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의 언어는 존재하는가?

얼마 전 제가 속해있는 미투밴드에서 방언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방언을 할 줄 아느냐?는 질문이었지요.  그래서 방언에 대해서 한번 정리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안그래도 얼마전에 ‘하늘의 언어’라는 책이 나왔길래… 이건 뭐야? 했드랬죠.

1. 방언은 기독교만의 현상인가?

우리가 흔히 방언이라고 할 때 그것은 교회에서 기도할 때 사용하는 ‘어버버버버버’ 뭐 이런 알아 들을 수 없는 말을 의미합니다. 어떤 분들은 하나님만이 아시는 하늘의 언어라고 하지요. 기도원에 가면 이 방언을 받게 하겠다고 별의 별 방법이 다 동원됩니다. 


기도하다보면 하게 된다고 하시는 분들도 있고 무조건 따라하라고 하시는 분들도 계시고 구체적으로 하는 방법을 전수해주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최근 들었던 말 중엔 ‘할렐루야’에서 ‘할’을 빼고 빨리 발음하다보면 혀가 풀리면서 방언을 하게 된다는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교회에서 이런 방언을 강조하는 이유는 그것이 성령의 은사이고 신앙 발전의 단계 혹은 증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경우들이 많습니다. 성령세례를 이런 방언과 연결시켜서 판단하는 경우들도 많습니다.

물론 “방언이 가짜다!!!” 라고 말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일부 사람들은 여러가지 이유를 들어가면서 방언은 심리적 착각이라고 말하시는 경우들이 있지만 제가 생각하기에 방언은 엄연히 부인할 수 없는 현상입니다. 다만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과연 그것이 기독교가 가진 독자적인 현상인가?” 혹은 “과연 그것이 성령이 주시는 은사로써의 방언인가?”하는 것입니다.

개그콘서트가 처음 시작될 때쯤 ‘사바나의 아침’이라는 코너가 있었습니다. 여러 개그맨들이 나와서 아프리카 원주민으로 보이는 분장을 하고 부족생활의 모습을 우습게 그려내는 프로그램이었지요. 그 프로그램이 거의 끝날 때 쯤 추장이 주문을 외우겠다고 하면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쭈~ㄱ 내뱉습니다. “밤바야~!”로 시작하는 이 주문을 처음 들었을 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거 방언인데…?!” 물론 이것은 농담삼아 하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통해서 하고 싶은 얘기는 방언이란 결코 기독교만의 독특한 현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방언, 예언, 입신, 투시 등등은 분명히 신기한 일이다.  아직 인간이 충분히 해명하지 못한 영역의 일들이다.  그러나 이런 종교적 신비들은 종교인들에게서 보편적으로 일어나는 일들이지, 결코 기독교의 독특한 현상은 아니다.”
[ 홍정수 <베짜는 하느님> p247 ]


다른 종교에도 방언과 비슷한 형태의 현상이 있습니다. 흔히 강신 현상의 하나로 취급되는 이런 방언은 종교라는 형태를 취하고 있는 대부분의 집단 가운데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샤머니즘이나 정령숭배처럼 체험적인 신앙형태나 기복적인 특성이 강한 종교로 갈수록 이런 현상은 더욱 빈번하게 나타납니다. 그래서 일부 보수성향의 기독교에서는 이런 방언을 기독교 샤머니즘이라고 취급하며 금지시키는 경향도 있습니다.
이런 방언은 분명 존재하는 종교적인 현상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존재하냐?’와 ‘그것이 성령의 은사냐?’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2. 종교현상과 성령의 은사의 구분.

제가 말하려는 종교적 현상이라는 개념은 인간이 종교적인 황홀경을 체험하는데 따라오는 초자연적인 현상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성령의 은사일 수도 있고 귀신의 장난일 수도 있고 때로는 심리적 착각이거나 육체적 퇴화현상일 수도 있습니다. 그 의미나 목적을 말하기 이전에 그것은 종교라는 환경 가운데서 일어나는 일반적인 현상입니다.

물론 이것이 성령이 주는 진짜 방언과 귀신이 주는 가짜 방언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그것이 성령의 역사냐?”하는 문제는 그 현상이 일어났는지 일어나지 않았는지 혹은 어떤 형태로 일어났느냐와는 다른 문제입니다. 더군다나 현재 우리나라에서 인식되고 있는 형태의 방언이 성령의 역사와 서로 연결되어서 설명되기 시작한 역사는 우리의 생각과는 달리 그다지 길지 못합니다. 고작해야 100여년 정도라고 해야할까요? 


1907년 평양대부흥 때 현장에 있던 선교사는 우리나라 성도들이 이렇게 기도하는 것을 보고 성령의 역사라고 확신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현상을 지금껏 본적이 없기 때문에 그렇지요. 비슷한 시기에 세계적으로 일어난 오순절 운동이라는 것을 통해서 현재 우리가 생각하는 방언 현상들이 성령의 역사로 이해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성령의 역사라고 판단한 것은 단순히 그것을 처음 본 이들이 가졌던 개인적인 견해였습니다. 다시 말해 그것에 대한 어떤 검증도, 종교학적 이해도 없이 그저 받아들여진 것이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형태의 방언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런 방언현상은 어떤 교리이던 어떤 종교이던 상관없이 종교라는 환경 가운데 보편적 현상이지 특정종교가 독점하는 증거는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현상의 발생만으로 성령의 역사인지 아닌지를 설명하거나 판단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정말 성령의 은사인지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역시나 성경의 도움을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3. 사도행전 기사의 종말론적 의미

우리가 알고 있는 방언에 대한 가장 분명한 기록은 사도행전의 기록입니다.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대부분의 성경학자들이 인정하는 것은 원래 방언이라는 말은 ‘지방언어’를 뜻하는 것이었다는 말입니다. 사도행전의 기록 역시 이런 지방언어로써의 기능을 뒷받침해주고 있습니다.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그 때에 경건한 유대인들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더니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다 놀라 신기하게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들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 됨이냐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갑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행 2:1~11)

이 기록에서 알 수 있는 것은 그 언어가 다른 누구도 알아들을 수 없는 신비로운 언어는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통역없이도 누구든 자신의 언어로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 바로 방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방언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습니다. 바로 그들이 자기의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누가라는 사람이 기록했다고 전해지는 사도행전에서 이 사건이 가르키고 있는 것은 너무나도 분명합니다. 바로 창세기의 바벨탑 사건의 극복입니다. 유대인들에 의해서 기록되고 보전되어 온 창세기에는 인류의 탄생과 더불어 그들이 어떻게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어 갔는가에 대한 기록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바벨탑 사건은 인간의 언어가 나뉘어져 서로 소통하게 되지 못하게 되는 사건으로 유명합니다. 이 사건은 인간의 죄악으로 인해 하나님이 인간을 홍수로 심판하시는 노아 사건 바로 뒤에 등장하는 것으로 하나님이 홍수 심판의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언어의 혼잡을 통해 인류를 세계 여러곳으로 흩으신 사건입니다.

이처럼 홍수 뒤에 위치하는 이 바벨탑 사건은 아브라함의 부르심으로 연결되면서 하나님께서 한 민족을 선택해 온 세상을 구원하려 하는 이야기로 연결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누가에 따르면 그 한민족의 선택과 함께 시작된 구원의 약속은 예수를 통해 완성되고 이어서 사도행전은 다시 언어들이 서로 통하게 되는 사건을 보여줌으로써 구원의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벨탑의 사건이 실제 사건이냐 아니냐를 떠나서 그 글을 기록한 저자의 의도가 이런 문맥 가운데 드러나고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이것은 그 사건이 실제 어떤 형태로 이뤄졌고 그들이 어떤 말을 했는지를 떠나서 방언이라는 것이 기본적으로 하나님과 나와의 신비적인 어떤 언어로써 작용한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알아듣도록 하는 기능을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4. 고린도전서가 말하는 방언과 은사

방언에 대해서 주장하시는 많은 분들이 고린도전서 14장에 나오는 바울의 이야기를 들어서 방언을 해야함을 주장하시는 경우들이 종종 있습니다. 하지만 고린도전서 14장은 철저하게 방언현상에 대한 비판이 담겨있는 구절임을 먼저 알아야 할 것입니다. 당시 고린도교회 안에는 방언을 독려하는 은사주의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은사주의자들은 교회에 큰 부담과 어려움이 되었지요. 바울은 그런 은사주의자들을 향해서 방언을 하기보다는 예언하기를 힘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비판하는 방언은 본래 통용되는 언어로써의 기능을 잃어버리고 신비한 언어로써 기능하고 있던 방언을 말합니다. 반면 예언은 하나님의 말을 대언하는 것으로써 가르치고 선포하는 말을 의미합니다.

방언에 대한 바울의 가장 큰 비판은 ‘알아들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소리의 종류가 많으나 뜻이 없는 소리는 없다. 하지만 너희들의 말은 뜻없는 소리와 별 다른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서로를 외국인으로 만들어 교회를 갈라지게 하는 원인이 된다고 바울은 비판합니다. 방언이란 원래 나와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게 하는 은사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에 문맹률이 90%가 넘었던 사회에서 교회안에서 방언을 하게 되는 경우엔 꼭 성도들이 알아들을 수 있게 그것을 통역해주는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지요. 다른 말로 하면 방언은 알아들을 수 없는 상황에서는 그것은 은사가 아닌 독이 된다는 말입니다.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한 표적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이것이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말이었기 때문입니다. 보통 우리는 이 말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하나의 영적인 증거라고 이해합니다. 하지만 바로 몇절 뒤에 바울은 모두가 방언을 하면 믿지 않는 사람들이 듣고 미쳤다고 생각하지 않겠냐고 묻습니다. 이것이 어찌보면 정상적인 반응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방언하는 것을 보면 뭐라고 생각할까요? “와~!! 신기하다” 생각할까요? 아니면 “쟤네들 이상해”라고 생각할까요? 하지만 사도행전의 처음 이야기에서 방언의 현장을 본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방언이라는 것이 원래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자기 지방 말이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떤 고귀한 하늘의 언어가 아니라 그들이 가장 잘 알아들을 수 있는 그들의 말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자기들의 말로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듣는다고 한 것입니다. 방언이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한 은사인 이유는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고린도교회의 방언에는 이처럼 듣는 자를 향한 목적이 상실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고린도전서14장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방언에 관한 언급이 어떤 문맥 뒤에 나오는지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모두가 사도이겠습니까? 모두가 예언자이겠습니까? 모두가 교사이겠습니까? 모두가 기적을 행하는 사람이겠습니까? 모두가 병 고치는 은사를 받은 사람이겠습니까? 모두가 방언으로 말하는 사람이겠습니까? 모두가 통역하는 사람이겠습니까? 그러나 여러분은 더 큰 은사를 열심히 구하십시오. 이제 내가 가장 좋은 길을 여러분에게 보여드리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2:29~31)

이 말씀을 시작으로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을 통해 다른 무엇보다 사모해야할 더 큰 은사인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바울은 방언 자체에 대한 옳고 그름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오히려 바울은 그 방언이 본래 목적인 사랑을 되찾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이라는 근본적인 목적을 잃어버린 방언은 아무리 근사한 말이라도 혹은 아무리 여러 지역의 방언을 하더라도 울리는 꽹과리와 다를바 없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5. 방언과 은사 그리고 하나님의 마음
여기서 마지막으로 우리가 생각해보고 넘어가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왜 그토록 방언에 매달리는 것일까요? 어떤 분들은 방언은 하나님과 나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비밀스러운 이야기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도대체 하나님과 나만 알기 원하는 비밀은 무엇에 대한 비밀일까요? 내 개인사?, 사람들에게 말하지 못하는 잘못들?, 교회에서 대놓고 말하기 힘든 내 안에 있는 욕망들을 나조차 알아듣지 못하는 말들로 쏟아놓는 것일까요?

성경에서 비밀(μυστηριον)이라는 말은 신비라는 말로도 번역됩니다. 우리는 이 비밀을 흔히 감추어져서 알려지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성경이 이야기하는 비밀은 오히려 지금껏 감추어졌지만 이제 드러나야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감추어져있다는 것은 다른 이들에게 알려지지 않게 관리되는 보안사항이 아니라 세상의 지혜로는 이해할 수 없고 이해하려 하지도 않는 신비에 대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인생이 새롭게 되는 거듭남과 부활의 신비, 원수를 사랑하고 죽어 마땅한 자를 용서하는 신비, 부자가 아니라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는 예수의 가르침에 담긴 신비와 같은 것입니다. 세상의 가치와는 다른 하늘의 가치가 바로 신비이며 이런 것들이 드러나기 위해 필요한 도구가 바로 방언입니다.

이처럼 성경이 말하는 방언은 알아들을 수 없는 비밀한 말이 아니라 비밀한 것을 드러내기 위해 사용되어지는 알아들을 수 있고 이해될 수 있는 말을 의미합니다. 일반적인 종교현상으로 나타나는 것과는 달리, 나와 다른 환경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 말할 수 있는 능력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방언인 것입니다. 


그것은 표면적으로는 다른 지역의 언어로 나타나지만  그 내면적으로는 다른 이를 향해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하나님의 마음을 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너무나도 당연하게 듣는 자를 향한 사랑이 전제됩니다. 그들의 언어를 이해하고 문화를 이해하고 상황을 이해하고 역사를 이해하는 작업이 이 방언을 의미있게 만드는 것입니다. 

마치 우리의 모습까지 낮아지신 예수 그리스도처럼 그들이 상황에 까지 내려가고 함께하는 것을 말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함께 하셨던 하나님처럼 그들의 처참한 삶의 한 가운데에도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신비를 그들이 들을 수 있는 언어(눈물, 공감, 함께하는 투쟁)를 통해 이야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떤 방송에서 한 교수님이 현대의 방언 열풍에 대하여 설명하시면서 하신 얘기가 기억 납니다. 왜 사람들은 다른 은사보다 방언을 받으려할까요? 그것은 가장 간단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병고치기 위해 매달릴 필요도, 다른 이를 섬기기 위해 몸을 낮출 필요도, 가르치기 위해 준비하고 공부해야할 필요도 없기 때문에 가장 단순한 은사인 방언을 사모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습도 이와 같지 않을까요? 나는, 지금, 왜, 방언을 필요로 할까요? 그리고 나에게 필요한 방언은 어떤 방언일까요? 방언을 구하는 마음이 혹시 사랑의 수고를 기피하려는 도피행위는 아닐까요? 성경이 말하는 방언은 사랑의 열심을 배제한 개인적이고 신비스러운 현상을 말하지 않습니다. 


성령을 통해 새롭게된 언어 행위… 사람의 지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마음을 드러내는 사랑의 언어, 아이들을 위해서 쉬운 말로 말하는 법을 배우고, 듣지 못하는 이를 위해서 수화를 배우는 사랑의 수고,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가 없어도 눈물과 웃음으로, 다른 이를 위한 양보와 희생으로, 또 누군가의 가녀린 신음소리에 귀 기울임으로, 마음에서 마음으로 교통하고 나아가 온 세계에 전해지는 하늘의 언어, 이것이 바로 바울이 우리에게 사모하라고 말하는 방언이 아닐까요?


마지막으로 제가 좋아하는 황인호님의 카툰 하나를 소개하면서 마쳐봅니다.^^


6 Comments

  1. 핑백: ssh4jx's me2DAY
  2. 핑백: 삶과꿈
  3.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특히 성경이 말하는 비밀은 곧 드러남이라는 것, 그리고 방언은 그 도구라는 말이 방언에 대한 생각을 넓혀줬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사랑, 역시 기독교는 무엇이든 사랑으로 귀결되는군요. 🙂

  4. 핑백: seoulrain's me2DAY
  5. 잘 지내셨어요?^^ 접니다 파란에서 3개월동안 옆자리 차지했던^^;; 좋은 글 잘 읽고가요~ 방언이 은사 중 제일 쉽다는 그 말에 정말 동의가 되네요. 마지막 카툰도 정말 마음에 와닿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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