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 찬가, 사가랴의 노래 (눅 1:39~80)

먼저 등장하는 이야기는 크게 두 여자의 두가지 찬양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마리아가 천사의 계시를 받고 천사가 말해준 엘리사벳의 임신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엘리사벳이 지내던 유대산골의 동네로 찾아갑니다.

하지만 특이한 것은 이 본문의 구조가 다른 이야기를 완전히 생략하고 엘리사벳의 환영의 외침과 마리아 찬가 두가지만을 간략하게 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냥 구조만을 놓고 본다면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찾아가 서로 노래 한곡씩을 부르고 돌아온 형태가 되어버립니다. –_-

약간 어이없어 보이는 이 구절이 왜 등장하는 것일까요?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내게 오시다니, 이것이 어찌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그대의 인사말이 내 귀에 들어왔을 때에, 내 태중의 아이가 기뻐서 뛰놀았습니다.



누가복음의 특징이라고 한다면 세례요한의 탄생 이야기가 기록된 유일한 복음서임에도 불구하고 정작 세례요한 자신에 대한 기록은 축소되거나 다른 사람에 의해서 대체되어있다는 것입니다.
위의 본문은 세례요한이 예수의 나아오심을 보고 “내가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선생님께서 내게 오셨습니까?”라고 고백했던 그 고백이 엘리자벳의 입으로 옮겨온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물론 그것도 뱃속의 세례요한이 알아본 것이 아니냐라고 말할 수도 있겠으나 누가가 그 고백을 굳이 요한의 입에서 빼앗아 엘리자벳의 입에 집어 넣은 것은 누가의 의도적 변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 마음이 내 구주 하나님을 좋아함은,

그가 이 여종의 비천함을 보살펴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는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할 것입니다.


힘센 분이 나에게 큰 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의 이름은 거룩하고,


그의 자비하심은, 그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대대로 있을 것입니다.


그는 그 팔로 권능을 행하시고 마음이 교만한 사람들을 흩으셨으니,


제왕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사람을 높이셨습니다.


주린 사람들을 좋은 것으로 배부르게 하시고, 부한 사람들을 빈손으로 떠나보내셨습니다.



흔히 “마리아 찬가”라고 불리는 이 시의 주제는 “역전”입니다.
마리아의 믿음이 어쩌니 하면서 아무리 고상한 주제로 이 시를 표현하려고 해도 이 시의 가장 단순한 주제는 너무나도 당연히 여겨지는 극도로 단순한 관계의 ‘뒤집힘’입니다.
제왕의 신분을 가진 자들은 더욱 높아지고 비천한 자들은 더욱 차디찬 바닥으로 끌어내려지는 것이 당연해보입니다.
주린 자들은 더욱 더 빈손이 되고 부한 사람들은 더욱 좋은 것으로 배부르는 것이 당연해 보입니다.
그때와 수치상의 차이로 비교할 수는 없는 수준의 것이지만 ‘신자유주의’, ‘적자생존’, ‘무한경쟁’이라는 슬로건 아래 가진 자가 더 가지게 되는 이 도식이 너무나도 당연해 보이는 것을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너무 당연해보이는 이 도식이 한 ‘여종’의 믿음을 통해서 뒤집어집니다. 문제는 이 메시지가 너무나도 사회전복적이라는 것입니다.
부와 권력의 불균형은 당시 세상의 지배자인 로마라는 사회가 만들어 낸 체제였습니다. 마리아의 찬가는 이런 체제의 결과들을 하나님이 여종의 비천함을 돌아보시는 자비와 그의 능력을 통해서 뒤집으신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특징으로 인해 누가복음의 메시지가 정치적 메시지로 해석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또 반대편에는 그것을 열열히 반대하는 입장에 서계신 분들도 있구요. 여기서 그것이 옳다 그르다를 말할 수는 없지만 어떤 측면에서건 누가복음에 꾸준히 흐르고 있는 ‘역전’의 사회적 의미는 무시되어서는 안된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누가의 역전은 결코 갱신같은 개념으로는 대체될 수 없는 사회적 성격을 갖습니다. 그것은 그 말이 ‘비천한 여종’의 입을 통해서 나왔다는 점에서 더 극대화됩니다. 정치적 해석을 반대하는 것은 문제될 것이 없지만 어떤 의미에서건 이 ‘역전’의 모티브를 희석하거나 대체하려는 시도는 없어야 할 것입니다.

이 두가지 노래가 나온 후 마리아는 집으로 돌아옵니다. 석달정도 같이 있었다는 언급이 있지만 이것을 보고 3달동안 둘이서 무엇을 했을까라는 것을 궁금해하라고 적어놓은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냥 예상해볼 수 있는 것은 엘리사벳과 함께 있음으로 많은 위로와 용기를 얻었을 것이라는 정도입니다. 이야기는 두 사람의 만남을 지나 빠른 진행으로 다음 이야기로 넘어갑니다.

그가 서판을 달라 하여 “그의 이름은 요한이다” 하고 쓰니, 모두들 이상히 여겼다.
그런데 그의 입이 곧 열리고 혀가 풀려서, 말을 하며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드디어 날이차고 세례요한이 태어납니다. 엘리사벳은 요한이라는 이름을 어떻게 알았을까요?
미스테리입니다. 사가랴가 말을 하지 못함에도 어떻게든 부부사이에 의사소통이 있었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 가장 단순한 해결책이긴 합니다만 만약 그것이 누가의 의도라면 굳이 사가랴를 말 못하게 할 필요가 있었을까요? 본문에도 나오듯이 엘리사벳과 사가랴가 지은 이름이 일치하면서 사가랴는 말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은 다분히 하나님의 계획하심을 나타내기 위한 극적 효과라 할 수 있습니다.

앞에서 사가랴와 마리아는 동일한 상황에서 서로 다른 반응을 한 인물로 표현되었습니다. 제사장이었던 사가랴는 믿지 못하였지만 마리아는 믿음으로 반응합니다. 여기서 청중의 기대가 어그러지는 ‘역전’이 나타납니다. 하지만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사가랴의 믿음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약속은 이뤄집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에게 그랬듯 인간의 믿음에 의한 것도 아니고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의 결과입니다. 가브리엘의 약속대로 늙은 엘리사벳이 아이를 낳고 하나님을 의심했던 사가랴는 그 아이의 이름을 가브리엘의 지시에 따라 ‘요한’이라 지음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항복합니다.

아가야, 너는 더없이 높으신 분의 예언자라 불릴 것이니, 주님보다 앞서 가서 그의 길을 예비하고,
죄 사함을 받아서 구원을 얻는 지식을 그의 백성에게 가르쳐 줄 것이다.
이것은 우리 하나님의 자비로운 심정에서 오는 것이다. 그는 해를 하늘 높이 뜨게 하셔서,
어둠 속과 죽음의 그늘 아래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빛을 비추게 하시고, 우리의 발을 평화의 길로 인도하실 것이다.”


이어지는 사가랴의 찬가라고 불리는 시편은 당시 유대사회 가운데 가득했던 메시야의 기대에 대한 말들로 가득차있습니다. 이야기의 흐름상 분명히 세례요한의 탄생을 축하하는 시편이지만 그 아이는 주인공이 아닙니다. 세례요한의 탄생의 순간에 외쳐지는 찬가임에도 그 안에는 당시 사회에 가득했던 메시야 기대에 대한 내용과 구약의 마지막 무렵 외쳐졌던 구원에 대한 선지자들의 외침들로 가득합니다.

그 탄생에서부터 세례요한은 철저히 예수님을 위한 조연으로 등장합니다. 누가는 그가 사용한 자료에 다른 인물들을 등장시키고 새로운 구조를 형성시킴을 통해서 원래 자료 가운데 있던 세례요한의 부분은 축소시킵니다. 이 특징은 세례요한의 활동에 관한 보고로 가면서 더 뚜렷해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누가가 이런 특징을 보이는 원인을 분명히 규명할 수는 없지만 아마도 당시 누가 공동체 가운데 세례요한에 대한 비정상적 이해들이 있지 않았을까하는 추측을 할 수 있게 합니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누가가 세례요한에 대한 역사적 혹은 구속사적 중요성에 대해서 반대하면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이야기의 주인공임을 선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직 그 분만이 당시 로마의 힘이 제공해주지 못했던 ‘평화’의 길로 우리를 이끌어 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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