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행위 없는 구원?

영경교수님의 이 책은 지금껏 ‘오직 믿음으로’라는 구호 아래서 이해되어오던 바울 서신을 통전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목적으로 씌어진 책입니다. 사실 제목만으로도 어떤 내용을 다루려는지 너무나도 분명하게 보이기 때문에 크게 할만한 이야기가 있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바울 서신을 읽는데 있어서 루터의 통찰을 넘어서려는 노력은 최근 들어 가장 주목받고 있는 신학적 주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루터에 의해서 주장된 ‘오직 믿음으로’라는 바울 서신의 테마가 사실상 현대 기독교의 도덕 불감증을 가져온 것이 아니냐?라는 자기 반성적 성찰로 인한 것입니다. 이 책 역시 이런 세계적 흐름 가운데 동일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권연경 교수가 이 책에서 해석의 열쇠로 주장하고 있는 것은 바울의 자기 의식입니다. 즉, 저자는 바울이 자신의 사역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는지를 살펴 볼 수 있는 열쇠로 로마서 15장 15~16절을 제시하면서 바울이 자신의 사역을 이방인을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장으로써 이해했으며 그의 사명은 그 제물을 흠없는 드려질 만한 것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이해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려고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더욱 담대히 대략 너희에게 썼노니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분을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실 만하게 하려 하심이라 (로마서 15장 15~16절)

바울 서신에 유대 제사용어나 표현들이 자주 등장한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이런 저자의 분석은 나름 설득력있는 시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를 토대로 저자는 바울 서신에 나타나는 도덕적인 언급들에 촛점을 맞춥니다. 또한 믿음이나 은혜, 구원, 칭의 같은 개념들이 바울 서신의 문맥 가운데서 도덕적인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개념들임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책은 앞부분에는 바울 서신의 대략적 주석을 제시하고 후반부에는 특별히 믿음과 은혜가 가진 도덕적 함의를 설명함으로써 제자도란 믿는 것을 넘어서서 도덕적으로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을 포함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의미있는 논쟁일까?
이 책을 읽고서 드는 생각은 과연 이 책이 제시하고 있는 방향으로써의 전개가 의미있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론이 아닌 실제 신앙생활에서 믿음만 있으면 아무렇게나 살아도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요? 또 그렇게 가르치는 교회가 몇군데나 있을가요? 사실 그들이 그렇게 살지 못하는 이유는 교회에서 그렇게 안해도 된다고 가르치거나 덜 중요하다고 가르치거나 그렇게 믿고 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그들이 종교라는 삶의 구역(시간과 공간)이라는 것을 교회 라는 체제안에서 행해지는 것으로 구분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차라리 이런 메시지는 구원에는 도덕적인 요소도 필요하다라고 말하기 보다는 믿음만으로 구원얻지 못한다거나 행해야 구원얻는다고 말해야 뭔가 먹혀들어가지 않을까 하는 느낌입니다. 뭐 저자는 도덕적 요소가 구원의 부수적인 요소에서 주된 요소로 옮겨오는 것이 의미가 있다고 열심히 주장은 하고 있습니다만… 조직신학적 논쟁을 굳이 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면 그다지 의미있어보이지 않는 말들입니다. 무엇보다 미묘한 차이를 차별성 없는 언어와 형식으로 표현해 결국 별다른 차이를 만들어 내지 못하는 것 같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요한웨슬리
무엇보다 이 책은 웨슬리의 조직신학적 개념들을 거의 그대로 성서해석으로 가지고 들어오고 있습니다. 칭의에 대한 미래적 인식을 통해 칭의를 현재적 돌아섬과 구분하는 것이라던가 구원을 도덕적 인식을 포함해서 이해하는 것 등은 웨슬리의 중생개념이나 성화개념을 많은 부분 반영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칼빈주의자가 아닌 웨슬리안이라면 이런 얘기는 교회에서 혹은 신학교에서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을 식상한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신학적 차이가 감리교의 사회참여 의식과 같은 차이점을 만들어내고 있다고도 볼 수 있지만 정작 감리교 개교회나 같은 웨슬리안 계열인 성결교단이나 순복음 등의 신학적 성향을 봤을 때는 의미있는 차이를 만들 수 있는지 의문입니다.

딴지걸기
책의 전체적인 흐름이 주석같은 포멧을 취하고 있기 때문에 현대 독자가 읽기에는 조금 벅차지 않을까 생각을 해봅니다. 성경책을 옆에 두고 비교하면서 읽어나가지 않으면 논리적 흐름을 따라가기 굉장히 버거운 책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 성경공부 같은 소그룹 모임에서 하나하나 짚어주면서 말로 풀지 않으면 굉장히 지루한 포멧이라는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책을 사서 읽으시려는 분들이 계시다면 살짝 말려보고 싶은 마음이네요.
내용적인 측면을 잠깐 짚고 넘어가자면 저자는 애매할 수 있는 용어, 혹은 복합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해석되어 오던 용어들을 굉장히 단순화 시켜서 해석에 적용합니다. 예를 들어 칭의의 개념과 구원의 개념을 포괄적으로 이해하면서 이 모든 것이 유대교 종말론적인 배경에서 미래적인 의미를 갖는다고 이해합니다. 하지만 로마서에 나타나고 있는 칭의의 현재적 개념은 칭의의 선취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신뢰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다시한번 말하지만 조직신학적 개념 싸움에 취미가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이런 것이 미래적 구원이 반드시 일어날 것이라고 확신하는 것과 그 구원을 현재에서 누리는 선취가 과연 얼마나 다르게 작용할지 의문입니다. 이런 난점은 저자가 미래적 칭의라는 자신의 전제 위에 로마서의 내용을 끼워맞추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율법에 있어서도 저자는 바울의 개념들이 도덕적인 부분을 포함하고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의 율법 비판은 도덕적 행위가 아닌 이스라엘의 선민의식의 도구가 되는 일부 조항들에 대한 비판이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바울이 율법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 어떤 특정 율법 조항과 전체 율법을 구분해서 사용하고 있다고 말하기는 힘듭니다. 더구나 야고보서가 바울 서신을 알고 있었다면 그래서 아브라함 이야기와 같이 바울이 인용한 것을 뒤집어서 비판하고 있는 것이라면 야고보서는 바울 서신이 도덕적으로 취약하다고 이해했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 아닐까요? 뭐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야고보서와 바울서신의 관계 문제가 엮여 있으니 더 쓰지는 않겠습니다.

또한 논쟁 가운데 있는 바울서신들을(ex.에베소서) 별다른 논의 없이 인용하고 전제하고 있습니다. 믿는 것이나 의견엔 개인적 차이가 있겠으나 학문책이려면 이런 문제들 먼저 분명히 한 후에 글을 썼어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하는 책입니다. 우리나라 신학이 기초적인 부분에 있어서 얼마나 허약한지를 보여주는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현대 성서학에서 이슈가 되고 있는 부분들을 다루고 있지만 정작 현대 사회에 성서학이 던져줄 수 있는 것에 대한 고민은 부족한 것 같습니다. 일반인이 읽기엔 너무 복잡하고 지루하며 신학생이 읽기엔 뒤끝이 허전합니다. 교회에서 평신도 대상의 성경공부를 하실 때 유용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결국 이 책을 전체적으로 평해보자면 샌더스에게 큰 빚을지고 시작하지만 큰 유행 가운데 있을 뿐 결국 별다른 것을 더하지 못하고 끝난 책이라고 평가하고 싶습니다.

1 Comment

  1. 핑백: ssh4jx's me2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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