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 6:20-26] 팔복? 우리가 잃어버린 축복과 저주 (1)

글이 길어져서 둘로 나눴습니다.

luke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너희 가난한 사람들은 복이 있다.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
너희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 너희가 배부르게 될 것이다.
너희 지금 슬피 우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 너희가 웃게 될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고, 인자 때문에 너희를 배척하고, 욕하고, 너희의 이름을 악하다고 내칠 때에는, 너희는 복이 있다.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아라. 보아라, 하늘에서 받을 너희의 상이 크다. 그들의 조상들이 예언자들에게 이와 같이 행하였다.

그러나 너희, 부요한 사람들은 화가 있다. 너희가 너희의 위안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너희, 지금 배부른 사람들은 화가 있다. 너희가 굶주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너희, 지금 웃는 사람들은 화가 있다. 너희가 슬퍼하며 울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좋게 말할 때에, 너희는 화가 있다. 그들의 조상들이 거짓 예언자들에게 이와 같이 행하였다.

sermon in the plain앞선 이야기에서 우리는 예수가 평지로 내려와 제자들을 만나는 장면을 살펴봤다. 선발대가 본진과 합류하고 이제 예수는 이들과 함께 전쟁을 치를 준비를 마쳤다. 그리고 이제 평지로 내려와 제자들과 동일한 눈높이에 선 예수는 전쟁터로 나가는 군사들을 축복하듯 제자들을 향해 축복의 선언을 한다.

우리가 흔히 팔복이라고 알고 있는 강복선언은 마태복음에 등장한다. 천국 백성의 복됨을 선언하는 이 심오한 문구는 2000년 기독교 역사 내내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크게 사랑받아왔다. 그런데 그 병행구라고 할 수 있는 누가복음의 강복선언은 이상하리만치 사람들로부터 외면받아왔다. 문제는 두개의 강복선언이 그냥 비슷한 것의 중복이 아니라 딱 보기에도 너~~~~~~~무 많이 다른 본문이라는 것이다. 성경의 어떤 병행구에서 하나가 별다른 이유없이 철저히 무시당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런 차별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고, 많은 경우 이 차별이 드러나는 자리에는 인간의 욕망이 숨어있다.

그래서,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했던 누가의 강복선언을 읽어나가다보면 “이거 위험하다”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거기에는 우리가 지금껏 알던 예수와는 너무 다른 모습의 예수가 있다. 누가의 예수는 우리가 안락한 교회 안에서 배워왔던 것과는 너무나도 다른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그리고 수십번 이 말씀을 곱씹어 읽다보면 왜 우리가 이 말씀을 그토록 차별해 왔는지, 내 안에 어떤 욕망이 나로하여금 이 말씀으로부터 도망치게 만들었는지 깨닫게 된다.

 

저주하는 예수

누가복음의 강복선언에는 마태의 그것과는 달리 여덟개의 복이 아니라 네개의 복과 네개의 저주가 나온다. 여기서부터 일단 파격적이다. 저주하는 예수라니…

누군가를 저주한다는 것이 예수에게 어울리지 않는 옷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런 행동이 성경에서 완전히 낯선 것은 아니다. 비슷한 장면이 구약에 등장한다. 그것도 굉장히 중요한 시점이다. 바로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생활을 마치고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기 직전, 모세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복과 화를 선포한다.

모세가 그 날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가 요단을 건넌 후에 시므온과 레위와 유다와 잇사갈과 요셉과 베냐민은 백성을 축복하기 위하여 그리심 산에 서고
르우벤과 갓과 아셀과 스불론과 단과 납달리는 저주하기 위하여 에발 산에 서고 (신명기 27장 11-13절)

이 뒤로는 굉장히 긴 저주의 목록이 이어진다. 복과 화를 선포하기 위해 각 지파들을 에발산과 그리심산에 세우지만, 그들이 선포하는 복과 화가 아닌 또 다른 저주 목록으로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쫓아서는 안되는 삶의 방식이다. 가나안 민족과는 달리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그 땅에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이 저주문은 세세하게 지적하고 있다.

사회학적으로 한 집단과 다른 집단을 구분하는 것은 그 집단의 자기 정체성을 반영하고 있다. 다시 말해, 두 집단을 ‘나’와 ‘너’로 구분시킴으로써 내가 누구인지를 분명히 하는 것이다. 종교적인 맥락에서 어떤 대상에 대한 저주 역시 이런 구분을 명확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 다시 말해서 저주는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그것을 반복적으로 듣고 말하게 함으로써 공동체가 거부하는 삶의 방식을 학습시키는 도구이다.

초기 기독교와 유대교의 구분시점이자, 실제적인 랍비유대교의 출범시점이라고 여겨지는 얌니야 회의에서 재정된 축복기도문에도 비슷한 형태의 축복문이 등장한다. 그런데 그 가운데 12번째 기도(Birkat ha Minim) 에 (아마도 기독교로 추정되는) 나사렛 이단에 대한 저주가 등장한다. 이 저주 역시 그들이 기독교가 너무 싫어서 욕하고 싶어서 만든 저주문이라기보다는 유대교의 정체성이 형성되던 시기에 자신들과 구분해야할 대상을 저주함으로써 자신이 누구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명확하게 정의하기 위한 도구인 것이다.

여기서 누가는 두 집단을 ‘지금’ ‘그날’로 구분하고 있다. 부요한 자는 지금 부요한 자이고 가난한 자는 그날에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을 자이다. 이것은 예수의 저주가 다가올 세상과 이전 세상의 갈등을 밖으로 끄집어내고 있음을 보여준다. 다시말해 예수의 저주는 두 세상의 전쟁 속에서 누가 적군이고 누가 아군인지 구별해 내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듣는 이로 하여금 자신이 누구인지, 어느 편에 속했는지를 생각하게 만든다.

2편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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