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래하는 하나님 나라와 행위 구원

LGBT이런 가정을 해보자. 만약 어느 날 갑자기 세상이 뒤집혀서 한국 땅에 새로운 국가가 탄생했고, 그 나라는 동성애자를 평등하게 대하는 것이 헌법의 첫번째 원칙인 나라라고 생각해보자. 그렇다면 그 나라의 건국은 그 자체로 동성애자들에게는 기쁜 소식이다. 그들이 착한 사람이건 나쁜 사람이건 관계없다. 동성애자라는 그들의 존재만으로 그 나라는 그들에게 은혜이고 생명이다. 왜냐하면 그 나라가 그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은 어떨까? 동성애를 거부하는 사람에게도 그 나라가 은혜로 여겨질까? 그렇지 않다. 아마 동성애를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그 나라는 지옥이며 심판과 같을 것이다. 그것은 그들의 삶의 결과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마치 재난처럼 그들에게 닥쳐 온 현실이다.

이런 나라가 온다면 아마 많은 이들이 이 나라를 거부할 것이다. 범법자가 되거나 다른 나라로 망명하는 것도 방법이다. 그렇다면 존재로써 그 나라에 속하지 못하는 이들, 평소에 동성애에 대해서 별다른 생각이 없었던 이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착하게 살면 되는 것일까? 아무리 착하게 산다해도 동성애자를 차별한다면 그 사회 속에서 그는 범법자가 될 것이다. 그들이 그 나라에서 살 수 있는 방법은 착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나라의 가치와 법을 준수하는 사람, 즉 국민이 되는 것이다.

us immigration우리가 미국 시민권을 획득하려 할 때도, 그 사람들은 우리가 얼마나 착한 사람인지를 조사하지 않는다. 물론 범죄 경력이 있는지 살펴보겠지만 그것은 그 사람의 인성을 판단하기 위함이 아니라 미국이라는 나라의 법과 질서, 존재 목적과 가치를 존중하는지를 판단하기 위함이다. 즉, 함께 살 준비가 된 사람인지를 판단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이런 것을 물어볼 것이다. “영어는 할 줄 아십니까?”, “만약 한국과 미국이 전쟁을 한다면 당신은 미국을 위해서 싸우겠습니까?” 이것은 그 사람이 착한 사람인지 아닌지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예수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도 이와 같은 것이다. 그 나라는 내가 착하게 사느냐 마느냐에 따라서 손 안에 있다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재난처럼 우리의 외부로부터 닥쳐오는 나라이다. 우리가 만들어 낼 수도 없고 우리의 선함과 각종 자랑으로 얻어낼 수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 나라는 은혜이다. 특히나 그 나라의 가치를 존재 자체로 구현하는 이들에게는 이 나라의 도래는 그 자체로 은혜이다. 예수는 가난한 자, 우는 자, 굶주린 자, 미움받는 자가 복된 세상을 선포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선함과 관계없이 그들의 존재만으로 이 나라의 선포는 복음이고 은혜이다. 하지만 부한 자, 웃는 자, 배부른 자, 칭찬받는 자들은 그들의 선함과 관계없이 그들의 존재만으로 그 나라는 그들에게 심판이고 지옥이다. 이런 자들을 누가는 은혜를 모르는 자라고 말하며 바울은 하나님이 이들을 죄 가운데 내어버려 두신다고 말한다(물론 하나님은 이런 자들에게도 인자하시다). 존재만으로 그 나라에 참여하는 자가 아닌 이들, 즉, 복과 화 사이, 지금과 그날 사이를 사는 이들이 이 나라에 살기 위해서는 이 뒤집힌 나라의 가치를 존중한다는 사실을 스스로 증명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행위는 그 나라의 도래가 그들에게 은혜가 될 지 심판이 될 지를 결정하는 조건이 된다.

여기까지 들으면 이런 생각이 들 것이다. ‘어차피 구원에 어떤 조건이 필요하다는 것이 아닌가?’, ‘이것이 착하게 살면 구원을 얻는다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일반적으로 행위 구원에 대해 걱정하는 이들은 마치 인간의 행위가 은혜를 무효화시키는 것처럼 말한다. 인간이 착하게 살면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구원을 줘야할 것 같은 압박이라도 느끼시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은 믿음과 행위를 구원으로 가기 위해 자신이 소유한 서로 다른 방향의 기차표처럼 여기기 때문이다. 하나는 옳은 방향의 표이고 다른 하나는 잘못된 방향의 표이다. 그렇기 때문에 행위가 필요하다고 말하면 은혜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은혜는 공짜요, 공짜로 주는데 다른 조건은 필요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종종 믿음을 은혜의 또 다른 조건처럼 여기곤 한다. 믿음이 없으면 그것은 율법이요, 행위가 된다. 은혜의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한다. 그러므로 은혜란 ‘행위없음’이라는 조건을 필요로 하게 되고, 그 결과 행위를 등한시 하는 믿음을 생산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구원이 행위와 노력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이들에게 행위는 은혜를 무효화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선한 일을 했어도 구원을 얻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기에 은혜이다. 우리가 아무리 선행을 한다고 해도 그것 때문에 미국이 우리에게 시민권을 줘야할 의무를 갖게 되는 것이 아니다.

카리스그렇다면 우리는 은혜의 어떤 지점을 오해하고 있는가? 종교개혁자 루터의 틀에 과도하게 갇히면 은혜를 끊임없이 개인의 문제로 한정시키기 쉽다. 그러니 바울이 은혜를 말하는 것은 모든 행위의 거부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성경에서 은혜는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열심 자체를 의미한다. 하나님의 은혜는 ‘뒤집힌 세상’이 올 것이고 하나님이 반드시 그렇게 하시리라는 약속과 신실하심이다. 하나님은 반드시 자신의 약속을 지키실 것이다.

새로운 세상을 당연한 것으로 여길 때 우리는 마치 착하게 살면 구원받는다는 말은 은혜가 아니라고 착각하게 된다. 하지만 착하게 살든 나쁘게 살든 주어지는 것은 은혜이다. 은혜는 조건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도래하는 것이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착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주어질 ‘뒤집힌 세상’에 함께 살기 위해 자신을 증명하는 것이다. 문제는 내가 이것을 행함으로 얻느냐 은혜로 얻느냐가 아니라 내가 은혜로 주어진 나라에 살 것이냐 아니면 그것을 거부하고 도망갈 것이냐의 문제이다.

1 Comment

  1.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
    읽으며 생각해 본 바로는…
    은혜의 대치 개념으로 여기는 여러 것들에 대한 단순 도식이 오늘날 우리 신앙의 자화상을 형성한 것 같습니다.
    “믿음”(지적 동의/추상적..) 이라는 우리말 단어와 ‘신실함'(행위가 동반된/지속적 성격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오해가 우리나라에 깊은것 같습니다. 그렇게 볼 때, ‘믿음’의 반대는 ‘행위’가 아니라 ‘행하지 않음’으로 이해한다면 우리 신앙이 더욱 아름다운 모습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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