는 이유는 이방인이 유대인의 ‘당연한’, ‘자연스러운’ 세계 속에 속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가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서 무슨 일을 했는지는 호의의 대상은 될 수 있으나 그의 본질을 바꾸지는 못한다. 그는 나쁜 나무이다.

이 지점에서 백부장 사건과 예수의 비유는 서로 연결점을 갖는다. 좋은 나무로 분류되지 않은 나무에서 좋은 열매가 나고 있다. 유대인들이 백부장을 위한답시고 하는 이야기는 사실상 그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자신들의 부당함을 폭로하는 증거가 된다. 예수의 비유를 들었던 백성들은 예수를 찾아온 유대인들의 말 속에서 하나의 물음이 떠올랐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나무는 좋은 나무이지 않은가?”

그의 선한 행동을 알고 있으면서도 애써 그 존재를 나쁜 나무(이방인)으로 규정하고 있던 유대인들을 향해서 예수는 존재가 삶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통해서만 그의 진정한 본질을 알 수 있다고 말한다. 나쁜 나무인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좋은 열매를 맺으면 좋은 나무처럼 살 수 있다는 말이 아니다. 좋은 열매를 맺어서 좋은 나무가 된 것이 아니다. 그는 원래 좋은 나무였다. 본질에 대한 사회적 규정은 수많은 편견들의 집합일 뿐 그 본질을 보여주지 못한다. 오직 그 열매로만 그 나무의 정체가 드러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편견의 파괴는 창조적 본질의 회복이다.

백부장의 믿음의 고백은 이 물음에 쐐기를 박는다. 예수는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서 이런 믿음을 본 적이 없다. 이방인이라는 그의 신분은 이스라엘의 민족적 자의식을 깨뜨리는 역전의 상징으로 사용된다. 이스라엘 민족이 아닌 나무에서 이스라엘에게서 볼 수 없는 믿음이 열렸다. 그럼 이제 묻는다. 누가 진정한 이스라엘인가? 예수는 삶의 결과물을 통해 유대인들이 당연하고 합당하다고 생각하던 세계를 재편성한다. 이스라엘이던 자가 이방인이 되고 이방인이던 자가 이스라엘이 된다. 먼저 된 자가 나중되고 가난한 자가 복되며 부유한 자가 화를 입는다.

과부

[Luke7] Widow and Her Son누가는 백부장에 이어서 또 한명의 인물을 등장시킨다. 백부장의 이야기가 그랬듯이 이 이야기도 앞서 나타났던 예수의 비유를 현실로 끌고 들어오는 상징이다. 이 여인은 그 존재를 통해 반석위에 지은 집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과거 사회에서 과부라는 존재는 절대적인 사회적 약자에 속했다. 구약성경에도 과부를 돌봐야 함을 강조하고 있고, 사회적 극빈자들을 열거할 때는 언제나 과부가 포함된다. 그 당시 여성의 재정적 권한은 거의 대부분 남성에게 의존해야 하는 구조였다. 여성의 인격/인권은 그를 대신하는 남성에 의해서만 주장될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과부라는 존재는 사실상의 법적 인격이 상실된 존재를 의미한다. 그녀에게는 자신의 재산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할 권리도 없으며, 법적으로 발언할 수 있는 기회도 없다.

남편이 죽은 경우 룻처럼 다른 친척 또는 형제 등 죽은 남편의 권리를 승계할 수 있는 사람과 혼인을 통해 그 법적 지위와 사회적 권리를 유지/회복할 수 있었다. 이를 계대혼인법이라고 한다. 이런 당시 사회적 배경을 이해할 때 우리는 누가가 이 여성을 ‘과부’라고 부르는 이유가 남편 대신 권리를 회복시켜줄 인척마저 없는 상황이었음을 알 수 있다. 다행히도 이 여인에게는 아들이 있었는데, 남편을 잃은 후 여인은 이 아들에게 의지하여 삶을 이어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누가는 과부의 유일한 사회적 대리인이었던 아들마저 죽었다고 상황을 설명한다. 이 상황은 그녀의 사회적 인격이 사실상 완전하게 상실되었음을 의미한다. 과부의 외아들, 남편도 없고 그를 돌봐줄 마지막 아들마저 죽어버린 여인. 그렇다면 이제 이 여인을 돌봐줄 사람은 누구인가?

[Ruth] sandals룻기에 따르면 공동체적 책무를 중시하던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서도 한 여성을 책임지는 것은 꽤나 성가신 일로 여겨졌음을 알 수 있다.4 이런 사회 속에서 계대혼인법은 양가적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특정인에게 책임을 지움과 동시에 다른 이들로부터 그 책무를 면제해주는 법적 장치였다. 이런 법적 장치는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아무런 문제 없이 작동한다. 하지만 더 이상 그 책무를 떠넘길 대상이 사라지는 순간이 되자 이 제도의 부당함이 드러난다. 언제나 모든 제도는 그 제도의 경계에서 그 정당함을 시험받는다. 많은 사람이 따라오고 있지만 아무도 그녀의 삶에 책임을 가진 사람은 없다. 그들은 이 여성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보호받고 면제된 자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비록 그녀를 위해 슬퍼하지만 그 슬픔 뒤에는 그 삶에 대한 방관이 숨어 있다.

예수님은 이런 부당한 현실의 이면을 꿰뚫어 보신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이 현실은 “반석 위에 지은 집”과 연결점을 갖는다. 자신들의 법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으로 여겼던 이스라엘 민족에게, 율법이 보호하지 못하는 이들은 사실상 하나님의 돌보심에서 제외된 계층을 의미했다. 그렇다면 누가 이 여인을 돌볼 것인가? 여인에게 폭풍이 불어닥쳤다. 하지만 이야기의 결론은 그 집이 무너지지 않았다고 우리에게 알려준다. 예수께서 그 아들을 다시 살리셨다. 무엇이 이 집을 굳건히 서게 했는가? 이 이야기의 마지막에서 누가는 사람들의 입을 통해 이 여인의 삶을 지탱시킨 반석의 존재를 드러낸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아주셨다.”

백부장과 과부, 두 사람은 사회에 의해 하나님의 백성의 바운더리 밖으로 배제되었던 이들이다. 하지만 그런 이들이 예수를 만났을 때, 그 경계가 뒤집지고 그들의 자녀됨이 드러난다. 자녀가 아니었던 자를 선심쓰듯 받아주는 것이 아니라, 본래 자녀 아니었던 그들이 진짜 자녀였음이 폭로되는 것이다.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긴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5, 먼저된 자가 나중되고 나중된 자가 먼저 되며6, 가난한 자가 복이 있고7, 부요한 자에게 화가 있다8.

사람들은 비유를 그저 설교의 예화같은 재미있는 이야기처럼 들으려 한다. 때로는 비유는 그냥 비유로 두고자 한다. 하지만 예수의 비유는 현실로 들어오는 순간 현실을 뒤집도록 듣는 이를 선동한다. 그저 나쁜 현실을 살아갈 힘을 주거나 현실을 개선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부정하고 해체하며 재편성시킨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가 현실로 들어오는 방법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설명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나라는 현실 속에 있지 않고 현실을 너머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 나라는 오직 비유로 말해진다.

Leave a Comment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Content Protected Using Blog Protector By: PcDro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