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 6:43-49] 문제는 열매가 아니고 나무야!

luke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지 않고, 또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다. 나무는 각각 그 열매를 보면 안다.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거두어들이지 못하고, 가시덤불에서 포도를 따지 못한다. 선한 사람은 그 마음 속에 갈무리해 놓은 선 더미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마음속에 갈무리해 놓은 악 더미에서 악한 것을 낸다. 마음에 가득 찬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이다.
어찌하여 너희는 나더러 ‘주님, 주님!’ 하면서도, 내가 말하는 것은 행하지 않느냐?
내게 와서 내 말을 듣고 그대로 행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과 같은지를 너희에게 보여 주겠다. 그는 땅을 깊이 파고, 반석 위에다 기초를 놓고 집을 짓는 사람과 같다. 홍수가 나서 물살이 그 집에 들이쳐도, 그 집은 흔들리지도 않는다. 잘 지은 집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 말을 듣고서도 그대로 행하지 않는 사람은, 기초 없이 맨 흙 위에다가 집을 지은 사람과 같다. 물살이 그 집에 들이치니, 그 집은 곧 무너져 버렸고, 그 집의 무너짐이 엄청났다.”

이 구절은 한 가지 질문을 중심에 두고 있다.

“도대체 왜? 너희는 나더러 ‘주님, 주님!’ 하면서도, 내가 말하는 것은 행하지 않느냐?”

2000년 전에 하신 말씀이지만 마치 오늘날의 교회를 향해서 하시는 말씀인 듯 생생하다. 이처럼 이 본문은 두개의 비유와 하나의 질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두개의 비유 사이에 삽입된 예수의 질문은 두 비유를 연결시키는 고리 역할을 한다. 다시 말해, 두 가지 비유는 예수가 던진 한 가지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앞뒤로 붙어 있는 것이다.

나무와 열매

fruits처음 등장하는 비유는 나무와 열매의 비유이다. 우리는 이 비유를 이해할 때, 좋은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교훈처럼 듣기 쉽다. 하지만 여기서 나타나는 나무와 열매의 관계를 조금만 주의해서 이해한다면, 지금껏 그랬듯 누가복음이 좋은 열매를 맺으라는 식의 뻔한 교훈이나 늘어놓으려고 쓰여진 책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누가는 ‘나쁜 열매를 맺는 좋은 나무는 없다’는 전제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아마도 인용된 것이 분명할 이 격언은 누가가 전하려 하는 내용의 핵심은 아니다. 이것은 이어지는 비유를 풀어나가기 위한 전제일 뿐이다. 이 비유는 좋은 나무가 되기 위해서 좋은 열매를 맺으라고 말하지 않는다. 너무나도 당연한 말이지만 열매는 나무를 바꾸지 못한다. 그저 그 나무가 어떤 나무인지를 알려줄 뿐이다(γινώσκεται). 나무만 봐서 구분이 안 간다고 해도 그 본질이 같은 것은 아니다. 나무가 서로 다른 나무라면 그 정체는 열매를 통해서 드러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열매는 나무의 정체를 폭로하는 선언이다. 비유의 강조점은 어떤 열매를 맺느냐가 아니라 맺혀진 열매를 통해 드러난 그 나무의 정체이다. 이 비유를 듣고 좋은 열매를 맺어야지라고 다짐하는 이가 있다면 원인과 결과를 헷갈린 채 열매로 나무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이 법칙에 예외는 없다. 모든(ἕκαστον) 나무는 그 열매로부터 알려진다.

누가는 비유 속의 나무를 사람으로 대치시켜, 좋은 나무와 나쁜 나무를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으로 연결시킨다. 즉, 선한 사람은 마음에서부터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악한 것을 낸다. 중요한 것은 선한 것을 내는 그 사람이 누구냐는 것이다. 이는 마치 마태복음에서 양의 자리와 염소의 자리로 나뉘는 종말론적 폭로의 현장과 같다. 마태의 이야기는 먼 미래의 이야기처럼 들릴 여지가 있을지 몰라도 누가의 이야기는 그 폭로를 지금의 현실로 가져온다. 예수의 삶을 따르지 않는 자의 정체는 나쁜 나무의 편에 선 자이다.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는 이유는 그 나무가 좋은 나무이기 때문이다.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고 싶다고 좋은 나무가 되지 못한다. 어떤 열매를 맺을지 고민하기보다 자신이 어떤 나무인지 먼저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좋은 나무가 되어야 한다.

앞에서 말했듯이 이 비유는 뒤 이어 따라오는 예수의 질문과 공명한다. 왜 너희는 나를 주님이라 부르면서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않느냐? 그 대답은 그들이 좋은 나무가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자의식에 사로잡혀 있던 이스라엘 민족을 향해서 그들의 정체를 향한 문제제기를 던지고 계신 것이다. “과연 너희들이 진정한 이스라엘이냐?” 그들이 예수의 말을 따르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이 예수를 주님이라고만 부를 뿐 그들의 정체성이 예수에 기초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예수처럼 살 준비가 되어 있지 않고 그럴 마음도 없다. 그들은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지만 정작 그의 뜻은 행하지 않는다. 그들의 행하지 않음은 그들의 정체성 즉, 소속이 어디인지 증명한다. 주여 주여 하면서 예수의 말을 따르지 않는 자들은 원래 좋은 나무인데, 믿음의 실천이 부족한 이들이 아니다. 그들은 나쁜 나무이다.

집과 기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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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자신이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않느냐는 예수의 질문에 또 하나의 비유가 이어진다. 누가는 47절의 세 개의 분사와 48절의 세 개의 동사를 대비시킨다. 내게로 ‘와서’ ‘듣고’ ‘행하는’ 모든 사람은 이 비유 속에서 땅을 ‘파고’ ‘깊이 내려가서’ 기초를 ‘놓은’ 사람이다. 우리나라 말은 여기서 ‘오는’ 행위와 ‘듣는’ 행위가 ‘그대로 행하는’ 행위에 비해 가볍게 다뤄지고 있어서 마치 이 구절이 ‘그대로 행함’에 집중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헬라어 원문의 구조로 볼 때 누가는 이 세 가지 행위를 동일하게 나열하고 동시에 나열된 세 가지 행위 앞에 ‘모든 사람(Πᾶς ὁ)’을 놓아 그 행위를 하는 사람을 강조시키고 있다. 그리고 땅을 파고 내려가서 기초를 놓는 사람에 대한 비유에서도 가장 앞에 놓이면서 강조되고 있는 단어는 ‘사람(ἀνθρώπῳ)’이다.

무엇보다 누가의 비유는 마태가 사용하고 있는 반석과 모래의 대비를 사용하지 않는다. 누가는 분명하게 기초와 기초 없음(χωρὶς θεμελίου)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즉, 이것은 더 나은 땅이냐 못한 땅이냐의 정도를 대비시키려는 목적이 아니다. 누가는 오히려 더 극단적으로 비유를 사용함으로써 이 문제를 Yes or No의 문제로 만들어 버린다. 즉, 비유를 통해, 예수 따름의 문제는 ‘근거가 존재하느냐 존재하지 않느냐’, ‘실제냐 아니냐’의 문제가 된다. 앞선 비유에서도 그렇듯 이 비유는 자신을 하나님의 백성이라 여기던 이스라엘 민족의 자의식을 향해 문제를 제기한다. 왜 그들은 예수를 주님이라 부르지만 행하지 않는가? 정말,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긴 한 것인가? Yes? or No?

이 비유에서 그 집이 어떤 반석 위에 서 있는지를 보여주는 근거는 ‘강물이 흔들 수 없음’이다. 집을 짓기 위해서는 땅을 깊이 파기 때문에 그 집이 반석에 세워졌는지, 흙 위에 세워졌는지 겉으로 봐서는 알 수 없다. 그 기초를 드러내는 방법은 그 집이 홍수에 견뎌내는지 아니면 쓰러지는지 보는 것이다. 앞에 비유에서 좋은 열매가 그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었다면 여기서는 홍수에 쓰러지지 않고 버텨내는 것이 그 존재를 증명한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말씀을 예수 잘 믿고 말씀대로 행하면 인생의 어려움을 잘 견딘다는 말로 이해한다. 하지만 이 비유 속에서 강물이 흔들 수 없음은 예수를 따름으로 받게 되는 선물이나 결과가 아니다. 적어도 우리는 이 이야기가 예수님 잘 믿으면 성공한다거나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홍수에 흔들리지 않기 위해 반석에 집을 짓는 것이 아니다. 기초가 있는가 없는가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

원인과 결과

우리 성경은 “잘 지은 집이기 때문이다”라는 표현을 수록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일부 사본에서 이 구절을 생략한 표현이 원문에 가깝다고 판단한다(이 표현을 생략한 경우는 소수의 사본에만 등장한다. 하지만 3세기 사본인 P45가 아마도 이 형태의 본문을 가졌을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에 역사적 증거만으로 판단하는 것은 섣부를 수 있다). 뒤에 이어지는 반석 없이 집을 지은 사람의 비유에서도 그 집이 왜 심하게 무너졌는지 설명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오히려 이 표현이 빠진 문장이 그 뜻을 더 잘 살려준다고 생각한다. 이처럼 “잘 지은 집이기 때문이다”라는 표현이 생략될 경우 강물이 집을 흔들 수 없는 이유는 그 집에 있지 않다. 집은 이 폭로에서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는다. 강물이 집을 흔들 수 없는 것은 집이 잘 지어졌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그 이유는 감춰져 있다. 그것은 흔들리지 않는 집에 의해서 드러나게 될 기초 즉, 그 강물이 집을 흔들 수 없도록 만드는 그 힘이 무엇인지를 드러낸다.

앞서서 예수는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질서를 선포하시면서 복과 화를 선포하고 하나님 백성의 새로운 기준을 제시하셨다. 그리고 이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 백성이라는 지위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이스라엘 민족의 정체성에 근원적 물음을 제기하신다. 이스라엘 민족은 강물이 들이닥칠 때, 자신들이 굳건히 설 것이라고 여겼다. 그들의 혈통적 계보와 현재의 삶의 부요함이 하나님의 보호를 보장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예수는 지금 든든한 기초 위에 서 있는 것 같은 이들을 향해서 화를 선포했다. 그리고 당장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이들을 향해서 복을 선포했다. 중요한 것은 그 집이 얼마나 잘 지어진 집인지가 아니라 그것을 지탱하는 기초가 있는가이다. 집이 스스로 서려 하는 것이 아니라 그 기초에 의존할 때, 강물은 그 집을 흔들 수 없다. 그러나 집이 스스로를 의지하고 기초 없이 서려할 때, 그 집에 무너짐은 사람들이 예상하는 것보다 더 엄청날 것이다.

다시 처음의 이야기로 돌아와서, 이 말씀은 하나의 질문과 두개의 비유로 이루어져 있다. 두개의 비유는 하나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하지만 애초에 이 질문이 묻는 것은 왜 착하게 살지 못하느냐, 왜 더 종교적이지 않느냐가 아니다. 이것은 왜 그들의 삶이 예수의 길로 나아오지 못하는지의 문제이며 결국 왜 새로운 시대로 들어오지 못하는지에 대한 물음이다. 예수는 비유를 통해 새로운 시대에 속한 새로운 이스라엘을 재정의 하고 계신다. 그리고 이어지는 7장에서 두가지 사건을 통해 이 비유를 현실로 가져온다. 이스라엘의 자의식을 뒤집는 두 명의 인물이 등장하고 이들은 예수가 선포한 복과 화에 기초하여 누가 진정한 이스라엘인지 보여주는 모델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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