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 6:37-38] 평범함이 낯설게 느껴질 때…

luke

“남을 심판하지 말아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도 너희를 심판하지 않으실 것이다. 남을 정죄하지 말아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도 너희를 정죄하지 않으실 것이다. 남을 용서하여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 남에게 주어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도 너희에게 주실 것이니, 되를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서, 너희 품에 안겨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여 주는 그 되로 너희에게 도로 되어서 주실 것이다.”‬‬ [눅 6:37-38]

응팔요즘 ‘응답하라 1988’을 보고 있다. 응칠세대의 추억을 가지고 있는 나에게 응팔은 희미하게 기억 속에 남아있는 어린시절 이야기이다. 그래서 응칠이나 응사 때처럼 격하게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은 별로 없지만, 그래도 드라마를 보고 있으면 저런게 ‘사람 사는 맛’이라는 생각을 자주 한다.

그 당시나 지금이나 사람사는 것이 뭐 그리 달랐겠냐마는, 요즘같이 팍팍한 시대를 살다보니 그 시절이 좋아보이는 효과같은 것이려나? 함께 어울렁 더울렁 어울려 사는 동네 골목, 어찌보면 너무나도 별볼일 없고 투박하기까지 한 삶의 모습이 ‘대안’이라는 이름을 붙여 시도해야만 하는 이상적인 것이 되어버렸다. 금리 1% 시대를 익숙하게 살다보니 15% 금리를 저금리라 말하는 시대가 꿈처럼 보이는 뭐 그런 것이다. 그렇게, 때론 너무 평범했던 것들이 복음이 되는 순간들이 있다.

오늘 이 구절은 마태복음에 평행구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은 같은 말을 하면서도 서로 다른 뉘앙스를 가진다. 마태는 자신의 복음서를 통해 청중들이 세상보다 나은 도덕성을 가지라고 요구한다. 그래서 심판 받지 않으려거든 남을 심판해선 안된다고 말한다. 조심하라는 경고다.

“너희가 심판을 받지 않으려거든, 남을 심판하지 말아라. 너희가 남을 심판하는 그 심판으로 하나님께서 너희를 심판하실 것이요, 너희가 되질하여 주는 그 되로 너희에게 되어서 주실 것이다.” [마태복음서‬ ‭7:1-2‬]

하지만 누가의 말투는 조금 다르다. 심판하지 말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경고가 아니다. 누가는 두 문장을 ‘그러면’이라는 말로 연결시킴으로서 그렇게 했을 때 받게될 무언가를 약속하고 있다.

심판하지 말아라, 그러면 하나님도 너희를 심판하지 않을 것이다.
남을 용서해라, 그러면 하나님도 너희를 용서해 주실 것이다.
남에게 주어라, 그러면 하나님도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이 약속은 그들의 현실 속에서 그들이 행해야할 일들을 정당화해준다. 그래서 흔히 우리는 이것을 선하게 사는 삶에 대한 마지막 날의 보상이라고 생각한다. 보상을 받기 위해, 즉 복받기 위해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의미가 된다.

하지만 앞의 글에서 함께 살펴보았듯 누가 공동체가 살아가야 할 새로운 삶의 근거는 보상이 아니라 ‘은혜’이다. 그들은 앞으로 받을 것이 아니라 이미 받은 것으로 인해 오늘 그 은혜를 보답하며 산다. 그렇다면 여기서 누가가 약속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여기서 누가의 예수가 약속하고 있는 것은 행위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보상되어야 할 것에 합당한 보상이 주어지는 정의를 의미한다. 구닥다리 같고 식상해보이지만 예수를 따르는 이들에게 합당하게 주어지는 보상이란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니다.

소방관세상은 심판하지 않으면 심판받는다. 내가 용서한다고 그것이 용서로 돌아오지도 않는다. 남에게 주면 그냥 호구가 되는 것이 현실이다. 착하게 살면 무시당하고 등쳐먹는 것이 세상이다. 가난한 자는 복이 있는 것이 아니라 더 가난해지고 온유한 자는 땅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고 이용만 당할 뿐이다. 국회의원은 회의장에도 안 나오고, 와서는 잠자고, 싸움질 하고, 야동을 봐도 천문학적인 보너스를 받는다. 하지만 목숨을 걸고 위험에 빠진 생명을 구하는 소방관은 장갑도 자기 돈으로 사고 타오르는 불 속에서 몇 시간을 일하고도 컵라면으로 끼니를 떼운다.

예수의 시대나 지금이나, 세상은 대우받아야 할 가치가 대우받지 못하는 상태를 당연한 것 혹은 어쩔 수 없는 것이라며 받아들이라고 말한다. 이 세상의 불평등한 법칙은 니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정해져 있었다며 우리에게 너의 수저는 금수저인지 흙수저인지를 묻는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세상에서 가치에 대한 정당한 보상이라는 약속은 마치 현실 속에서는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먼 나라 이야기처럼 들린다.

예수가 가져오는 새로운 세상에서 지금의 세상을 유지하는 가치들은 뒤집힌다. 가난한 자가 부요해지고 부요한 자는 가난해진다. 하지만 그 세상은 기존의 것에 대한 무조건적 반대가 아니다. 그것은 본래 주어져야 할 것을 받아야 할 사람에게 돌려지는 정의가 회복되는 세상이다. 그것은 너무나도 평범한 약속이지만 그 평범함이 낯설어진 세상에서는 그 낯섦은 복음이 된다.

언젠가부터 많은 이들의 소원은 평범하게 사는 것이 되었다. 평범한 직장을 갖고 평범한 가정을 이루고 평범하게 사는 것, 하지만 평범하게 살기 위해서는 누군가를 밟고 일어나야 하고, 속여야 하고, 나를 향해 내미는 손을 뿌리칠 줄 알아야 한다. 그렇기에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응팔이 보여주는 평범한 이들의 삶은 평범함이 아닌 복음처럼 들리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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