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성경 왜곡의 역사 _ 바트 D. 어만

사본학에 관심을 갖다보면 자주 접하게 되는 이름들이 있습니다. 알란트라던가 메쯔거라던가 티셴도르프 같은 사람들이 그들이지요. 그리고 최근 들어서 자주 이름이 거론되는 사람이 바로 바트 어만입니다. 


제가 어만의 이름을 처음 들은 것은 유다복음서가 발견되어 한참 시끌벅적하던 때였습니다. 유다복음이 발표되었던 네셔널지오그라피에 자문위원쯤 되는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나중에서야 어만이 부르스 메쯔거의 제자이고 현재 사본학계에서 최고의 거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요. 그리고 그가 쓴 책을 찾던 중 우연히 발견한 책이 바로 [성경 왜곡의 역사]입니다. 

이 책에 대한 서평을 쓰기 전에 꼭 말하고 싶은 것은 정말 좋은 책이니 꼭 사서 읽어보시라는 것입니다. 성경을 전혀 모르는 일반인이건 신학을 공부하는 신학생이건 성경을 읽는 차원에서 그리고 그 말씀을 대하는 차원에서 전혀 다른 눈을 갖게 해줄 책이라고 확신합니다.

본격적으로 책에 대한 서평을 해보자면 내용면에서만 보자면 어만이 하고 있는 이야기들은 별로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역사비평이라는 학문이 시작된 이래 이런 내용들은 본문비평이라는 이름으로 성서학의 한 분야로써 다뤄지던 내용들이었습니다. 하지만 본문비평이라는 학문은 신학자들, 그 중에서도 일부의 신학자들에게만 관심을 받아오던 인기 없는 학문이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18세기 이전까지는 자료도 별로 없었고 본문비평을 통해서 내놓을 수 있는 결과물이라는 것도 그렇게 대단한 것이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영어권 국가들에서 킹제임스 성경의 위용이라는 것이 감히 건드리기 힘든 어떤 것이었던 측면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18~19세기 이후 나그함마디 문서와 같은 역사적으로 가치 있는 수많은 본문들이 쏟아져나오면서 본문비평의 중요성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것이 되었습니다. 새로운 발견의 결과들이 지속적으로 학문적 성과로 이어졌고 이를 반영하여 헬라어 표준본문에서 수많은 부분들이 바뀌고 또 그것들이 전세계의 성서 번역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하지만 이런 발견들에도 불구하고 본문비평은 여전히 소수자를 위한 학문이었습니다. 이런 본문비평을 초대교회의 상황과 연결시키며 수면 위로 끌어올린 사람이 바로 바트어만입니다.

바트어만의 이 책은 복잡한 이론들만 가득하던 다른 사본학 서적들과 달리 이런 본문비평적 차이들이 보여주는 초대교회의 모습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한글 번역본의 부제처럼 ‘누가, 왜 성경을 왜곡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성경 사본의 차이가 보여주는 초대교회의 상황을 재구성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앞 부분에서 본문비평의 역사라던가 방법론들을 지루하지 않게 잘 설명해내고 있는 것도 그의 놀라운 능력이라고 칭찬할만하지만 역시나 바트어만의 업적은 이런 본문비평적 업적들을 통한 새로운 해석의 통로를 열었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그가 설명하는 사본학은 쉽고 명확합니다. 그리고 이해하기도 편합니다. 왜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었는지 너무 잘 설명해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codex sinaiticus
이처럼 이 책은 바트어만이라는 학자의 대중적인 영향력을 느끼게 해주는 서적입니다. 물론 그는 이 책을 단순히 대중적 관심을 얻을 수단으로 저술하지는 않았습니다. 이 책에 나오는 내용은 다른 어떤 본문비평 입문서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만큼 충실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물론 그의 스승인 메쯔거의 영향으로 인해서 사본 자체와 외적 증거에 많은 부분을 할애하는 알란트와는 달리 방법론이라던가 내적 증거등에 촛점을 맞추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만 어쨋든 그의 책은 사본학이라는 것을 처음 접하는 통로로써 전혀 부족함이 없습니다.

다만 이 책에 있어서 논란이 되고 있는 부분이라면 바로 그가 이처럼 본문비평을 대중화하는데 사용한 초대교회 상황에 대한 재구성이라는 도구에 있습니다. 특히나 그는 본문의 변개에 영향을 미친 교리적 정황이나 사회적 정황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본학 책들이 그 이론이나 가능성을 대충 설명하고 넘어가는 것에 비해서 어만은 이 점을 굉장히 사실적으로 그려내고 있습니다. 그는 교리적 논쟁 가운데 있었던 2~3세기의 문서들이 4세기 이후에 들어오면서 그 싸움에서 승리한 흔히 말하는 ‘정통’에 의해서 필사과정에서 조직적으로 변개되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런 그의 주장은 ‘정경화’라는 과정을 통해서 역으로 도출된 그림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어쨋든 그는 이런 가능성을 제기하며 사본들의 변개를 분석해내는 과정을 통해 초대 교회와 원본문의 목소리를 되살리려고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그의 이론은 그가 정의하는 ‘정통’이라는 교리로 인해서 함정에 빠집니다. 그는 영지주의와 양자론의 예를 들면서 두가지 ‘이단’적 요소를 가진 본문이 ‘정통’적인 교리를 가진 본문으로 변개되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영지주의란 인간으로써 예수의 존재를 거부하고 신적인 부분만을 받아들이는 교리를 말하며 양자론은 예수의 신적인 부분을 거부하고 인간으로써의 예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교리입니다. 물론 본문의 필사과정 가운데 이런 변개가 있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이런 변개에 대해서는 이 책에 잘 설명되어 있으니 여기에 적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제기되는 문제는 왜 하나의 본문을 필사하는 사람이 어떤 영지주의적 본문은 변개하고 다른 영지주의적 본문은 변개하지 않았는가?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양자론적 본문을 ‘정통’적인 교리로 변개한 필사자는 왜 어떤 양자론적 본문은 변개하고 다른 양자론적 본문은 변개하지 않았는가?하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그가 범하고 있는 또 하나의 오류는 그가 서로 다른 양상의 두가지 논쟁을 하나의 과정 가운데서 해결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즉, 어떤 필사자가 과도하게 인간적으로 보이게 만드는 본문을 수정합니다. 그럼 그것은 정통교리를 옹호해주는 본문이 될까요? 아니면 예수를 신적인 존재로 이해하던 영지주의를 옹호하는 본문이 될까요? 그가 말하는 ‘정통’은 예수는 신이면서 동시에 인간이라는 사상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어떤 본문에서 예수를 신이면서 동시에 인간인 것처럼 변개한 경우는 찾기 힘듭니다. 수정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어떤 것은 신적인 예수를 인간적인 예수로 바꿉니다. 다른 어떤 경우는 인간적인 예수를 신적인 예수로 바꿉니다. 이것은 그가 말하는 ‘정통’이 할 작업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들 스스로 함정에서 빠져나오려다 반대편의 함정에 빠지는 꼴이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정통’교리를 마치 ‘중간’에서 균형을 잡으려는 시도처럼 그려내는 어만의 시도는 다소 무리가 있는 재구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만이 이야기하는 ‘정통’에 의한 본문의 변개는 아직까지 증명할 방법이 없습니다. 수많은 사본들 가운데 어떤 것은 영지주의적인 것들만 싹 뜯어고친 사본들이 있으지도 모르지만 아직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반면에 어떤 사본에서는 양자론적인 요소들을 싹 뜯어고친 사본들도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 역시 아직 증명된 바가 없습니다. 그저 여기 저기 흩어져 있는 사본학적 이문들을 종합하여 이런 경향도 있을 수 있다고 설명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이런 저의 견해는 이 책을 번역하신 민경식 교수님의 영향이 크다고 하겠습니다. 민경식 교수님은 이런 교리적 변개를 ‘정통’에 의한 조직적 변개의 가능성으로 보기보다는 개별 필사자의 신앙의 문제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고 보시는 것 같습니다. 물론 저는 이 책을 통해서 바트어만이 제시하고 있는 교리적 변개나 사회적 변개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변개나 이문들은 성경 안에 그리고 사본들 안에 분명히 존재합니다. 하지만 그것을 ‘정통’과 ‘이단’을 갈라내던 신학 논쟁의 배경이나 정경화의 그림자 아래서 보아서는 안된다는 것이 저의 의견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어만이 다소나마 무리한 재구성을 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아주 어이없는 문제제기라기 보다는 충분히 학문적으로 가치가 있는 문제제기이고 또한 한번쯤 생각해보고 관심을 가져볼만한 주제들이라고 생각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책으로 인해서 더욱 많은 사람이 사본학과 초대교회에 대한 이야기들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는 것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책을 통해서 우리나라에서도 이제는 사본학적인 업적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환경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마가복음 16장 8절 이하의 본문이라던가 주기도문의 송영부분, 간음한 여인의 비유 같은 것들은 원문에 없는 본문으로 너무나도 많은 합의에 이르러 있는 부분들입니다. 특히나 주기도문 송영같은 경우 헬라어 표준 본문인 네슬알란트 27판이나 UBS 4판에서는 아예 본문에서 빠져있고 이문으로 처리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민교수님 말처럼 우리나라는 송영없는 성경이 나오면 송영을 버리기보다 성경을 버리는 쪽을 택하는 환경이기 때문에 아직 이런 업적들이 반영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루 빨리 설교와 우리의 신앙 가운데 이런 것들이 반영되어 새롭고 풍성한 열매들이 맺히길 바랍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가 읽고 있는 성경이라는 것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책이 아니라 얼마나 많은 이야기와 역사를 담고 있는지 그리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고민과 노력이 담겨있는지를 이해할 수 있길 바랍니다.

6 Comments

  1. 핑백: ssh4jx's me2DAY
  2. 저는 민경식 교수가 쓴 [신약성서 우리에게 오기까지]를 읽으면서 바트 어만을 알게 되었습니다. 대단한 사람이더군요. 트랙백이란 걸 처음으로 걸어봅니다.^^

    1. 안그래도 성경왜곡의 역사 서평 쓰신 것을 인터넷을 뒤지다가 한번 본 적이 있습니다. 관심 가져 주시는 분이 있으니 참 반갑더군요. 최근 들어서 본문비평에 대해서 쉽게 다가가게 하시려는 노력들이 꽤 많이 이뤄지고 있습니다. 약간 다른 입장이긴 합니다만 신현우 교수님의 사본학 이야기도 재미있습니다. 물론 한권 읽으셨으면 더 읽으실 필요까진 없겠지요. 비슷한 내용입니다. 트랙백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꾸준히 관심 갖어 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시간 되시면 성서공회에서 진행하는 본문비평 수업에도 와보시면 좋을 듯…^^

  3. 핑백: Mitmirsein
  4. 사실 제가 쓴 글은 서평이라고 하기엔 너무 유치하고, 그냥 이런 책 읽었다는 메모 수준입니다. 찾아보니 신현우 교수님의 책을 저도 갖고 있습니다. 역사적 예수 연구 규칙과 공관복음으로의 여행. 신 교수님을 잘 아는 지인이 제게 그분을 소개해 줘서 그때 눈에 띄는 책을 사두었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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