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트만 신학에 대한 오해

불트만은 예수의 역사적인 부활을 믿지 않는다?

사실 불트만 신학에 있어서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 자체가 오해일 수도 있습니다.
불트만에게 있어서 신화라는 것은 현대에 있어서 유효하지 못하게 된 시대의 사고체계(?)정도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개념은 성경 가운데 있는 기적과 같은 ‘현대에는 믿어지기 힘든’ 내용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신화에 대한 정의는 불트만이 최초로 내린 것은 아닙니다.
그 전에도 많은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기적과 같은 성경의 믿기힘든 내용들을 신화라는 범주 안에 집어넣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제거한 채 성경을 재구성한다던가 하기도 했습니다.
불트만도 이와 동일한 역사비평적 방법론을 수용하였지만 이들과 불트만의 다른 점은 그 신화를 다루는 방법입니다.

다른 자유주의 학자들은 이 신화들을 제거해야 온전한 성경의 메세지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역사적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 사이에 드러나는 차이를 인식한 그들의 업적은 감사할 따름입니다.
하지만 불트만이 명확하게 이야기하는 것처럼 그런 작업은 신약 성서의 케리그마를 밝히보여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당시의 세계관이라고 할 수 있는 신화는 케리그마와 분리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신약의 케리그마는 신화적인 언어를 통해서 기록되었고 선포되어졌습니다.
사건과 언어 그리고 의미가 칼로 자르듯 분명히 나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 자유주의자들의 착각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트만이 이 신화를 제거하지 말고 실존적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불트만이 이야기하는 신화의 의미를 되새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불트만이 이야기하는 신화는 거짓말이 아닙니다.
현대 신화론에 있어서도 신화 = 거짓말이라는 도식은 용납되지 않습니다.
신화란 초자연적인 진리를 표현하는 그 당시 사람들의 언어입니다.
불트만도 신화를 거짓말이라고 보지 않고 현재는 유용하지 않게된 당시의 언어로 이해했습니다.

문제는 이 신화를 거부하는 것이 곧 비신화화라고 보시는 분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이 신화를 거부하는 것은 불트만이 의도한 작업이 아닙니다.
부활을 믿지 않는 것은 부활을 비신화화 하는 것이 아닌 재신화화 하는 것입니다.
과거의 신화를 현대의 언어로 바꿔놓는 것은 비신화화가 아닙니다.
아니, 진리가 그것의 사실여부에 매달려 있는 것 자체가 또 다른 신화를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과거의 사고방식이 그렇듯 지금 우리가 역사적인 것을 표현하고 판단하는 것도 결국 이후에는 또 다른 신화가 됩니다.
신화라는 단어가 아닌 다른 단어로 정의될지언정 그것은 결국 또 다시 이해못하게 될 언어들이며 해석되어야 할 언어가 됩니다.
이런 신화를 거듭하여 재생산하는 것은 불트만이 이야기하고자 했던 것이 아닙니다.

불트만은 역사적인 사실여부가 진리 자체인 것처럼 여겨지는 것에 반대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 일이 실제 있었느냐 아니냐가 아니며 우리의 신앙도 그 것의 역사적 사실여부 위에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있었다고 믿는 것도 없다고 믿는 것도 또 다른 신화일 뿐이며 신을 증명하려는 것처럼 어리석은 시도입니다.
그 사건의 기록을 통해서 우리가 얻어야 하는 것은 사건에 대한 정보가 아니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실존적 요구입니다.
오히려 불트만은 부활의 말씀이 처음 기록되던 그 시점이나 지금이나 실존적으로 동일한 의미를 가진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불트만은 당시와 현대의 세계관적 차이를 이야기하고 언어의 차이를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이런 차이를 인식하는 것은 둘의 분리를 조장하기 위함이 아닌 진정한 동일성을 주장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의 과제는 자신의 물음 속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시대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과연 케리그마는 신화론을 별개로 하고 해석될 수 있는 것일까? 또한 케리그마로서의 진리를 상실함이 없이 신화론적 용어로써 사고하지 않는 사람들을 위하여 케리그마의 진리를 회복할 수 있는 것일까?”

불트만은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서 ‘가장 주관적인 해석이 가장 정확한 해석’이라고 말하지만 그런다고 주관적 해석을 무작정 옹호하지 않습니다.
그가 말하는 ‘주관적’이란 개인의 실존적 해석을 의미합니다.
성경은 과거나 현재나 동일한 인간의 실존앞에 헌신을 요구하고 결단을 촉구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받아들일 수 있는 요구요 결단입니다.

불트만이 역사적인 부활을 믿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의 신학이 주장하는 것은 부활의 사실증명이 아닌 오늘날도 우리의 실존가운데 동일한 부활의 메시지에 대한 증거일 것입니다.

물론 지금은 불트만이 파악했던 세상과는 또 다른 세상이 되었습니다.
과학 만능주의가 판치던 당시와는 달리 이젠 비과학적인 것에 대한 가능성과 효용성을 이야기하는 시대입니다.
신화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도 늘어나고 신화적인 언어들이 오히려 이전보다 익숙해진 느낌이 없지 않습니다.
신화를 해석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화적으로 말해야 한다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래서 서사비평이나 이야기식 설교 같은 것이 주목을 끌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역사적 예수 연구라는 것을 통해서 우리가 알아왔던 예수나 초기 기독교 공동체와는 많이 다른 모습의 예수와 기독교가 재구성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당시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인간은 삶과 죽음이라는 실존의 문제앞에 서는 존재이며 그런 인간에게 성경은 끊임없이 결단(신앙)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상대화되어 가고 있는 시대에 기독교의 복음이 설 자리는 어디일까요?
불트만의 고민도 저와 같았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불트만도 그렇고 슐라이에르마허도 그렇고 수많은 이들로부터 비판받고 있는 그들의 고민은 정작 너무 신앙적인 것이 아니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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