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네권의 복음서를 가졌는가?

All Photos-225요즘 인터넷을 보다 보면 온통 역사교과서 얘기뿐입니다. 여당과 정부가 국정화를 들고 나오면서 논란이 시작됐다. 뭐, 개인적인 생각으로 국정화를 할 수도 있고 검정화를 할 수도 있다고 본다. 어차피 우리나라가 자유발행제가 아닌 이상 교육부가 가이드라인을 주고 최종 발행 전에 개입하기 때문에 사실 행정상 그다지 큰 차이는 없다고 볼 수 있다. 지금 교과서가 좌편향이 됐네 어쨌네 하지만 사실 지금 문제가 되는 대부분은 단어 선택의 문제, 혹은 어떤 그림을 어떤 크기로 넣느냐, 이걸 본문에 넣을 것이냐 각주로 넣을 것이냐 정도의 문제이다. 지금 교육부는 2014년까지 썼던 교과서를 뭐라고 하는데, 설령 그것이 문제가 있었다해도 교육부가 제기하는 대부분의 문제들은 현재 교과서에서 대부분 수정되었다. 그들이 원하는대로 검정과정이 잘 이뤄졌다는 뜻이다. 이걸 두고 예전에 그런 교과서가 있었으니 국정화해야 한다는 주장은 지금 수정된 정도로는 만족을 못하겠다는 말로 밖에는 들리지 않는다. 즉, 그들이 제기하는 좌편향의 교정을 넘어 무언가 더 바라고 있다는 뜻이다.

국정교과서라고 다 나쁜 것은 아니다. 지금도 초등학교 역사 교과서는 국정교과서다. 그리고 학교에서 많이 채택을 안 해서 출판사가 경제적으로 감당하기 힘든 과목의 경우 국가가 발행하는 경우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게 국정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국정화를 하려는 전제, 이유, 목적이 정당하냐는 것이다. 정부는 이번 교과서 문제를 제기하면서 ‘올바른 역사’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나왔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이 사건의 본질이 정치적 이해관계의 문제를 넘어서는 문제라는 것을 잘 보여준다. 국정화 할 수 있다. 근데 그렇게 나온 역사는 과연 ‘올바른’ 역사인가? 이 부분을 생각해봐야 하는 것이다.

국정화 확정 발표가 나고 몇 일 후 연세대를 출발로 수많은 대학교수들과 역사학회에서 집필 거부에 동참하고 있다. 왜 역사학자들이 이렇게 국정화를 거부할까? 90%가 좌파라서? 아니다. ‘올바른’ 역사를 만들겠다는 그들의 의도가 ‘올바르지’ 않기 때문이다. 역사는 그런 식으로 ‘올바르게’ 만들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E.H 카가 역사를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고 할 때 이 말의 의미는 역사를 해석하는 행위가 그 자체로 절대 객관적일 수 없다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해석도 스스로 ‘올바를’ 수 없으며 오직 다양한 관점의 대화를 통해서만 그 객관성을 보장받을 수 있는 것이 역사이다.

그런데 역사교과서에 대한 이런 논쟁은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을 어떻게 이해하고 바라봐야 하는지를 생각해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해준다. 왜냐하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도 과거의 기록이기 때문에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은 곧 성경을 바라보는 관점과도 연결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은 역사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아니, 교회는 역사를 어떻게 이해해왔을까? 몇 일 전 장신대에 ‘복음서도 네개나 있는데…’라는 내용의 플래카드가 걸렸다. 복음서의 다양성을 예로들어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비꼰 것이다. 그렇다면 조금 다르게 물어보자. 우리는 왜 네권의 복음서를 가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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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개의 복음서, 즉 우리 성경은 예수님에 대한 네 개의 역사기록을 보전하고 있고, 우리는 이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이 네권을 우리의 성경으로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이게 그렇게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마치 이 네 개의 복음서가 다 똑같은 이야기인 것처럼 알고 자란다. 그래서 크리스마스 연극을 하면 동방박사와 양치기가 함께 등장한다. 그런데 동방박사는 마태복음에만 나오고 양치기는 누가복음에만 나온다. 다른 이야기는 어떨까? 산상수훈에서 마태복음은 8가지 복에 대해서 이야기하지만 누가복음은 4개의 복과 4개의 저주를 이야기한다. 게다가 누가는 산도 아니고 평지에서 이 이야기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마태복음이나 마가복음은 제자들에게 갈릴리로 가라고 하지만 누가복음은 예루살렘에 머물라고 한다.

마태, 마가, 누가 이 세복음서의 닮은 듯 다른 내용을 다루는 학문 분야를 ‘공관복음 문제’라고 한다. 같은 자료를 사용함에도 세권의 복음서가 서로 차이를 보이는 이유나 양상을 다루는 학문분야이다. 학자들이 사용하는 방법론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이 분야에서 공통적으로 인정하는 것은 공관복음이라고 불리는 세권의 복음서가 서로 상당히 다르다는 것이다. 마태, 마가, 누가복음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요한복음의 기록들은 다른 복음서들과 거의 다른 인물처럼 예수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학자들은 요한 복음의 저자가 다른 복음서를 모른 채 다른 자료를 사용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처럼 네 권의 복음서는 서로 굉장히 다른 입장에서 예수님의 이야기를 써내려 가고 있다. 그럼 우리는 이 복음서를 어떻게 읽어야 할까? 국론을 분열시키니 그냥 국정화 해버릴까?

한 종교가 동일한 사건에 대한 네 개의 역사기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일반적인 것도 아니고 익숙한 것도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네 권의 복음서에 대한 거부는 교회역사에서 굉장히 초기라고 할 수 있는 2세기 초반부터 있어왔다.

그 첫번째 시도는 네 권의 복음서 중에 한 권만 인정하려는 움직임이었다. 가장 좋은 예로 스스로 바울의 제자라고 칭하던 마르시온(85-160)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바울의 제자답게 유대적인 것을 굉장히 싫어했다. 그래서 이 사람은 구약을 거부했다. 구약의 하나님과 예수님의 아버지인 하나님은 서로 다른 하나님일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복음서 중에서도 유대적인 색깔이 들어간 것 같은 복음서들은 모두 받아들이지 않고 누가복음과 몇 권의 바울 서신들만 진정한 성경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마르시온의 이런 생각들은 나중에 기독교 영지주의의 핵심사상으로 발전한다.

All Photos-227또 다른 시도는 네 권의 복음서를 아예 하나로 만들어버리려는 움직임이었다. 타티안(110-180)이라는 사람은 네 권의 복음서를 마치 하나의 이야기인 것처럼 엮어서 한 권의 책으로 만들었다. 이 책을 디아테사론이라고 하는데,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이어지도록 본래 본문을 조금 수정했고 처음 만들어진 후 꽤 오랫동안 사람들에게 읽혀졌다.

그렇다면 왜 이런 시도들이 나타날까? 앞에서도 말했듯 네 개의 서로 다른 역사를 읽고 이해한다는 것이 굉장히 부자연스럽고 불편한 일이기 때문이다. 복음서의 서로 다른 증언들은 때로는 어떤 것이 맞는 것인지 몰라 우리의 신앙을 불안하게 만드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네 개 중에 하나가 진짜면 나머지는 거짓말이라는 건가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런데 하나만 있다면, 편해진다. 고민하거나 갈등할 필요가 없다. 왜, 성경의 이야기가 서로 다르지? 근심할 필요가 없다. 네 권 배울 것을 한 권에 끝내버리니 효율적이기까지 하다. 다양성의 거부는 불안에 대한 인간의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하지만 왜인지, 교회는 오랜 세월을 지나오면서 네 권의 복음서를 지켜왔다. 도대체 왜 그랬을까? 여기에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할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이 있다.

All Photos-2282세기의 교부 이레니우스(130?-202)는 네 권의 복음서를 우리 신앙의 기준으로 내세우면서 앞에서 이야기했던 두 가지 시도를 거부한다. 계시록 4장 7절에 나오는 네가지 생물에 관한 내용은 이레니우스가 네 권의 복음서가 존재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면서 사용한 것이다. 이레니우스는 네 권의 복음서를 계시록의 네 가지 생물로 비유하면서 각 복음서가 그리스도의 네 가지 모습을 보여준다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한 권만으로는 온전히 그리스도를 알 수 없고 네 가지 모습을 함께 살펴야만 그리스도를 온전히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후 교회는 이레니우스의 해석을 받아들여 예수님을 묘사하는 각 복음서의 특징을 네가지 짐승의 모습과 연결시켰다.

이런 해석에 따르면 마태가 만났던 예수님은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다. 지혜로운 선생님 같은 분이셨던 예수님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던 마태는 예수님을 새로운 율법을 가르치시는 모세 같은 분으로 묘사한다. 하지만 동시에 다른 누군가의 기억 속에 예수님은 사자와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왕으로 오시는 하나님의 메시야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가복음은 새로운 왕의 탄생을 알릴 때 쓰이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는 선언문의 형태로 자신의 복음서를 열고 있다. 누가가 기억하는 예수님은 하나님의 참 선지자였다. 소처럼 우직하게 희생의 장소인 예루살렘을 향해 걸어가는 분이다. 그래서 누가복음의 예수님은 죽음 앞에서도 의연하다. 그리고 요한에게 다가오신 예수님은 가장 높은 곳에서 하늘을 바라보며 날아가는 독수리 같은 분이다. 그래서 요한은 예수님은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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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같은 예수님을 만났지만 그들이 기억하는 예수님의 모습은 서로 다르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통해서 드러난 하나님의 구원 사역은 하나의 관점만으로 이해될 수 없는 전 우주적이고 전인적인 사건이기 때문이다. 유대라는 특수한 문화 속에서 쓰인 마태복음만으로 설명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세계사적 의미에서 예수님의 사건을 다루려 노력하는 누가복음만으로도 설명되지 않는다. 영적인 의미가 가득 담긴 요한복음만으로 이해하려 해서도 안되고 인간적 감정 표현들이 듬뿍 담긴 마가복음만으로도 불충분하다. 이처럼 서로 보완적인 네 가지 관점의 공존이 의미하는 것은 하나의 관점으로는 온전한 실체를 파악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네권의 복음서를 보전하는 이유는 다양한 복음서의 증거를 통해 복음서 저자 개인이나 특정 공동체의 상황이나 경험, 관점에 복음이 독점 당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아마도 이런 선택은 정경화 당시의 다양한 집단의 권력다툼이라는 정치적인 환경이 고려된 결정이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네권의 복음서를 선택하는 교회의 역사는 동시에 다양한 복음서들 즉, 다양한 기억과 신앙의 거부와 통제라는 측면을 포함하고 있다. 정경화의 과정이 또다른 권력 통제의 과정이었음을 기억하는 것은 역사를 바라볼 때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바로 모든 역사에는 명과 암이 함께 존재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거부와 통제의 과정 속에서도 네권의 복음서의 다양성을 보전했다는 것은 분명한 의미를 가진다.) 성경 속에서 하나님의 아들은 네 권의 복음서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을 형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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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서신서들은 어떨까? 우리는 역사를 단선적으로 배우다 보니 성경을 읽을 때도 인물이나 사건 중심으로 보는 것에 너무 익숙해져 있다. 그래서 역사는 긴 선위에서 단선적으로 일어나는 역사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렇게 서신서도 바울이나 어떤 인물의 개인사 속에 있는 일렬로 연결된 단편적인 이야기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실제 역사는 그렇지가 않다. 역사는 동시다발적이고 복합적이면서 동시에 상호 연결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서신서를 인물 개인의 이야기로 파악할 경우 그 핵심을 놓칠 수 있다.

이런 탈 개인적 관점을 이해하기 위해서 로마서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은 좋은 시도이다. 우리는 로마서를 바울의 신학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 주로 사용한다. 수많은 기독교 신학이 여기서 탄생할만큼 바울 사상의 정수라고 불리는 책이다. 하지만 우리는 바울이 그렇게 자신의 모든 것을 차근차근 정리하면서 로마서를 써야할만큼 조심스러웠던 이유에 대해서는 잘 생각하지 않는다. 로마서에서 바울은 자신이 한번도 방문해보지 못한 교회를 향해 쓴 편지를 쓰고 있다. 나중에 바울이 로마에 가서 죽었다고 전해지지만 로마서는 그것보다 훨씬 이전에 쓰여진 편지이다. 로마 교회는 바울이 새운 교회가 아니다. 그렇다면 이 교회는 누가 세웠을까?

우리가 예수님 부활 후에 역사는 그것밖에 없는 것처럼 여기는 사도행전도 로마교회의 기원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즉, 사도행전이 미처 다 담아내지 못한 하나님의 역사가 로마라는 도시 한 가운데서 이미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그 역사의 일부 혹은 그 역사의 흔적을 남겨 놓은 것입니다. 이처럼 서신서 역시 바울과 사도들 혹은 그 제자들을 통해 전파된 복음이 역사 속에서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각 지역의 상황 속에서 바라본 동시다발적이고 복합적인 역사 기록이다. 그렇기 때문에 서신서는 개인이 하나님의 백성에서 시작해 교회를 거쳐 하나님의 나라로 이어지는 사건에 대한 다양한 관점의 공존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이 말은 서신서들이 바울 같은 개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에 관한 책이라는 뜻이다.

역사를 대하는 이런 자세는 구약에도 나타난다. 구약에는 이스라엘 역사에 대한 두 가지 서술이 함께 담겨 있다. 바로 사무엘상하와 열왕기상하로 이어지는 신명기 역사서와 역대기상하로 이루어진 역사서이다. 첫번째 역사서는 바벨론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이 왜 자신들이 멸망할 수 밖에 없었는가를 반성하는 역사관을 가지고 저술된 반면 두번째 역사서는 포로 귀환 이후 이스라엘의 회복을 기대하는 역사관 속에서 기록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두 역사서가 다루고 있는 다윗왕조의 이미지는 굉장히 다르다. 이처럼 두 역사서는 서로 강조점과 지향점을 달리 하는 역사서이지만 성경은 이 두 가지를 함께 품고 있다. 왜냐하면 둘 중에 하나가 옳은 것이 아니라 이 두 가지 역사를 모두 살펴보아야 이스라엘 역사 속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성경이 하나의 역사서술을 선택하지 않는 이유는 그 역사의 주인공이 사람이나 민족, 지역의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드러내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나 시대와 상황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여지더라도 그 안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이 성경의 주제이자 중심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나아가 이것은 교회의 역사뿐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의 역사에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하나님을 역사의 주관자라고 고백할 때, 그 의미는 사람에 의해서 ‘올바르다’ 규정되는 역사를 거부하고 하나님 앞에 모든 역사는 상대적인 역사일 수 밖에 없음을 선언하는 행위를 포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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