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읽기 서론

john1_1Vati교회 리더들과 요한복음을 읽기로 했습니다. 처음 시작하면서 서론처럼 썼던 글을 공유합니다. 최근에 구전전승에 대한 연구들이 주목을 받고 있지만 사실 ‘고백’이라는 개념은 비평학과 신앙을 연결시킬 수 있는 꽤 괜찮은 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저자나 편집자의 의도를 신앙과 분리시키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담긴 그들의 신앙을 재탐색하는 것이 비평학에 대한 가장 올바른 접근 지점일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구전전승과 기억, 그리고 증언의 개념을 이번 요한복음 읽기에도 붙잡고 가볼 생각입니다.^^
청년 리더들을 중심으로 한 읽기 프로그램이라 최대한 쉽게 쓰려고 노력했는데 잘 안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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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은 요한복음 전체를 열어주는 첫번째 말씀이다. 요한이 ‘태초에’라는 말을 처음 쓴 것은 창세기 1장 1절이 말씀을 떠올리기에 충분하다. 그렇기 때문에 학계에서도 요한복음과 구약의 연결고리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굉장히 많다. 하지만 요한복음의 서언과 창세기 1장의 말씀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으면서 동시에 차이점도 가지고 있다. 창세계의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말씀이 있었다고 말하지 않고 하나님이 말씀하셨다고 되어있다. 이것은 헬라어 구약성경인 70인 역에서도 동일하다. 구약에서 말씀이라는 존재는 ‘있었던’ 존재가 아니다.

그렇다면 요한은 왜 ‘하나님이 말씀하셨다’고 되어 있는 창세기의 태초 이야기를 ‘말씀이 있었다’고 바꾸고 있는가?

물론 여기서 요한이 말씀(로고스)를 하나님과 구분하는 이유는 예수의 본성에 대해서 설명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요한의 이런 시도는 짐짓 위험할 수 있었다. 첫째로, 예수와 하나님의 존재를 구분된 독립적 존재로 이해시킬 위험이 있다. 요한의 로고스론은 하나님은 한분 뿐이라고 믿었던 유대인들에게는 다신론처럼 들렸을 것이다. 둘째로 하나님을 창조세계로부터 배제할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창조는 로고스가 하기 때문이다. 창조되는 것은 로고스 안에서 창조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신론(신이 세계를 창조하였지만 그 후에는 동떨어져서 관여하지 않는다)이나 영지주의(세계를 창조한 신은 악한 신이다)등으로 발전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할 수 있다.

실제 헬라어에서 로고스는 단순한 ‘말씀’이라기보다는 독립된 신과 같은 존재였다. 오늘날 우리의 사고와 헬라적 사고의 차이점. 오늘 우리는 하늘과 땅이 이마~~~~ㄴ큼 떨어져 있고 그 사이는 비어있다고 공기가 채워져 있다고 하지만 그건 볼 수도 없고… 심지어 우리는 하늘 위에 그보다 더 큰 공간(우주)가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그림이 사영리에 나타나 있는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거리를 나타내주는 그림이다. 그 그림 속에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간극은 넘어갈 수 없는 빈공간으로 그려진다. 하지만 헬라 세계에서 하나님(데오스)와 세계(코스모스) 사이는 비어있는 공간이 아니다. 그 사이에는 수많은 어떤 존재들로 채워져 있고 각 존재들은 각자의 층위를 갖는다. 어떤 존재는 데오스로부터 가깝고 다른 존재는 데오스로부터 멀다. 로고스는 바로 이런 층위 가운데 데오스에 가장 가까이 있으면서 신과 인간의 세계를 중계하는 역할을 하는 존재이다.

그렇다면 요한은 왜 이런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로고스’라는 단어를 썼을까?

예수전도단 있을 때 추천받았던 책 가운데 ‘화해아이’라는 책이 있다. 내 기억이 맞다면 한 선교사가 아프리카 원시부족에 복음을 전하면서 경험한 이야기를 다룬 책이다. 강을 사이에 두고 사는 ‘뚜안족’과 ‘사위족’이 있었다. 그 부족이 화해하는 방법이 독특하다. 한 부족의 추장이 아이를 낳아 100일경이 되면 원수 부족의 추장에게 보낸다. 그러면 반대편 부족의 추장은 그 아이를 정성껏 키운다. 만약 아이를 맡긴 부족이 전쟁을 일으키면 추장의 아이가 제일 먼저 죽게 되니 전쟁을 일으키지 않는다. 한편 반대편 부족의 추장은 아이를 키운 정이 있어 모든 원수들 중에 이 아이만은 신뢰한다. 그래서 문제가 생기면 이 아이를 중재자로 세워 모든 문제들을 해결한다. 아이가 있는 동안에는 이 두 부족 간에 평화가 있다. 이 아이를 ‘화해아이’라고 부른다. 이 책의 저자는 이 아이를 예수 그리스도의 예로 들면서 설명하며 모든 민족가운데 예수님의 흔적이 있다고 말한다. 그 사회의 문화를 통해 그리스도교의 진리를 설명하는 것. 바로 이런 행위를 토착화라고 한다. 서로 다른 두개의 문화를 연결시키고 이해의 틀을 제공하는 것이 토착화의 목적이다.

물론 이런 토착화에는 큰 위험성이 존재한다. 언어라는 것이 단순히 단어 뜻만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거시기’라는 말을 쓸 때 조건은 거시기가 무슨 뜻이냐가 아니라 듣는 사람과 말하는 사람이 동일한 문화 속에서 이 단어의 의미를 공유하고 있는가하는 것이다. 타지 사람이 거시기를 이해못하는 것은 그 뜻을 몰라서가 아니라 그들이 살아온 환경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처럼 언어에는 그 삶이 담겨있다. 그렇기 때문에 한 언어을 다른 언어로 번역한다는 것은 단순히 단어에서 단어로 옮기는 것이 아니라 한 문화를 다른 문화로 번역하는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번역에는 언제나 오해의 위험성이 있다. 이런 문제 때문에 카톨릭 같은 경우 2차 바티칸 공의회 때까지 자국어로 예배를 드리는 것을 금지했다. 즉,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 시절 성당에서는 사제가 라틴어로 설교를 했고 찬송도 라틴어로 불렀다. 그러면 무슨 문제가 있었을까? 못알아 들었다. 마틴루터가 처음 독일어로 된 성경을 번역하기 전까지 독일의 성도들은 라틴어 성경을 읽어야 했다. 토착화란 이런 오해의 경계선 위를 걷는 작업이고 선교사님들이 선교지에서 맞이하는 문제들도 이런 문제들이다. 예배에서 국악을 사용해도 되는가? 영어 God을 천주라고 번역하는 것이 옳은가? 하나님과 하느님 논쟁은 많은 사람들이 알지만 한국 기독교 초기 선교사들은 God을 천주 혹은 상제로 번역했다는 사실은 거의 모른다. 이처럼 선교사들은 오해의 위험성을 감수하면서 끊임없이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복음을 번역하려고 노력한다. 요한도 바로 이처럼 두가지 문화 사이에 섰던 사람이다. 그는 유대교 문화 속에서 벌어진 예수님의 사건을 헬라 세계 속으로 전하려 노력했고 그 접촉점으로 헬라의 ‘로고스’를 선택했다. 요한의 복음서 속에는 이 같은 요한의 고민과 해석, 그리고 그 번역이 가질 수 밖에 없는 한계도 존재한다. 초기 이단인 영지주의자들이 요한복음을 선호했던 역사는 요한복음이 선택한 번역이 가질 수 있는 한계가 무엇인지 잘 보여준다.

여기서 우리는 고민을 해봐야 한다. 우리는 요한복음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해해야 하는가? 아니면 요한이 상황 속에서 해석한 하나의 해석이 담긴 문서로 이해해야 하는가? 우리는 무엇을 기대하며 이 복음서를 읽어야 하는가? 보수주의적인 기독교에서는 당시의 상황이나 환경 저자의 문화적 한계등은 무시한 채 단순하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해하고 믿어야 한다고 말한다. 반면 진보적인 기독교에서는 이런 책을 하나의 문서로 이해하며 거기에서 신앙적인 진리보다는 다른 종교와 같은 하나의 종교적 현상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이런 양자택일의 문제는 언어에 담긴 의미를 단면적으로 이해하는 오해에서 발생한다. 즉, 언어에는 하나의 의미만 있으며 만약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그 사회적 환경은 배제되어야 한다는 잘못된 믿음이다. 하지만 종교개혁자 루터는 성경 말씀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 적어도 4가지 의미를 고려해야 한다고 말한다. 뿐만 아니라 현대의 언어학 역시 언어 속에 담겨있는 의미의 다양성과 다중성에 대해서 말한다. 언어의 의미는 확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문맥과 환경에 의해서 결정된다. 즉,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요한복음과 사회적 환경 속에서 해석된 요한의 의견 가운데 하나를 선택할 필요가 없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 여기서 육신은 우리의 살껍데기를 의미한다. 이것은 단순히 예수가 인간이 되었다는 것을 넘어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의 현실 속으로 들어왔음을 의미한다. 이 고백 속에서 우리는 현실로 내려와서 우리를 만나시는 하나님의 말씀의 특성을 이해할 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이면서 동시에 현실적(상황적)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그 접촉점은 어디인가? 우리는 성경 속에서 2,000년 전 살았던 예수님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만날 수 없다. 복음서끼리 전하고 있는 예수님의 모습이 다른 것처럼 2,000년 전 살았던 예수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변형되고 왜곡되었다. 실제 예수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100% 그대로 복원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불가능하다. 우리가 복음서 속에서 만난 예수는 예수를 만났던 사람들이 기억을 통해서 전해준 ‘기억된 예수’이다. 앞서 말했듯 요한복음의 저자는 유대교 문화 속에서 일어났던 예수님의 이야기를 헬라문화 속으로 전하려 했고 그 접촉점으로 ‘로고스’를 선택했다. 그렇기 때문에 요한복음 안에는 유대적 배경 속에서 경험했던 예수 사건을 헬라문화 가운데 전하려 했던 요한의 신앙과 사명이 담겨있다. 그는 자신이 만나고 경험했던 예수를 전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 기억과 신앙 고백 속에서 예수를 만난다. 즉, 우리가 요한복음을 통해서 읽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전에 요한의 신앙 고백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기억은 많은 부분 불분명하다. 하지만 그것은 그가 경험한 예수에 관한 증언이기에 하나님의 말씀이다. 기독교는 하나님을 만난 이들의 고백을 통해 전해지며 하나님은 죽은 문자가 아니라 살아있는 증거를 통하여 우리 가운데 역사하신다. 우리가 믿는 기독교는 바로 이런 고백 위에 세워진 종교이다.

우리는 요한복음을 통해서 다문화적 사회 속에서 서로 다른 문화를 연결시키기 위해 그 속에서 고민하고 갈등했던 선교사 요한의 신앙고백과 그 고백을 통해 또 다른 증인으로 태어날 요한의 공동체를 만나야 할 것이다.

2 Comments

  1. 문화안에서의 상황화…적실성있는 상황화를 말하지만 그 한계가 늘 분명치는 않습니다. 요한복음을 요한에 입장에서 선교적인 관점으로 다시 바라보게 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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