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 6:20-26] 팔복? 우리가 잃어버린 축복과 저주 (2)

앞에서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1편 읽기

luke

‘지금’을 사는 이들

그렇다면 예수가 저주하는 자들은 누구인가? 앞으로 전개되는 이야기 속에서 이 저주의 대상은 더 분명해질테지만, 이쯤에서 미리 엿보는 것이 이야기의 방향을 이해하는 데 조금 더 도움이 될 것이다. 이야기는 훌쩍 뛰어넘어 11장으로 넘어간다. 도대체 선지자들을 죽인 그들은 누구인가?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는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을 기뻐하는도다
화 있을진저 너희여 너희는 평토장한 무덤 같아서 그 위를 밟는 사람이 알지 못하느니라
한 율법교사가 예수께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이렇게 말씀하시니 우리까지 모욕하심이니이다
이르시되 화 있을진저 또 너희 율법교사여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에게 지우고 너희는 한 손가락도 이 짐에 대지 않는도다
화 있을진저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드는도다 그들을 죽인 자도 너희 조상들이로다
이와 같이 그들은 죽이고 너희는 무덤을 만드니 너희가 너희 조상의 행한 일에 증인이 되어 옳게 여기는도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지혜가 일렀으되 내가 선지자와 사도들을 그들에게 보내리니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며 또 박해하리라 하였느니라
창세 이후로 흘린 모든 선지자의 피를 이 세대가 담당하되
곧 아벨의 피로부터 제단과 성전 사이에서 죽임을 당한 사가랴의 피까지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과연 이 세대가 담당하리라
화 있을진저 너희 율법교사여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가져가서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고자 하는 자도 막았느니라 하시니라” (눅 11장 42-52절)

11장의 문장은 6장에서 등장하는 예수의 저주문과 동일하게 ουαι(화로다)라는 단어가 반복되면서 마치 6장의 강복선언을 다시한번 기억하게 만드는 듯한 역할을 하고 있다. 아니, 여기서는 오히려 이 단어가 훨씬 많이 반복되면서 더욱 확장된다. 단 6장과는 달리 그 저주의 대상이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로 명시되고, 바로 이들이 선지자를 죽이고 박해했던 사람들로 밝혀진다. 6장에서 ‘지금’과 ‘그 날’로 구분했던 두 세계의 갈등이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를 통해 현실의 문제로 구체화되고 있다.

그렇다면 바리새인과 율법교사가 왜 비난의 대상이 되는가? 이 저주문의 앞뒤로 나오는 이야기들을 살펴보자. 11장의 저주를 시작하기 전 예수는 이 이야기가 그들의 ‘탐욕(11:39)’에 대한 것이라고 간단하게 정리한다. 여기서 우리는 탐욕을 문맥과 관계없이 뭔가 정신적인 이야기나 개인적인 이야기로 돌려버리는 오해를 하기 쉽다. 하지만 뒤이어지는 12장에서 예수는 자신에게 따지고드는 율법학자들을 향해서 그 탐욕이 어떤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바로 사람을 죽일 수 있는 힘을 가진(4절) 권세자들과 위정자들(11절)에 관한 이야기이며 그 모든 탐욕은 그들이 가진 재물(13, 16절)로부터 나온다고 말한다. 정리해보자면 예수가 저주의 대상으로 지목하는 이들은 좁게는 당시의 바리새인들과 율법교사들이다. 하지만 넓게는 그들로 대표되는 당시 사회의 현실적인 돈과 권력의 구조이다. 그리고 그 반대편에서 예수가 요구하는 것은 무엇을 입을까 먹을까 걱정하지 않고(22절) 그 소유를 팔아서 우리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 증명하는 것(33, 34절)이다.

이제 엿보기를 마치고 다시 6장으로 돌아오자. 여기서 누가는 아직 11장처럼 구체적인 형태로 그 대상을 명시하지 않는다. 두 세상의 갈등은 아직 현실 속에 구체화되지 않은 채 숨어있다. 하지만 예수가 저주하고 있는 대상은 너무나도 분명하다. 부요한 자, 지금 웃는 자, 지금 배부른 자, 사람들로부터 좋은 말을 듣는 사람들… 이들은 ‘지금’에 속한 자들이다. 그리고 그들의 반대편에는 ‘그날’에 속한 자들이 서 있다.

 

‘그날’을 사는 이들

그렇다면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다는 말은 어떤 의미인가? 마태가 ‘가난한 자’를 ‘마음이 가난한 자’로 바꿨듯이 어떤 정신적 가난에 대해서 말하는 것인가? 아니면 가난한 삶이 복되니 자족하며 살라고 가르치는 것인가? 예수도 가난했으니 가난한 것도 꽤 괜찮은 것이라는 뜻인가?

여기서 누가의 예수가 선포하는 축복은 종말론적이다. 지금 가난한 사람들이 복되다. 그 이유는 그들이 가난하기 때문이 아니라 이제 하나님이 이 모든 현실을 바꾸실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아무 것도 가진 것 없는 이들에게 나라를 상속하실 것이다. 굶주린 자는 먹을 것을 얻을 것이고, 지금 우는 자는 하나님이 그 눈에서 눈물을 닦아주시고 그들이 웃게 만드실 것이다. 그리고 그 약속은 지금 부요한 자들과 지금 배부른 자들, 지금 웃는 자들의 현실을 뒤집으심으로써 그렇게 될 것이다.

여기서 ‘복됨’의 핵심은 [상태]가 아닌 [변화]에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가난이 칭송받는 나라가 아니라 가난한 자가 부요해지는 나라이다. 굶는 자가 배불러 지고, 우는 자가 웃으며, 배척받는 자가 칭송받는 나라이다. 지금 예수는 다가올 시대와 옛 시대의 전쟁을 자기 앞에 서 있는 한 무리의 사람들 앞에서 공식적으로 선포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 가난한 자들의 편에 서서 이 현실을 뒤집어 엎으실 것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위와 아래, 좌와 우가 뒤집힌다. 다가오는 ‘그날’의 세상은 ‘지금’의 세상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일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가 자신의 사명선언문으로 선포했던 메시지를 기억해야 한다. 사명선언문에서 복음이 전해질 대상이었던 ‘가난한 자’는 여기서 축복의 대상으로 다시 등장한다. 예수가  제자들을 보고 말하고 있다(20절)는 누가의 언급은 ‘가난한 자’의 정체가 바로 예수 앞에 있는 무리들임이 쉽게 알 수 있게 해준다. 하지만 거기서 그치지 않고 누가는 이들을 과거 이스라엘의 예언자들과 일치시킨다. 그들은 병자들이면서 동시에 제자들이고, 가난한 자이면서 동시에 예언자들이다. 이들은 ‘그날’에 속한 축복의 대상이지만, ‘지금’은 과거의 예언자들처럼 핍박받고 고난당하는 자들로 그려진다.

여기서 누가의 글을 읽는 이들은 이미 자신들이 알고 있는 참 예언자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떠올린다. 부요한 자들의 조상이 그랬듯 현실의 권력자들은 예수를, 그리고 예수 앞에 있는 ‘가난한 자들’을 핍박하고 박해할 것이다. 하지만 그 현실은 곧 뒤집힌다는 것을 누가의 독자들은 이미 알고 있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축복과 저주의 내용들은 성취 될 것이다. 그리고 저주가 그러하듯 이 축복의 선언 역시 누가의 글을 읽고 있는 이들을 향해 그들이 누구인지 상기시킨다.

3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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