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물모집 [성서조선 1932년 3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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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의
생산력에는 한계가 있는데 인구는 끝없이 늘어나기 때문인지, 경기 불경기를 논할 것도 없이 생활고는 해마다 더하고, 의식주를
해결할 수 있는 마땅한 직장을 구하려는 소리는 날로 심각하여진다.   단순히 먹을 것을 구걸하려는 것이 아니고 정직한 직업을
달라는 자에게 일거리를 주어야 할 것은 하나님이나 사람이나 함께 느끼는 바이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만 이 모든 요구에 응할 수 있는 것인지는 나와 같은 사람이 자세히 거론하려는 바가 아니다.   다만 아무런
힘도 없는 나까지도 이와 같은 종류의 논의를 피할 수 없게 될 때마다 절실히 느끼는 것은 있다.   바로 ‘상당한 인물에게
상당한 요직을 주라’는 ‘상당’이라는 조건만 아니면 세상이 비록 야릇하다 할지라도 아직도 할 만한 노동이 가득하다는 것이다.

보편적 사실인지 국부적 사실인지는 모르겠으나 구혼 여성의 과잉이 한 걱정거리라 한다.   그러나 만일 인간에게서 허영심의 뿌리만
뽑아 버릴 수 있다면 이런 걱정의 대부분은 제거할 수 있으리라.   이는 통계에 나타난 남녀 양성의 비례가 증명하는 바가
아닌가.   선량한 중매자가 되기 어려운 이유는 천생배필을 구하기 어려워서가 아니고 그 일방 혹은 쌍방의 허영심을 제어하기
곤란한 까닭이다.

자살을 결심한 청년을 겨우겨우 설득시켜서 자결을 단념하게 하고, 자살한 셈 치고 ‘죽은 자’로서 세상을 살아 갈 방도를 세우라
했더니, 어느덧 그 청년은 자기가 ‘죽은 자’라는 것은 까맣게 잊고서 ‘산 자’가 되어서 자기뿐 아니라 온 가족의 현재와
미래까지를 잘 살려고 염려하고 안달복달하다가 또 다시 자살을 결심하는 사태가 된다.

물에 빠진 자가 죽은 듯이 하고 있으면 구원할 길도 있건만 빠진 자 스스로가 살자고 덤비면 건지려는 자까지도 함께 빠져 죽게 됨과 같은 사실이 적지 않다.

우리는 입으로서는 아무렇게라도 살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가문에 살려고 하며, 출신 학교에 살려고 하며, 경력에 살려고
하며, 체면에 살려고 한다.   어찌되었든지 ‘상당’하게 살려고 하나 결국에는 아무렇게도 살 수 없고 손에 합당한 직업도 찾기
어렵게 된다.

그리스도는 탄식하셨다.   “추수할 것은 많으나 일꾼은 적다” (누가복음 10:2)

“나의 복음을 위하여 생명을 버리는 자는 생명을 얻으리라” 하셨다.

참 ‘죽은 자’여 오라, 그대의 취직은 확실히 담보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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