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 (눅 2:1~21)

이 이야기는 예수의 탄생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제서야 여러가지 이야기가 지나가고 주인공이 등장하네요.

 

 

그 때에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칙령을 내려 온 세계가 호적 등록을 하게 되었는데,

이 첫 번째 호적 등록은 구레뇨가
시리아의 총독으로 있을 때에 시행한 것이다.

 

  여기서 누가의 역사적인 오류가 등장합니다. 분명 앞에 이야기에서 누가는 엘리사벳의 임신을 유대왕 헤롯때라고 적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유대왕 헤롯이 기원전 4년경에 죽기 때문에 신학자들은 보통 예수님의 탄생시기를 기원전 4년 이전으로 잡고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퀴리니우스가 시리아의 총독으로 부임하여 호적등록을 한 시기는 기원후 6년경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누가의 기록대로라면 예수님은 기원전 4년 이전이나 기원후 6년 이후에 태어나셨어야 맞습니다. 10년이나 차이가 나는 이 기록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이런 역사적 불일치를 두고 많은 분들이 누가의 실수라고 말하며 누가복음의 작가성을 평가절하 시키는 경우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10년이나 차이가 나는 이 사건들을 헷갈릴만큼 누가는 신뢰하지 못할 작가일까요? 혹시 누가의 이런 시간 배치에는 어떤 의도가 깔려있지 않을까요? 시간적인 차이를 무시하면서까지 적고 싶었던 어떤 이유가 있지 않았을까요?



퀴리니우스의 호적조사는 6년에 아켈라오가 추방되면서 유대와 사마리아가 로마의 직접통치를 받게 되는 시점이라는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로마의 처사에 자신들의 정체성을 위협받은 유대인들은 심한 반발을 일으키게 됩니다. 그 중에
갈릴리 사람 유다가 일으킨 반란은 꽤나 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반란은 퀴리니우스에 의해서 진압되지만 그 잔당들은 이후에 ‘젤롯(열심당)’이라는 무장독립투쟁 세력으로 발전합니다. 인간의 힘으로 로마를 물리치고 하나님 나라를 세우려다 실패했던 갈릴리 유다, 그리고 반란이 있던 해에 갈릴리 나사렛에 살던 한 부부에게서 태어난 아기, 이처럼 상반되는 두 갈릴리 사람이 만들어내는 효과는 무엇일까요? 누가는 이런 두가지 사건을 접목시킴을 통해 인간의 힘이 아닌 하나님의 낮아짐을 통해 평화를 이뤄낼 아이의 탄생에 대해서 이야기하려는 것은 아닐까요?

 

마리아가 첫 아들을 낳아서, 포대기에 싸서 구유에 눕혀 두었다.


여관에는 그들이 들어갈 방이 없었기 때문이다.

 

  성탄절이면 흔히 동방박사와 목자들이 마굿간에 나신 예수님을 경배하러 가는 연극을 보곤 합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이런 설정은 성경 그 어디에도 나타나질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내용은 마태복음의 내용과 누가복음의 탄생이야기를 짬뽕시켜놓은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마태의 탄생이야기에 목동들이 등장하지 않듯이 누가의 탄생이야기에도 동방박사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누가에게 있어서 태어날 아기가 갖는 의미는 유대인의 왕이 아닌 그 사회의 낮고 천한 자들 즉, 잃어버린 자들을 향해 다가오시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누가복음에는 사실 마굿간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냥 아이를 구유에 뉘었다는 설명 뿐입니다. 그럴싸한 지붕딸린 마굿간인지 아니면 위에 올린 그림처럼 그냥 집 밖에 가축들을 묶어놓던 곳이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길바닥에서 태어났다고 해석하는 것이 너무 과도한 해석인 것은 사실이지만 예수님을 꽤나 그럴싸한 마굿간에서 태어난 것처럼 그려내는 것 역시 과도한 해석이라고 생각합니다. 흔히 마태복음의 내용을 통해 집안에서 태어나셨을 것이라 주장하지만 사실 마태복음에서는 구유와 포대기에 대한 내용도 없으며 마리아와 요셉이 호적하러 베들레헴으로 가는 이야기도 없습니다. 마태복음에서 마리아와 요셉은 원래 베들레헴 사람으로 나옵니다. 다윗의 자손이어야 하거든요. 그랬다가 후에 헤롯이 죽은 후 애굽에서 올라와 나사렛에 숨어살게 되지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탄생 이야기는 완전히 다릅니다. 오히려 우리에게 너무 익숙해져 있는 누가복음의 이야기가 마태복음에서는 생소한 이야기가 됩니다.

 

더없이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주님께서 좋아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로다.

  당시 이스라엘 사회는 로마의 지배를 받는 사회였습니다. 당시 로마는 아우구스투스를 하나님의 아들로 칭송하며 그가 온 세상 가운데 가져온 평화의 시대를 선전하고 있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식민지 가운데 로마의 군사적 우위를 통한 힘의 지배를 정당화 하는 것이 목적이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로마에 의해서 선전되던 평화를 팍스 로마나(Pax Romana)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이것은 겉으로 보기에만 평화일 뿐 실상 속을 들여다보면 평화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잔인한 것이었습니다. 로마에게 저항하는 세력들은 가차없이 짓밟혔습니다. 그들이 선전하는 그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 평화에 반대되는 모든 것들은 싸그리 처단되어야 했습니다. 이처럼 로마가 주는 거짓 평화가 가득하던 세상에 하늘로부터 하나의 노래가 들리길…



이 평화는 로마가 가진 약육강식의 힘의 논리가 가져다주는 거짓 평화가 아닌 하나님의 낮아지심이 가져오는 진정한 평화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소식은 당시 사회의 가장 낮고 천하여 증인으로써 자격도 없는 목동들에게 전해집니다.

 

 

목자들은 자기들이 듣고 본 모든 일이 자기들에게 일러주신 그대로임을 알고,


돌아가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그를 찬미하였다.

 

특히나 베들레헴 지역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드리는 가축을 키우던 곳이었습니다. 당시엔 유대지역 뿐 아니라 멀리 타국에 흩어져있는 디아스포라들까지 예루살렘으로 제사를 드리러 오곤 했습니다. 하지만 먼길을 오다보면 제사를 드릴 가축에 상처가 생기기 나름이지요. 그렇게 되면 이 가축은 제사에 사용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성하지 않은 가축을 제물로 드려선 안되기 때문이지요. 이들을 위해서 생겨난 제도가 성전에서 가축을 매매하는 제도였습니다. 멀리서 오는 사람은 돈만 가지고 오면 예루살렘 성전에서 정결한 가축을 사서 제사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문제는 예루살렘에서 파는 이 가축은 흠이 없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베들레헴에서 양을 치는 목자들은 가축들을 지키다가 목숨을 잃는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그들이 죽는 이유는 겉보기에는 “하나님께 받쳐질 예물을 지킨다”는 이유였지만 실상 돈 많은 사람들이 편하게 예배를 드릴 수 있게 희생되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정작 돈이 없는 자들은 성전에서 가축을 살 수도 없고 멀리서부터 예루살렘으로 제사를 드리러 생업을 포기하면서까지 올 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베들레헴 목자들에게 전해진 구세주의 탄생소식… 그들이 어떻게 느꼈을지를 떠나서 적어도 누가는 이 소식이 그들의 인생에 기쁨이었음을 말하고 더 나아가 앞으로 있을 성전체제에 대한 비판의 서막을 여는 하나의 모티브로 사용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가진 자들을 위한 형식적 종교의 희생자인 목자들의 입을 통해 전파되고 찬송되는 한 아기의 탄생 그리고 그 아기를 통해 새롭게 지어질 성전… 그리고 해방!! 이 아이가 가져다 줄 새로운 세상에 대한 기대… 누가복음의 크리스마스는 이와 같은 기쁜 소식으로 가득한 시간입니다.

 

 

 

—- 덧다는 글

 

  이 글을 다 쓰고 서점에서 문득 언젠가 본 것 같은 책이 생각나 찾아보니 이런 책이 있네요. 여자친구를 졸라서 하나 사달라고 했습니다.ㅋㅋ 한권 집어들고 집에 왔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호슬리의 책이네요. 이 글과 성서해석이 호슬리의 글에 의존하는 것은 아니지만 아마 더 깊은 이해를 위해 좋은 참고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크리스마스의 해방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리차드 A.호슬리 (다산글방, 20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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