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 6:39-42] 똥과 겨, 들보와 티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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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그들에게 또 비유 하나를 말씀하셨다. “눈먼 사람이 눈먼 사람을 인도할 수 있느냐?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느냐?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다. 그러나 누구든지 다 배우고 나면, 자기의 스승과 같이 될 것이다. 어찌하여 너는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너는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면서, 어떻게 남에게 ‘친구야, 내가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내 줄 테니 가만히 있어라’ 하고 말할 수 있겠느냐?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리해야 그 때에 네가 똑똑히 보게 되어서,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 줄 수 있을 것이다.

얼마 전에 전병욱 목사의 성추행 재판이 평양노회에서 열렸다. 처음 이 사건을 접했을 때 이 사건이 이렇게까지 오래 시간을 끌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사건을 바로 잡기 위해서 노력했지만, 지금까지 그림은 그렇게 희망적이지 못하다. 언제나 그렇듯 이런 일이 있을 때면 문제제기 하는 이들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그들이 누가복음 6장 말씀에 의지해 하는 말들은 대충 이런 말들이다.

“우리 모두 눈먼 자들인데 도대체 누구를 인도하려고 하는가? 목사가 설령 죄를 지었다고 해도 우리 모두 죄인이지 않는가? 예수님이 우리의 죽을 죄도 용서해주셨는데, 넌 형제의 작은 죄도 용서하지 못하고 그렇게 정죄해야 하는가? 다른 사람 눈에 든 티가 있다고 지적하지 말고 먼저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먼저 빼라. 세상에 남을 비판할만큼 떳떳한 이가 어디 있는가? 죄없는 자가 돌로 쳐라!”

본의아니게 이 말씀은 교회 내에서 일어나는 엄연한 불의를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입막음하는 역할을 해왔다. 교회가 스스로 거룩해지는 길을 택하기보다는 하나님이 용서하실 기회를 빼앗아 스스로 면죄부를 남발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정말 불의를 정당화 하는가? 우리는 정말 누구도 비판해선 안되는가? 정의는 하나님께만 속하고 우리에겐 허락되지 않은 것인가?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을 향해 하신 독설이나 선지자들의 날카로운 비판은 우리가 닮아야 할 성품은 아닌 것일까?

이 말씀을 살펴볼 때 누가가 가르침이 아니라 이야기 형식의 비유를 통해 끌어 가고 있다는 점을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누가는 비유에서 세개의 이미지를 사용하고 있다. 먼저 이 비유적 이미지들을 간단히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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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번째로 등장하는 ‘눈먼 자를 인도하는 눈먼 자’의 이미지는 마태복음에서 15장 14절에 바리새인들을 가리키는 문맥에서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누가는 이 구절을 바리새인만을 비판하기 위해 사용하지 않고 더 폭넓은 대상을 지칭하는 것처럼 보인다.

두번째 비유는 누가에만 등장하는 비유로, 역시 두 사람이 나온다. 한명은 스승이고 다른 한명은 제자이다. 앞의 비유와 달리 여기선 뭔가 클래스에 차이가 나는 듯 보인다. 스승은 제자를 이끌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 그럴지도 모른다. 어떤 제자도 스승 위에 있을 수 없다.

세번째 이미지인 눈에 대들보가 있는 사람은 마태복음 7장에서는 남을 심판하지 말라는 명령과 이어지는 내용이다. 마태복음에서 이 구절은 산상수훈 가운데 있는 윤리적 명령과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누가복음에서는 이 비유와 심판하지 말라는 명령 사이에는 앞에 두가지의 비유와 추가적인 명령들까지 끼어들면서 연결성이 약화되어 있다.

세가지 비유의 공통점은… 두 명의 등장인물이 등장한다는 것이고, 이 두 사람은 인도하거나 가르치려는 행위에 의해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이 이야기들을 통해서 누가가 하려는 말은 개인의 행위를 금지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두번째 비유의 경우 직접적인 금지나 비난이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마태복음에서 서로 다른 곳에 위치하는 두가지 비유가 하나의 맥락 속으로 들어오고 또 다른 비유 하나가 엮이면서 누가복음에서 이 말씀의 초점은 행동보다는 그 관계에 집중된다. 다시말해 이 비유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것은 비유의 등장인물이 어떤 행동을 하느냐보다 누가가 왜 두 사람이 등장하는 세가지 비유를 동시에 나열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Big_&_Small흔히 교회에서 목사들의 비리나 권력자들의 비리를 감싸면서 이 구절을 인용하는 것은 이 비유들에 등장하는 ‘권력’의 문제를 무시하고 모든 등장 인물을 동등한 입장에 위치시키면서 생기는 오해이다. 물론 마태복음의 구절은 충분히 그런 해석의 여지를 주지만 누가복음이 이 구절을 다루는 방식은 분명히 다르다. 이 비유는 ‘인도하는 자’와 ‘스승’ 그리고 ‘눈에 대들보를 들어가 있는 자’들에 대한 비유이다. 여기서 들보와 티끌이 가진 크기의 차이를 무시하면 이 비유가 보여주고 있는 관계의 문제를 망각하게 된다.

우리나라 말에 ‘똥묻은 개가 겨묻은 개 나무란다’는 속담이 있다. 만약에 동일한 임금을 받는 A와 B가 있다. A는 매일 저녁 술에 쩔어 살면서 임금의 대부분을 유흥비로 탕진한다. 반면 B는 쓸데없는 소비를 줄이며 제테크에 신경써서 꽤 많은 자산을 확보했다. 그런데 어느날 두 사람이 만나서 B가 A에게 “야, 돈 좀 아껴써”라고 했다. 그러자 A가 “똥묻은 개가 겨묻은 개 나무란다더니, 너나 잘해 자식아!”라고 했다면, 이 속담의 사용은 올바른 것일까? 반대상황이라면 이 속담의 사용은 적당할 수 있다. B가 어쩌다 비싼 물건 하나를 샀을 때 A가 “돈 좀 아껴쓰라”고 했다면 B는 A에게 “똥묻은 개가 겨묻은 개 나무란다”는 비유를 쓸 수 있다. 이렇게 한쪽의 관계만 성립하는 이유는 이 비유가 전제하고 있는 똥과 겨의 차이 때문이다. 비유에서 이런 차이는 두 사람 사이의 [기울어진 관계]라는 조건을 만들어낸다. 우리가 읽은 말씀도 마찬가지다.

첫번째 비유는 ‘인도하려는’ 자들에 대한 비판이다. 당시 사회에서 누군가를 인도하는 것은 곧 그가 그 행위를 통해 만들어내는 권력의 [기울어진 관계]를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룬트만은 이 구절을 교회 내의 선생 역할을 했던 사도들에 대한 비판으로 읽는다. 그 비판의 대상을 사도로 확정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 안에 존재하는 권력의 관계를 읽어낸 좋은 읽기라고 할 수 있다. 누가는 이 행위가 결국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형성하고 있는 관계는 본질상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인도하는 역할에 합당한 자격을 갖추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들 역시 눈먼 자이기 때문이다. ‘인도하려는’ 자들이 만들어 낸 [기울어진 관계]는 그들의 본질이 폭로되면서 동등한 관계로 재편성된다. 애초에 동일한 관계이니 비판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기울어진 관계를 동등한 관계로 만들어내는 것이다.

첫번째 비유의 이미지는 두번째 비유로 연결되면서 인도하려는 자들과 스승의 이미지를 연결시킨다. ‘[기울어진 관계]의 조정’이라는 테마는 여기서 더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누가는 ‘제자가 그 배움을 마치면 스승처럼 된다(ἔσται ὡς ὁ διδάσκαλος αὐτοῦ)’고 말한다. 스승의 스승됨은 그들의 존재에서 나오는 권력이 아니다. 왜냐하면 배움을 마친 ‘모든(πᾶς)’ 자는 그렇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기울어진 관계]를 가장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는 구절이 마지막 비유이다. 이 비유는 눈 속에 대들보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겨우 티끌 정도 있는 눈을 더럽다고 말하는 세상에 대한 것이다. 여기서 앞에 속담이 보여줬던 ‘똥’과 ‘겨’의 차이가 동일하게 나타난다. 여기서 사용되고 있는 대들보와 티클의 차이는 어떤 설명으로도 그 차이를 줄일 수 없다. 대들보가 수사적 효과를 위해 사용된 과장법일 순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차이가 없어지지 않는다. 앞에서 속담이 그랬듯 이 말 역시 반대 방향의 관계에서는 그 의미를 잃어버린다. 누가가 대들보와 티끌을 대비시키는 이유는 남을 비판하려는 사람의 마음 속 어딘가에 있을 죄의식을 찾아 극대화시키려는 목적이 아니다. 쉽게 말해, 누가는 10억 횡령한 놈을 비판하는 10만원 훔친 놈의 죄책감을 증폭시키려고 이 비유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10억 횡령한 놈은 맘 편하게 살면서 배고파서 10만원 훔친 자를 반사회적인 불순분자가 될 수 밖에 없는 이 세상을 향해 회복해야할 가치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너무 착한 탓인지, 하나같이 자신들을 눈에 들보가 들어간 사람처럼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다보니 힘을 가지고 남의 것을 빼앗는 큰 도둑들도 내 죄에 비하면 티끌일 뿐이라고 생각하는가보다. 뭐 개인적으로 죄의식에 파묻혀 살겠다는데 막고 싶진 않지만 하나님의 나라를 악을 눈 감아주고 거짓을 정당화하는 데 가져다 쓰진 말았으면 좋겠다.

유전무죄

권력이란 본래적 가치에 대한 정당한 평가를 왜곡시킨다. 도둑은 모두 똑같은 도둑이 아니다. 큰 도둑은 큰 도둑이고 작은 도둑은 작은 도둑이다. 너무나도 당연한 말이지만 왜곡된 세상의 큰 도둑은 힘을 가지고 존경받는 반면 작은 도둑은 멸시당하고 혐오의 대상이 된다. 하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왜곡된 세상을 다시금 역전해 회복시킨다.

제 눈에 들보가 든 자는 다른 이의 눈에 티끌을 빼내겠다 해선 안된다. 그들에겐 그럴 권한도 없고 능력도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동일한 눈먼 자이며, 그들의 힘은 그들의 존재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큰 죄를 용서하는 큰 은혜는 우선 그 죄가 큰 죄로 드러나야 가능한 것이다. 마치 큰 죄가 작은 죄와 별 다를 것 없다고 여기거나 혹은 은폐한다면, 은혜는 설 자리를 잃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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