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후서 4:16-5:10 삐딱하게 읽기

paul_mosaic고린도후서 4:16-5:10의 말씀은 흔히 죽음과 부활, 썩어질 육체와 영혼에 대한 말씀으로 많이 읽힌다. 근데 성경을 읽다보면 이 구절을 그렇게 해석하는 것이 왠지 쌩뚱맞아 보인다. 바울이 영이나 육이라는 개념을 사용할 때, 인간을 둘 혹은 셋으로 나누는 헬라적 인간관을 반영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바울서신을 조금이라도 공부해본 사람이라면 한번쯤 들어봤을 이야기이다. 그런데 유독 이 부분에 있어서만큼은 그 상식이 잘 적용되지 않는다. 주석을 찾아봐도 헬라적 이원론은 아닐꺼라는 언급정도만 있을 뿐 이야기를 죽음과 부활의 문제로 풀어나가는 것은 별다르지 않다. 어떤 것도 맘에 들지 않아서 그냥 좀 삐딱하게 읽어보기로 했다.

일단 이 본문이 속해 있는 문맥을 살펴 보자. 여기서 바울이 예수의 죽음에 대해서 말하면서 죽음과 부활에 대한 이야기로 끌고 가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바울이 주어로 사용하고 있는 ‘우리’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바울은 앞에서부터 계속 ‘우리’와 ‘너희’를 구분하면서 사용하고 있다. 즉, 여기서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은 인간의 일반적인 상황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말이다. 이 문맥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본문과 관계없이 ‘우리’라는 단어 속에 끊임없이 독자인 ‘나’를 포함시켜 ‘은혜롭게’ 읽으려는 묵상적 읽기의 유혹에서 벗어나야 한다. 묵상적 읽기의 유혹을 떨쳐내고 본문을 대할 때, 죽음이라는 문맥보다 우선하는 것은 바울이 자기 사역에 대해서 변론하는 문맥이다. 고린도후서에서 바울이 사용하는 ‘우리’라는 주어는 자기 사역의 정당성을 거부하거나 위협하는 대상들과 자신의 사역팀을 구분하기 위한 용어이다. 앞에 문맥에서 예수의 죽음에 관한 내용은 아래와 같은 개념으로 둘러쌓여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를 힘입어서 이 직분을 맡고 있으니,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부끄러워서 드러내지 못할 일들을 배격하였습니다. 우리는 간교하게 행하지도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진리를 환히 드러냄으로써,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사람의 양심에 우리 자신을 떳떳하게 내세웁니다. (중략) 이 모든 일은 다 여러분을 위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은혜가 점점 더 많은 사람에게 퍼져서, 감사하는 마음이 넘치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1-2, 15‬)

마치 부활 단락의 시작처럼 여겨지는 4:16절의 겉사람, 속사람 개념 역시 이런 바울의 사역에 대한 변론의 맥락 가운데 등장한다. 앞에서 말했듯 바울은 인간을 영과 육으로 구분하지 않는다는 점을 다시 기억하자. 그렇다면 여기서 겉사람과 속사람을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중요해진다. 여기서 겉사람을 표현할 때 사용한 εξω는 바울 서신에서 다섯번 정도 쓰이는데 고린도후서에 나오는 두번을 제외하고 나머지 경우는 모두 ‘공동체 밖에 있는 사람들’을 지칭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그리하여 여러분은 바깥 사람을 대하여 품위 있게 살아가야 하고, 또 아무에게도 신세를 지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12‬)
밖에 있는 사람들을 심판하는 것이, 나에게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여러분이 심판해야 할 사람들은 안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겠습니까? 밖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 악한 사람을 여러분 가운데서 내쫓으십시오. (‭고린도전서‬ ‭5‬:‭12-13‬)
외부 사람들에게는 지혜롭게 대하고, 기회를 선용하십시오. (‭골로새서‬ ‭4‬:‭5‬)

복음서나 신약의 다른 문서에 등장하는 용례도 크게 다르지 않다. BDAG는 εξω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1) 범위나 경계 너머의 위치, 2) 행동의 결과로서 영역이나 한계의 바깥 위치, 3) 그룹에 포함되지 못함. 이 중에 어떤 것도 영혼과 육체의 이분법을 용납하지 않는다. 바울이 밖에 사람들을 말할 때 그것은 공동체 밖에 있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지 공동체의 겉에 있는 사람들을 말하진 않았을 것이다. 즉, 겉사람과 속사람이라는 단어는 어떤 존재의 외면과 내면으로 해석될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겉사람과 속사람을 마치 육체와 영혼의 관계처럼 보는 것은 로마서 7장에서 바울이 사용하고 있는 ‘속사람’에 대한 잘못된 해석이 그대로 반영된 결과라고 봐야 할 것이다. 로마서 7장에서 바울이 속사람이라고 할 때 그것은 ‘나’를 의미하지 ‘나의 영혼’이나 ‘내적 자아’를 의미하지 않는다. 바울에게 속사람은 오히려 썩어지고 번민하는 존재이다. 고린도후서에 나타나는 속사람 역시 그저 ‘나’라는 의미로 봐야한다. 그리고 그와 대비되는 겉사람(바깥의 사람)은 세상 혹은 바울의 경쟁자를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더 그럴싸해 보인다.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다. ‘겉사람’을 해결하고 났더니 ‘이 땅의 장막집’이라는 표현이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이것도 해쳐나갈 수 있다. 아자! 아자! 이 구절은 흔히 죽음 이후에 주어지는 부활의 몸에 대한 의미로 해석된다. 그런데 이렇게 읽어버리면 ‘육체 위에 덧입는다’는 표현은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어차피 부활의 몸을 입는다면 육신의 몸을 벗고 입든 그 위에 덧입든 무슨 차이가 있을까? 오히려 우리에게 익숙한 부활 개념은 우리의 몸이 변화되는 것에 가까울텐데 말이다. 그럼 여기도 삐딱하게 읽어보자.

tentmaker

장막이라고 번역된 σκηνος는 성경에서 이 구절에만 단 두번 등장하기 때문에, 그것이 구약의 법궤가 머물던 장막을 가리키는지, 광야에서 이스라엘이 치고 살던 천막을 가리키는지, 아니면 로마의 군용 천막을 가리키는지 도무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사도행전의 기록에 따르면 바울은 σκηνοποιος로 소개된다. 즉 ‘천막 만드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바울이 언급하는 천막이 바울 자신의 직업/사역과 관련된 비유적 표현일 수 있다는 가정을 할 수 있다.

장막집을 바울의 사역으로 이해하면 본문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보자. 바울은 자신의 집(사역)이 실패하더라도 하늘의 집(보상?)이 있음을 알고 있다. 그들의 사역은 궁극적으로 하늘에서 오는 것을 기대하는 것이기 때문에 설사 그들의 사역이 벗겨지더라도 그들은 알몸으로 드러나지 않을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바울은 그날에 자신들이 벗었기를 원치 않고 하늘의 집을 이 장막의 집, 즉 자신들의 사역 위에 덧입기를 바라고 있다. 이것은 고린도교회에서 지금껏 자신들이 일궈왔던 사역의 결과가 헛되기를 원치않는 사도의 소망이다. 생명이 죽은 것을 삼켜진다는 것은 그들의 사역이 어떤 목적을 가진 사역이었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이 모든 것을 위해 자신들을 준비시키신 분이 하나님이시고 그 사역을 보증하시는 성령의 첫 할부금을 지불하신 분 또한 하나님이시다. (여기서 ‘보증으로 성령을 주셨다’는 말은 ‘성령의 첫 할부금을 주셨다’로 번역되는 것이 좋다.) 이 표현은 신약에 딱 두번 나타나는데 다른 한번은 고린도후서 1:22에 나온다. 1장애서 바울은 자신들의 사역에 대한 보증으로서 성령을 내세우고 있다. 만약 5장의 문맥이 죽음과 부활이 아니라 바울의 사역에 관한 문맥이라면 5장에서 사용된 성령에 대한 바울의 표현은 1장의 그것과 모든 면에서 일맥상통한다. 이렇게 읽을 경우 이 구절은 죽음 후에 천국에 예비된 집이라던가 부활의 몸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 바울이 자신의 사역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하나님의 신실하심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사역이 실패하길 원치 않는다는 소망을 표현하는 구절로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5장 6절부터 이어지는 문장은 무엇일까? 이 문장은 바울의 영혼이 몸을 떠나 하나님께 가는 것을 소망하는 말로 이해되지 않는가? 뭐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먼저 이해해야 하는 것은 앞부분을 읽으면서 죽음과 영혼에 대한 선입견을 걷어내고 읽는다면 이 구절은 4:16-5:10의 본문에서 σωμα(몸)가 처음 등장하는 구절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앞부분이 몽땅 몸에 대한 이야기처럼 여겨지다보니 여기서 처음 등장하는 σωμα의 신선함을 놓쳐버린다. 4:16-18에서는 겉사람과 속사람 얘기를 했고 5:1-5에서는 장막집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이제 처음 몸에 대한 이야기를 할 것이다. 하지만 5:6부터 시작되는 이야기 역시 몸을 떠나 주께 가는 영혼에 관한 이야기라고 이해할 필요는 없다.

6-8절은 그 구절은 한글 성경으로 읽더라도 논리적 선후 관계의 흐름을 이해하는 것이 쉽지 않다. 새번역은 7절의 γαρ를 생략해서 이 문제를 피해가려 했지만 문장만 더 난해해질 뿐이다. 나는 여기서 ‘몸 안에 있는 것(ενδημεω)’과 ‘몸 밖에 있는 것(εκδημεω)’이 의미하는 바는 난해구로 남겨놓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ενδημεω와 εκδημεω는 성경전체에서 딱 여기에서만 사용되는 용어이기 때문이다. 외부 용례도 그다지 많지 않기 때문에 그 의미를 확정하는 것은 더 어렵다. 특히나 바울서신 같이 바울과 고린도 교회 사이에 상호적 이해를 동반한 맥락에서 하나의 단어를 특정한 의미로 제한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심지어 바울은 9절에서 사용되는 ενδημεω와 εκδημεω에 대해서는 그것이 주에 대한 것인지 몸에 대한 것인지조차 밝히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단어적 의미에 매달리다 정작 이 본문을 통해서 바울이 하려는 이야기의 방향을 놓칠 수 있다.

6-8절을 이해하는 데 핵심이 되는 포인트는 9절에서 앞에 논리를 종합하면서 ‘그러므로/이런 이유로’라는 접속사 διο를 통해서 연결하고 있는 내용이다. 6-8절의 논리적 결론은 ‘밖에 있든 안에 있든’ 그분에게 기쁨이 되는 것을 좋게 여긴다는 바울의 고백이다. 7절과 8절이 역접(δε)임을 고려할 때 6절의 상태는 지금까지 가치있다고 여겼던 어떤 상태이다(완료시제). 그리고 그 이유는 그들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통해 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그들은 그 반대의 상태를 더 좋다고 생각한다. 이는 8절에 ‘몸을 떠나서 주께 가깝다’는 말이 ‘밖에 있는 것’과 ‘안에 있는 것’의 가치 차이를 상대화시키고 그 결과 그보다 중요한 ‘기쁨이 되는 것’을 강조하는 근거가 되었다는 것이다.

뿐만아니라 6절과 8절은 정반대의 내용으로 대비됨에도 불구하고 동일하게 ‘용기를 얻는다(든든하다)’는 동사에 의해서 이끌어지고 있다. 그리고 여기서 용기를 얻는다는 것은 5절에서 언급된 성령의 보증이 가져오는 결과이다(οὖν – 6절). 다시 말해 몸 안에 있는 것도 성령의 보증으로 용기를 얻어서 한 것이고 몸 밖에 있는 것도 같은 성령으로 인해 용기를 얻어 소망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이 ενδημεω와 εκδημεω를 반복/대비시키면서 여기서 말하려 하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몸 안에 있는가 밖에 있는가’가 아니라 그것과 관계없이 ‘주께 기쁨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각자가 ‘몸을 통해’ 행한 것들이 드러나야만 하기 때문이다(δεῖ – 10절).

바울은 여기서 자신과 동역자들이 ‘몸을 통해 행했던’ 자신들의 사역의 결과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길 바라고 있다. 그리고 자신들의 밖에 있는 이들을 포함한 모든 이들이 그 심판대 앞에 드러나길 바란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의 사역에 자신이 있다. 그들의 자신감은 하나님이 주신 ‘성령의 첫 할부금’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이처럼 4:16-5:10의 본문이 죽음과 영혼이라는 쌩뚱맞은 맥락이 아니라 바울의 사역에 대한 변론의 맥락에서 읽을 때, 비로소 뒤에 이어지는 바울의 고백은 고린도인들을 향한 힘을 얻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이 두려운 분이심을 알기에 사람들을 설득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 앞에서 환히 드러났습니다. 여러분의 양심에도 우리가 환히 드러나기를 바랍니다. 그렇다고 해서 또 다시 우리가 우리 자신을 여러분에게 치켜세우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여러분이 우리를 자랑할 수 있는 근거를 여러분에게 드리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속에는 자랑할 것이 없으면서도 겉으로만 자랑하는 사람들에게, 여러분이 대답할 말을 가지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가 미쳤다고 하면 하나님께 미친 것이요, 정신이 온전하다고 하면 여러분을 두고 온전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휘어잡습니다. (고후 5: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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