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어린시절1 (눅 2:22~35)


이야기가 너무 길어질 것 같아서 두편으로 나눠서 씁니다.
이건 내용상의 구분은 아니며 페이지 분량으로 인한 구분임을 먼저 말씀드립니다.



  복음서를 특정인물의 일생에 대한 전기로 볼 때 가장 많이 부딫히는 부분이 어린시절에 대한 서술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확실히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는 네권의 복음서에 실려있는 예수님의 공생애 이전의 기록은 극히 미비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정경 외로 나가면 도마복음서에 전해져 내려오는 예수님의 어린시절 이야기가 있긴 하지만 친구를 지붕에서 뛰어내려 죽게했다가 되살린다거나 진흙으로 참새를 만들며 논다거나 목수였던 아버지를 위해서 잘못 자른 나무를 길게 늘려준다거나 하는 기록들을 역사적이라고 신뢰한다는 것은 조금 무리가 있다고 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어린 시절에 대한 정보가 희박한 가운데 그나마 가장 많은 자료를 전해주고 있는 것이 바로 누가복음입니다.



 
24 또 주님의 율법에 이르신 바 “산비둘기 한 쌍이나, 어린 집비둘기 두 마리를
드려야 한다” 한 대로, 희생제물을 드리기 위한 것이었다.



여기서 예루살렘에서 드리기 위해 올라간 제사라는 것은 레위기 12장에 나오는 아이낳은 여인이 드려야하는 제물에 관한 규정을 따르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원래는 아이를 낳고 부정해진 여인에 관한 정결예식인 이 제사를 하나님께 바쳐지는 첫아들의 예식으로 대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진정 예수님이 하나님께 드려진 사람임을 그려내려는 의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한가지 더 알 수 있는 사실은 사실 이 정결 예식에 기본 제물은 번제를 위한 어린양 한마리와 속죄제를 위한 비둘기 한마리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레위기는 어린양을 드리기에 넉넉치 못한 사람을 위해서 어린양 대신 비둘기를 사용할 수 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의 가정이 그렇게 넉넉한 가정이 아니었음을 유추해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27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관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누가가 전하는 예수님의 어린시절 이야기를 읽다보면 반복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구절들이 있습니다. 바로 ‘성령’에 관한 언급과 ‘율법에 따라’라는 구절입니다. 율법에 따라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올라가고 제물도 율법에 따라 드리는 것으로 나옵니다. 시므온을 만날 때도 부모는 율법의 관례대로 행하고자 오고 있었다고 말합니다. 이 짧은 구절에 율법에 따라라는 말이 세번이나 반복됩니다.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은 전체적으로 율법을 꽤나 잘 지키는 유대인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헬라인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되는 누가의 복음서에 왜 이렇게 율법을 잘 지키는 유대적인 예수상이 그려지고 있는 것일까요?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것은 아니지만 저는 누가복음이 로마교회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생각은 최근에 로마서를 해석하는 새로운 시각의 도움을 받은바가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주후 49년경 로마의 황제 클라우디우스는 ‘크레투스(Chretus)의 선동으로 야기된 소동’으로 인해 유대인들을 로마에서 추방시키는 칙령을 내립니다. 여기서 크레투스는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크리스토스의 잘못된 음역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학설입니다. 즉, 당시에 로마에는 그리스도에 관한 유대인들의 논쟁이 사회적 문제로까지 여겨질만큼 뜨거웠다는 말이 됩니다. 이 때 로마에서 추방된 사람이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54년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죽고 추방령이 해제되면서 추방되었던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이 로마로 돌아오게 됩니다. 하지만 당시엔 이미 이방계 그리스도인들이 교회의 주도권을 쥐고 있던 상황에서 율법준수를 무시하고 믿음을 통한 신앙만을 중시하는 문화가 자리잡게 됩니다. 더불어 이방계 그리스도인들이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을 무시하고 소외시키는 현상이 일어나게 되면서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로마서가 쓰여졌다는 것이 최근 로마서 해석에 있어서 하나의 큰 흐름을 이루고 있습니다. 로마서 9장 이후부터 나오는 유대인에 대한 바울의 언급은 이런 상황을 고려할 때만이 별도의 부록이 아닌 하나의 연속된 서신으로 읽을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이 이론은 많은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다시말해,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그리스도의 유대계 족보라던가 율법준수등을 강조했다는 말이 되겠습니다.




누가복음이 누가에 의해서 쓰여진 것이건 그렇지 않건 간에
(물론 누가가 썼다면 더 말할 것도 없지만) 누가의 공동체가 어떤 방식으로든 로마교회와의 연관을 가지고 있다면 로마교회의 이런 상황을 반영하고 있는 로마서의 신학이 많은 부분 누가복음의 예수상 가운데 스며들어 있을 것입니다. 특히나 유대교에 대한 관점이나 이방계 그리스도인으로써 그리스도 교회의 자기 정체성과 정당성에 대한 부분에서 누가는 많은 부분 바울의 설명을 그대로 따라가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부분은 차후에 더 자세히 다루겠습니다.) 어쨋든 예수의 어린 시절에 율법을 잘지키는 부모와 율법을 잘 지키는 예수님의 유대적인 모습과 왕족으로써의 족보가 굳이 필요 없음에도 하나님에게까지 이르는 구약의 족보를 언급하고 있는 누가의 기록들은 이런 로마교회의 상황과 연관이 있을 것이라는 점을 이해하면 읽기가 한결 수월해집니다.


로마서와 로마교회 그리고 그 안에 있던 유대계 그리스도교인들과 이방 그리스도교인들의 갈등과 바울의 화합노력에 대하여는 아래 정승우 교수님의 책을 참조하시길 바랍니다.


로마서의 예수와 바울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정승우 (이레서원, 2008년)
상세보기


이렇게 율법대로 제사를 드리러 올라간  곳에서 예수님의 부모는 시므온이라는 선지자를 만납니다. 여기서 시므온은 아기를 향한 범상치 않은 예언을 하게 됩니다.


34 시므온이 그들을 축복한 뒤에, 아기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 가운데 많은 사람을 넘어지게도 하고
일어서게도 하려고 세우심을 받았으며,
비방 받는 표징이 되게 하려고 세우심을 받았습니다.
35 그리고 칼이 당신의 마음을 찌를 것입니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의 마음 속 생각들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이야기 끝부분까지 드러내지 않으려 노력하는 마가와는 달리 누가복음은 철저히 처음부터 이 사람은 그리스도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하지만 시므온이 이야기하는 그리스도의 모습은 이전에 유대교에서 인식하고 있던 메시아상과 연결되지 않습니다. 시므온의 앞에 있는 그리스도는 로마에 대항하는 사람이거나 이스라엘을 해방시켜주는 왕적 메시아가 아니라 사람의 마음 속의 생각들을 드러나게 하는 선지자적 메시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처럼 누가가 선택하고 있는 메시아의 모습은 유대교의 그것이나 다른 복음서들이 그려내고 있는 것과도 다릅니다. 그리고 앞으로 이 그리스도는 비방받는 표징으로 세우심을 받을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하지만 누가에게 이것은 끝이 아닌 시작입니다. 그리스도의 사역은 이스라엘 가운데 머물지 않습니다. 만약 이 약속이 이스라엘에게만 머무는 것이라면 누가는 이 이야기를 쓰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누가가 적어나가는 그리스도는 이스라엘 어느 구석에서 유대인을 위해 일어난 유대인의 이야기가 아닌 바로 이방인이었던 자기와 자신의 공동체 가운데 오신 온 세상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구원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30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습니다. 
31 주께서 이것을 모든 백성 앞에 마련하셨으니,
32 이것은 이방 사람들에게는 계시하시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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