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천한 여종의 믿음 (눅 1:5~38)


이 단락에는 두가지 수태고지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나는 세례요한의 어머니인 엘리사벳이 요한을 갖게 된 이야기이고 다른 하나는 마리아가 잉태하게 된 이야기입니다. 이 두 이야기는 대조적인 구조를 가지고 연속하여 등장합니다. 특히나 세례요한의 탄생이야기는 오직 누가복음에만 등장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 배열은 누가의 의도적인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5 ○유대왕 헤롯 때에, 아비야 조에 배속된 제사장으로서, 사가랴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의 아내는 아론의 자손인데, 이름은 엘리사벳이다.


이 구절을 처음 읽는 사람은 전형적인 한 사람의 탄생이야기를 접하게 됩니다. 제사장 아버지에 아론의 자손인 어머니를 둔 한 사람의 탄생, 뒤에 이어지는 내용을 모른채 읽어나간다고 할 때 이런 가정사적인 배경은 메시야 탄생의 기대를 갖게 하는데 충분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7 그런데 그들에게는 자녀가 없었다. 엘리사벳이 임신을 하지 못하는 여자이고, 두 사람은 다 나이가 많았기 때문이다.


어디서 많이 듣던 구절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탄생이야기는 아브라함과 사라의 이야기를 거의 그대로 가지고 오고 있습니다. 물론 최초에 누가가 타겟으로 삼았던 청자들이 아브라함과 사라의 이야기를 알고 있었을 것이라고 보는 것은 근거가 없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누가복음을 거쳐 사도행전까지 복음의 세계적인 확장을 그려내는 누가의 청자들은 이런 언급들로 당연스럽게 아브라함과 사라를 떠올릴 수 있는 사람들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다만 창세기의 기자가 아브라함과 사라의 이야기를 통해서 얻고자 했던 것과 동일한 효과를 의도했을 가능성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11 그 때에 주님의 천사가 사가랴에게 나타나서, 분향하는 제단 오른쪽에 섰다.


사가랴가 맡은 제사장의 직분은 1년에 두번씩 일주일간 성전에서 봉사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중에도 분향하는 직분은 제비를 뽑아서 이뤄졌기 때문에 평생에 한번 할까 말까한 일이었습니다. (독일 성서공회 해설 참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가랴의 사건이 지성소가 아닌 성소에서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지성소는 대제사장이 1년에 한번 대속죄일에만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성전의 구조로 봤을 때 분향단이 있던 곳은 지성소가 아닌 성소입니다. 하나님의 천사가 지성소가 아닌 성소에 나타났다는 것은 아마 신화적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에게도 익숙한 모습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일반적인 것과 뭔가 다른 역사가 시작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3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다. “사가랴야, 두려워하지 말아라. 네 간구를 주님께서 들어 주셨다.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너에게 아들을 낳아 줄 것이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고 하여라.


이 구절 쯤 다가와서 사람들은 ‘어? 뭔가 이상한데?’라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이것이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가 아님을 알게 되기 때문이지요. 다른 복음서들에는 세례자 요한에 대한 정보가 거의 담겨 있지 않은 반면 누가복음은 읽는 자로 하여금 요한의 탄생기사가 메시야의 그것과 혼동될만큼 세례요한의 탄생을 하나의 기적으로 표현해내고 있습니다.


나이 많아 늙은 자의 몸에서 사람들의 기쁨이 될 아이가 태어납니다. 이삭이 ‘웃음’이라는 의미를 가졌다면 요한은 사람들에게 ‘기쁨’을 줄 것입니다.(14절) 아브라함과 사라의 이야기를 재생하는 누가의 이와같은 전개는 읽는 자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고통받는 자를 돌아보셨다는 것과 하나님의 계획을 이뤄나가시고 있음을 알게 합니다. 다만 아직 그것은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17 그는 또한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을 가지고 주님보다 앞서 와서,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아오게 하고 거역하는 자들을 의인의 지혜의 길로 돌아서게 해서, 주님을 맞이할 준비가 된 백성을 마련할 것이다.”


여기서 나타난 ‘독한 술을 입에 대지 않는다’는 것(15절)은 나실인의 규례입니다.(사사기 13:4~5) 그리고 그 아이는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구약의 예언자 전통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말라기 이후 끊어진 예언자의 전통이 500년만에 회복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이 아이의 정체성이 메시야가 아님이 명백해집니다.


아마도 당시 독자들은 세례요한을 알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누가가 속한 공동체, 혹은 누가복음의 제1청자가 되는 공동체에 세례요한에 대한 과도한 숭배가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어떤 의미에서건 누가는 이런 구약 전통들의 회복을 표현함을 통해서 세례요한의 자리를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그는 ‘주님을 맞이할 준비가 된 백성을 마련’하는 자이지 메시야는 아닙니다.


19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다. “나는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가브리엘인데, 나는 네게 이 기쁜 소식을 전해 주려고 보내심을 받았다.


가브리엘은 다니엘에게 계시를 전달했던 천사입니다.(단 9:21) 여기서 가브리엘의 등장은 묵시적 이미지를 갖습니다. 즉 요한의 탄생은 묵시예언자들이 말했던 종말의 시작을 의미합니다. 아브라함과 사라, 엘리야, 다니엘… 이처럼 세례요한은 모든 구약적 이미지의 총합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새로운 세상을 향한 시작으로 모든 이의 기대를 끌고 갑니다.

26 ○그 뒤로 여섯 달이 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천사 가브리엘을 갈릴리 지방의 나사렛 동네로 보내시어,
27 다윗의 가문에 속한 요셉이라는 남자와 약혼한 처녀에게 가게 하셨다.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였다.


이제 6달이 지나고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시작부터 앞에 나온 탄생이야기에 비해 초라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아비아조에 속한 제사장과 아론의 자손인 어머니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체제와 근접한 삶의 배경…


그에 비해 새롭게 시작되는 이야기의 시작엔 예루살렘도 성전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갈릴리 지방의 나사렛이라는 시골동네에 다윗 가문에 속한 요셉도 아닌 그와 약혼한 처녀가 이야기의 시작입니다.

28 천사가 안으로 들어가서,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기뻐하여라, 은혜를 입은 자야, 주님께서 그대와 함께 하신다.”


가브리엘 천사의 이런 인사를 듣고 마리아는 놀라고, 이 인사가 무슨 뜻일까 궁금히 여겼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함께 하신다’라는 말은 구약에서 소명을 받은 자들에게 주어지는 소명의 상징이었기 때문입니다.(삿6:12)


누가복음에는 ‘요셉의 고뇌’가 등장하지 않습니다. 마리아의 임신으로 인해서 고민하는 의로운 사람 요셉보다 그저
은혜를 입은 한 여자 아이에게 촛점이 집중됩니다. 여성의 존재자체가 무시되어지고 여자는 오직 결혼하여 아이를 낳음을 통해서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당시 사회(딤전 2:15)에서 이처럼 한 이야기의 촛점이 결혼도 하지 않은 여자아이에게 집중된다는 것은 이것을 읽는 독자들로 하여금 익숙하지 못한 뉘앙스를 만들어 냈을 것입니다. 반대로 이야기하면 결혼하지 않고 아이도 낳지 않은 마리아의 이야기는 이제 그녀에게 있을 사건들을 통해 구원받을 가치 없는 자의 구원 이야기로 전개될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31 보아라, 그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의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이 단락에서 역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은 많은 차이를 드러냅니다. 누가복음엔 구약 예언의 성취로서 ‘임마누엘’에 대한 언급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즉, 그는 죄 용서나 구약의 성취를 목적으로 이 세상에 오지 않습니다. 그는 더 높은 자의 아들,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입니다.(35절) 마태에서 예수의 경쟁자가 구약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는 모세였다면 누가에서 예수의 경쟁자는 당시에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리며 숭상되던 ‘시저’였습니다.

34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였다.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


똑같은 이해할 수 없는 수태고지에 반응하는 사가랴와 마리아의 언급이 국내 번역본에는 별 차이가 없이 번역되었지만 원문에서는 약간의 차이를 나타냅니다. 사가랴는 Κατα τι γνοσομαι τουτο라는 말로 되물었고 마리아는 Πως εσται τουτο라는 말로 되묻습니다. 이 두가지 헬라어가 어떤 어감을 가지고 있는지는 더 알아봐야 할 것 같지만 윤철원 교수님의 <누가복음 다시읽기>에서는 사가랴의 반응은 믿지 못함에서 나온 반면 마리아의 반응은 ‘방법적인 의문’이었다고 말합니다. 정확한 것은 누가가 이 두가지 반문 구조를 대조시키면서 두가지가 서로 다른 반응이었음을 말하고 싶어한다는 것입니다.

36 보아라, 그대의 친척 엘리사벳도 늙어서 임신하였다. 임신하지 못하는 여자라 불리던 그가 임신한 지 벌써 여섯 달이 되었다.


비로서 이 구절에 와서야 누가가 세례요한의 이야기를 앞에 주저리 주저리 써 놓았던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마리아의 물음에 가브리엘은 엘리사벳의 이야기를 증거로 듭니다. 늙어서 임신하지 못하는 여자라 불리던 여자의 임신은 아브라함과 사라이야기에서도 그랬듯이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신실하심이라는 이미지를 만들어냅니다. 세례요한은 뱃속에서부터, 즉, 그 삶의 시작에서부터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로써의 역할을 수행합니다. 절대 그는 메시야가 아니며 메시야의 길을 예비하는 자여야만 합니다.


38 마리아가 말하였다. “보십시오, 나는 주님의 여종입니다. 당신의 말씀대로 나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천사는 마리아에게서 떠나갔다.



사가랴는 의심으로 입이 막혔지만 마리아의 입에서는 하나님의 소명에 응답하는 말이 흘러나옵니다. 여기에 누가복음의 첫번째 뒤집기가 나옵니다. 하나님의 첫번째 계시는 ‘남자’에게 전달되고 모든 독자는 합당한 반응을 기대하지만 그 ‘남자’는 합당한 반응을 하지 못합니다. 반면 두번째 계시는 ‘여자’에게 전달되고 모든 독자는 합당하지 않은 반응을 예상하지만 그 ‘여자’는 믿음으로 소명에 반응합니다.

제사장이라는 직위를 가진 사가랴와 누구의 자손인지도 알려지지 않는 마리아, 하지만 모든 사람들의 기대와는 달리 메시야는 제사장에게서가 아닌 ‘여종’에게서 태어납니다. 누가는 이와 같은 반전을 이야기의 가장 처음에 배치함을 통해서 오실 메시야를 통해 이뤄질 하나님 나라의 시작을 표현합니다. 그 나라는 사람들의 기대와는 달리 당시 사람으로도 여겨지지 않던 ‘어린 여자’를 통해서 이룩되어지고 시작되어지는 나라입니다.

누가복음의 이야기에는 의로운 요셉의 고민도 없고 남자에게 주어지는 계시는 의심됩니다. 계시에 합당하다고 여겨지던 자로부터는 무시되고 합당치 않다고 여겨지던 자에게서는 성취됩니다. 누가가 전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이처럼 합당치 않은 자들을 통해서 또한 그들을 위해서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서 시작되고 완성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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