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도 법 좀 지키시지…

바리새파 사람들 가운데 더러는 말하기를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것으로 보아서, 그는 하나님에게서 온 사람이 아니오” 하였고, 더러는 “죄가 있는 사람이 어떻게 그러한 표징을 행할 수 있겠소?” 하고 말하였다. 그래서 그들 사이에 의견이 갈라졌다. 그들은 눈멀었던 사람에게 다시 물었다. “그가 당신의 눈을 뜨게 하였는데, 당신은 그를 어떻게 생각하오?” 그가 대답하였다. “그분은 예언자입니다.”
(요한복음서 9:16-17 새번역)

john-9예수님은 길을 가다가 눈먼 자를 보시고 그의 눈을 치료하신다. 그런데 그 날이 마침 안식일이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예수님은 안식일을 지키지 않았다는 비난을 받는다. 뭐 이런 일이 전에 없었던 것도 아니고… 예수님은 상습범이다. 어찌보면 바리새인들의 문제 제기는 합당해보인다. 과연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이 하나님이 주신 법도 지키지 않으면서 일하겠는가? 예수님이시라면 율법을 지키면서 충분히 진리를 말할 수 있지 않았을까? 눈먼 환자가 당장 위급한 환자도 아니고 굳이 안식일에 그를 고치셔야 했을까? 왜 굳이 안식일에 사람을 고쳐서 이런 분란을 만드실까? 쓰다보니 이런 말들이 왠지 낯설지 않다.

“왜 굳이 길거리로 나와서 시끄럽게 떠들면서 시위를 해야 돼? 경찰이 정해준 곳에서 조용히 하면 되잖아?”
“왜 교회법을 어기면서 그런 일을 하는거야? 하고 싶은 게 있어도 일단 법은 지키면서 해야지.”

맞는 말 같다. 주장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법이 보장하는 테두리 안에서 하는 것이 사람들이 보기에 더 좋아보일 것이다. 옳지 못한 것이 있다면 그 조직 내에 적법한 절차에 따라 개혁해 나간다면 얼마나 은혜가 될까. 그런데 예수님은 왜 그러셨을까? 예수님도 법 좀 지키시지…

얼마 전 개인적으로 아는 목사님이 교회 자체적으로 목사안수를 시행해 SNS 상에 논란이 됐다. 목사는 직업이 아니라 교회의 직분이라는 확신에 기초해 공동체의 논의를 통해 목사를 세우기로 한 것이다. 이 목사님과 교회는 장로교단에 소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사실 이런 목사안수는 교회법을 어기는 것이었다. 그 목사님은 처음부터 그 사실을 알고 있었고 상황에 따라 교단에서 쫓겨날 수 있다는 것을 각오하고 있었다. 뭐 당연하게도 이 사건이 있은 후 그분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생겨났고 그들의 논리는 이런 것이다.

“그 행위는 장로교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것이다.”
“하나님의 교회의 공교회성을 훼손했다.”
“장로교에 소속된 이상 그 법을 지키면서 개혁의 노력을 해야 한다.”
“교단을 탈퇴하고 나서 하면 될 것을 굳이 그 안에서 해서 분란을 일으켜야 하나?”

예수님도 안식일을 어기는 행동을 하시기 전에 먼저 유대교의 제도를 개혁하려는 노력을 해보시는 것이 어땠을까? 충분히 노력도 안해보고 너무 쉽게 법을 무시하신 것은 아닐까? 예언자와 선지자들이 와서 끊임없이 말해도 안들었다고 말하지 말고, 자신이 다시 해보셨으면 좋았을텐데… 아니면 유대교에서 나와서 그런 일들을 하셨다면 바리새인들에게 그런 비판은 듣지 않으셔도 됐을텐데… 굳이 예루살렘 한복판에서 그러시는 이유는… 꼬장인가? 아니면 자기만 옳다고 믿는 독선인가?

앞에서도 말했듯 예수의 범법행위는 9장의 사건이 처음이 아니다. 5장에서도 예수는 안식일에 중풍병자를 고치는 일을 했고 당연하게 유대인들의 비판을 받았다. 중풍병자 역시 응급환자가 아니었고 안식일이 지나서 고칠 수 있었다. 내일 고친다고 예수님의 힐링 마나가 부족해서 못고치거나 하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는 것이 범법행위라는 바리새인들의 지적에 예수의 대답은 “아버지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5:17)”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환자들을 고쳐주는 일이 안식일법에 맞는지를 판단하지 않고 눈 앞에 있는 ‘사람’을 보셨다. 그 일이 어떤 결과와 반항을 불러올지 아마 스스로 너무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흔히 법을 지키는 것이 정의로운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가 살다보면 생각보다 자주 법 밖에 있는 정의를 만나게 된다. 법이 권력의 종 노릇을 할 때, 그 법으로 인해 약자를 향한 폭력이 합법화 될 때, 법이 불의를 정의로 둔갑시킬 때, 우리는 법 밖에 서서 떨고 있는 정의를 만난다. 그리고 그 정의는 합법적으로 살해된 예수의 십자가를 통해 우리에게 법의 불의함을 드러낸다.

예수의 유죄 판결은 (율)법의 관점에서 볼 때 잘못된 것이 아니며, 그의 처형 또한 합법성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잘못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율)법의 관점에서 유죄 판결과 처형은 옳은 것이었다. 그렇다면 (율)법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귀결이 따르게 된다. (율)법은 합법적이지만 불의하며, 정의와 충돌하거나 또는 근본적으로 대립하는 위치에 선다.
데리다를 읽는다/바울을 생각한다. 中에서

법은 우리를 외부의 위험으로부터 보호하지만 동시에 우리가 그 법 밖에 있는 것을 보지 못하도록 우리의 눈을 향해 칼을 겨눈다. 누군가 이 경계를 넘으려 할 때, 법은 마치 자신이 정의 자체인 것처럼 우리의 삶을 위협한다. 그리고 그것은 ‘합법적’이라는 이유로 내가 정의로운지의 여부와 관계없이 나를 ‘불법적’인 사람으로 만든다. 본질적으로 법이라는 것은 인간의 역사적/사회적 상황과 필요에 의해서 약속되어진 하나의 가상적 구성체일 뿐이다. 하지만 현실에서 다가오는 법의 위협은 마치 이것이 태초부터 존재해 왔고 그 창조자인 인간의 주인인 것처럼 행세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법의 위협 맞서 정의를 말하는 사람은 언제나 불법의 사람이 되는 것을 각오해야 한다.

나는 이런 두려움에 맞서 경계를 넘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의 부르심이라 믿는다. 바울의 이방인 선교가 그러했고 죄인의 친구였던 예수님의 삶이 그러했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사랑하기 어려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해선 안되는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 경계를 넘는 것이다. 기독교가 법의 종교가 아니라 은혜의 종교인 이유는 그 진리가 드러나는 현장이 언제나 법 밖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도무지 사랑받을 수 없는 죄인을 향해 손을 내미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불법적 행위가 우리를 살리는 생명인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고백은 바로 이 은혜의 고백이다.

중요한 것은 법을 지키느냐 그렇지 않으냐가 아니다. 그보다 우리 앞에 처해진 현실이 무엇이고 그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를 만나고 고백하는가하는 것이다. 세상은 법의 테두리 안에서 왈가왈부 떠드는 말들에 의해 바뀌는 것이 아니라 경계를 넘어서는 용기들이 모였을 때 비로소 바뀌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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