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베스처럼 기도하지 말라. – 다시 읽는 야베스의 기도

쫌 뒤늦은 감이 없지 않지만… 문득 야베스의 기도에 대해서 생각하다가 든 생각을 남겨본다.


지금까지 야베스의 기도에 대한 많은 책들이 있었지만 우리가 따라야할 기도의 모본은 예수님의 기도이지 성경에 짧게 나오는 야베스의 기도가 아니다라고만 할 뿐 정작 야베스의 기도 자체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 설명을 해준 책은 없었다.


하지만 나는 야베스의 기도가 존귀한 자의 기도라는 선입견에서 벗어나 윌킨스의 책을 비판해보려 한다.


일단 야베스는 그의 기도로 인해 존귀해진 것이 아니다. 성경엔 야베스가 그 형제보다 존귀한 자였다고 표현하고 있다. 이미 존귀한 야베스가 하나님께 기도한 것이다. 즉, 그의 기도가 그를 존귀케 만든 것이 아니다.


또한 여기서 사용된 존귀한 자라는 표현은 ‘그 형제보다’라는 제한을 가지고 있다. 그냥 존귀한 자라는 것이 아니라 그 형제들 사이에서 더 존귀한 자라는 것이다. 이것은 그 존귀함이라는 것이 우리가 본받아야 할 어떤 것인지 의문을 갖게한다.


무엇보다 ‘존귀한’이라고 번역된 단어가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이 단어는 단순히 ‘존경할만한’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고, 뛰어난 장수를 표현할 때 쓰는 ‘뛰어난’이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다. 또한 공동번역은 이 말을 ‘가장 세력있는’이라고 번역하였다. 브렌튼은 70인역 영어 번역에서 이 단어를 famous로 번역하였다. 여기서 내가 말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존귀한’의 의미보다는 더 크고 세력이 있고 기능적으로 뛰어난 혹은 여러사람에게 잘 알려져 존경을 받는 사람이라는 의미로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그 가족중에서 그가 존경받거나 뛰어나게 여겨질 이유라면 당시 사회의 문화적인 것을 고려할 때 공동번역의 해석이 힘을 얻는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공동번역의 번역을 따라가자면 일은 점점 심각해진다. 그는 이미 많은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가 자기 지경을 넓혀달라고 기도하고 있다. 무엇이 부족해서 그는 더 구하는가? 여기서 ‘하나님을 위해’라는 말을 붙여 해석하는 것은 본문에 대한 곡해이다. 본문 어디에서 그런 것은 드러나 있지 않다.


구약의 사회에서 지경을 넓힌다는 것은 어떤 의미였을까? 여기서 지경이라는 말은 ‘경계’라는 말이다. 히브리어 사전에서 이 단어를 찾으면 가장 먼저 나오는 용례는 신명기 19장 14절이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어 얻게 하시는 땅 곧 네 기업된 소유의 땅에서 선인의 정한 네 이웃의 경계표를 이동하지 말지니라


여기서 옮기지 말라고 명령하고 있는 경계표가 야베스가 넓혀달라는 지경과 같은 단어이다. 다른 용례에서도 경계는 가나안 입성과 함께 하나님이 정해주신 각 기업의 경계를 의미한다. 일부 예외적인 구절을 제외하고 이 단어는 다른 용례로 사용되지 않는다.


이것은 하나님이 정해주신 것이고 사람이 옮길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야베스는 그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왜? 주를 위해서 주의 명령을 어기길 요구하는 것인가? 당시에는 토지의 매매자체가 불가능했다. 돈이 필요할 경우 땅을 빌려줄 수 있었을 뿐이다. 다시 되찾고 싶으면 언제든지 희년까지 남은 기간을 계산하여 값을 지불하고 다시 그 땅을 찾아올 수 있었고 돈이 없으면 가까운 친척이 그 땅을 되찾아 줄 수 있었다. 무엇보다 희년이 되면 그 땅은 원래 주인에게 돌아갔다. 당시에 경계를 옮길 수 있는 방법은 딱 하나 있었다. 자기보다 약한 자의 것을 빼앗는 것.


그 당시에 농경사회를 살았던 이스라엘에게 땅을 곧 생존을 의미했다. 더군다나 역대기의 기록연대를 포로기 귀환 이후로 볼 때 그 당시에 고향에 돌아와 자신의 기업을 되찾으려하는 유대인들에게 땅은 생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넓히는게 문제가 아니라 그 기업을 그대로 되찾는 것이 그들에겐 약속의 상징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야베스는 너무나도 분명하게 불법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위한 비전이 아니라 인간의 욕심이 있는 그대로 드러난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이다. 내 형제가 죽어도 상관없으니 내꺼 크게 해달라는 것을 너무나도 아무렇지 않게 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에 땅과 관련된 비슷한 이야기가 하나 나온다. 나봇의 포도원 사건…


당시 포도원을 팔 것을 요구했던 아합왕의 요구에 물려받은 기업이라 팔 수 없다는 나봇을 이세벨이 죽인다.


시돈의 딸인 이세벨과 아합이 결혼하면서 이스라엘은 바알을 섬기기 시작하고 그와 함께 물신숭배 사상이 이스라엘을 뒤덮으면서 이스라엘의 전통적 토지체제는 붕괴하게 된다. 이처럼 성경에서 우상의 숭배는 단순히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을 넘어서 그 사회체제 자체를 뒤바뀌는 것이다. 여호와가 버림받고 바알이 이스라엘을 지배한다.


물론 야베스의 시대를 확정할 수는 없다. 역대기의 족보가 워낙 광범위한데다가 야베스의 이야기는 족보와 거의 독립되어서 쓰여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뻔뻔한 외침이 가능했던 시기라면 그 때 밖에 없지 않을까? 그래도 악인이 승리하는 것 같은 그 시대에도 역사를 끌어가시는 것은 바알이 아닌 여호와 하나님이셨다.


그렇다. 브루스 윌킨스의 말이 다 맞다 치자.


그래도 이 책은 가장 중요한 것을 잊고 있다. 다름 아닌 역대상 4:9~10절이 주인공인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기도를 들으신 것은 하나님이다.


야베스의 기도가 뛰어난 기도여서 하나님이 그 기도를 들으시게 만든 것이 아니라 야베스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으신 것이다. 여기다 중요 표시 몇개를 해야 이 중요성이 표현될 수 있을까?

그 기도는 아무런 힘이 없다. 그 기도가 뛰어나서 하나님이 들으신 것이 아니다.


기도를 들어주시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이요, 결정이다.


도대체 그렇게 이기적이고 불법적인 기도를 하나님이 왜 들으셨는지는 그냥 모르는 것으로 남겨둬야 옳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단순히 기도를 들어주셔서 부자가 되었다는 것이 그와 그의 기도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이유가 되어서는 안된다.


예수님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부자는 하나님이 사랑하셔서 부자가 되었고 가난하거나 병에 걸린 사람은 하나님이 저주하셔서 그렇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을 향해서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 ‘지금 우는 자가 복이 있다.’


십일조 많이 해서 부자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가? NO! 그 사람을 부자 만드는 것은 그가 십일조를 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내가 쓰임 받겠다고 지경을 넓혀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릴 쓰시기 위해 지경을 넓혀나가신다. 앞뒤 순서가 잘못되도 너무 잘못됐다.


해석이야 각자 다를 수 있다치더라도 기도의 주체가 누구인지만은 분명히 해야하지 않을까?

19 Comments

  1. 핑백: 진리의 길
  2. 좋은 비판 감사합니다. 성경을 보는 안목이 있으신 것 같네요..특히 기도를 들으시는 분으 하나님이심이 인상깊었습니다.

    그러나 제 생각엔 경계의 의미를 잘못 이해하신 듯 하네요..
    역사적으로는 야베스가 살던 시대는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을 정복할 당시입니다.포로기 이후에 책이 쓰여졌을 뿐이지 그당시에 야베스가 살았던 것은 아닙니다.
    각 지파별로 땅을 분배하려고 하는 그 시점입니다.
    경계는 땅의 경계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닌듯 하네요..
    더 나은 제안이 있다면 댓글 부탁합니다.

    1. 먼저 부족한 글에 과분한 칭찬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성서학적으로 야베스가 살았을 연도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습니다. 그것은 야베스가 등장하는 역대기의 족보가 무작위적으로 배열되어 있고 그 흐름 역시 뚝뚝 끊어져 있기 때문에 정확한 연대를 알기는 불가능합니다.

      다만 여기서 포로기 이후의 배경에서 이것을 읽은 이유는 역사적 연대 추정을 위한 것이 아닌 양식비평적인 차원에서 그 기록이 남겨지던 당시 이스라엘 공동체의 삶의 자리를 재구성하려는 의도입니다. 다시말해 역대기라는 본문속에 이 기도가 기록된 저자의 의도와 배경적인 의미를 되집어보고자 하는 의도이지 야베스의 역사적 위치를 재구성하려는 의도는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야베스의 의도보다는 야베스를 기록한 저자가 이 네러티브를 통해 말하고 싶었던 것에 대한 논증이라고 보아주시면 좋겠습니다.

      여기서 경계에 어떤 다른 의미가 있는지는 아직 제가 알지 못하는 부분입니다. 다만 성서학적인 논증에서 이 경계는 분명 신명기에 언급된 ‘땅의 경계’를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알고 있기로 브루스 윌킨스는 이 기도의 경계의 의미가 이스라엘의 율법과 어긋나는 것을 의식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지경’의 의미를 이스라엘 내에서의 영토분쟁이 아니라 대외적 확장을 의미하는 것으로 재해석해서 더 큰 꿈을 갖고 더 큰 비전을 갖는 것을 지지하는 것처럼 해석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지계표가 가지고 있는 용례나 의미와는 어긋나는 것입니다. 이 지경의 의미는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서 이스라엘 내에서 하나님이 정해주신 땅 분배의 기준을 의미입니다.

      중요한 것은 야베스의 역사적인 연대를 가나안 정복시기로 책정한다고 해도 대외적 확장이 아닌 이스라엘 내부에서의 지계표를 옮기는 문제는 불법이었다는 것입니다. 이 점은 그 법률이 여호수아의 정복 시기 이전인 신명기에 기록된 것이라는 점에서 무시될 수 없는 부분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정해주신 것이지 넓혀달라고 넓어질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야베스의 연대를 신명기 이전으로 끌어올리지 않는 이상 지계표를 움직이는 것이 불법인 것이 달라지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역대기라는 책 속에 담겨진 의미를 되새겨볼 때 그 배경에는 포로기 이후 팔레스틴에 돌아와 땅을 되찾으려던 이스라엘 민족의 아픔이라는 배경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에 야베스라는 역사적 인물이 언급되는 의도와 목적은 그 배경 위에서 찾아져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경계라는 것이 갖는 다른 의미에 대해서는 혹시 알고 계신 것이 있으시면 알려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고려해서 반영해보겠습니다.^^ 다시한번 부족한 글에 관심을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3. 안녕하세요. 여기에 나오는 지경은 땅을 구분짓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의미 한다고 생각합니다. 형제는 자기 가족 형제가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모든 자녀들중이란 뜻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모든자들중에 존귀한자 라는 뜻으로 노아시대의 노아와 같은 의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지경을 넓혀 달라는 기도는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이 늘어나게 은혜를 간구하는 영적 기도라 생각합니다. 자신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도를 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환난과 근심은 세상을 뜻하여 시험과 유혹에 빠지지 않게, 악에서 구원해달라는 기도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야베스의 기도는 수준있는 영적 기도이며 하나님이 우리에게 듣기 원하시는 기도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의 기도를 들어주신거라 생각합니다. 다들 아시다시피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하심으로 씌여진 책이므로 읽는 우리도 내용이 아니라 말씀 자체를 존재로 받아들여 영적으로 깨닫게 해주시면 알수 있는 것이 아닐는지요. 영의 일은 영으로 육의 일은 육으로 안다는 말씀처럼요. 물론 성경의 깊은뜻은 원어를 참조함으로 더 가까이 다가갈수 있지만 그것도 하나님이 열어주신다는 조건하에 깨달을수 있는 것이라 우리는 말씀을 통해 배웁니다. 참고로 성령충만에는 두가지 성령충만이 있습니다. 헬라어로 에피(겉,밖,위에)프뉴마(영) 와 엔(속에, 안에)프뉴마 라고 해서 플레레스(외적성령충만) 플레레오(내적성령충만) 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대부분 성령충만함을 간구한다,, 라고 하면 에피프뉴마(외적성령으 충만, 능력의 성령)의 역사하심을 기대합니다만, 그리스도인이 진실로 진실로 간구해야할것은 엔프뉴마, 진리의 성령입니다. 이부분에대해 궁금하신점들이 있다면 언제든지 나누며 환영합니다. 그리스도-기름부음-성령-진리-예수님-진리의 성령-말씀 ,, 이 우리안에서 충만해진다면 하나님의 끝없는 사랑의 실체를 맛보아 이세상에서 천국을 누리며 살아갈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우리에게 말씀을 생각나게 하시고 깨닫게 도와주시는 진리의 성령 하나님 아들이 이땅에 오신 역사적인날 입니다. 모두들 Merry Christmas!

    1. 성경에 있는 말을 그렇게 “해석”하시는 것은 자유고, 그렇게 “느끼시는 것’도 자유입니다. 또한 그렇게 “적용”하실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것이 성경이 쓰여지고 말씀되어진 본래의 의미는 아닙니다. 그리고 말씀해주신 헬라어는 어디서 배우신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헬라어를 문맥을 벗어나 특정 단어들이 마치 특별한 의미라도 있는 것처럼 해석하시는 것은 50년대 이후에는 그 위험성으로 인해 철저히 거부되고 있는 방식입니다. επι πνευμα와 εν πνευμα는 문맥에 의한 의미를 제외하고는 아무런 차이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충만함으로 번역하신 πληρης와 πληροω 역시 ‘충만함’과 ‘충만하다’ 즉, 명사와 동사라는 차이 말고는 성경의 용법에서는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그것은 내적 / 외적 충만으로 구분하시는 것은 원어를 크게 잘못 이해하신 것입니다.

      앞으로 이런 댓글이 더 달릴 경우 제 블로그의 질이 과도하게 낮아질 수 있으므로 별다른 통보없이 차단할 것임을 미리 말씀드립니다.

      1. 제글때문에 기분이 상하셨다면 죄송합니다. 베땅이 님은 성경지식이 참 많으신거 같습니다. 부럽네요 ^^ .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성도들과 나누는것은 진정한 섬김이고 기쁨이며 참 감사한 일이지만 저의 수준을 논하시고 질을 따지신다면 어쩔수 없겠지요.

        다만 ‘엔 프뉴마 와 ‘에피 프뉴마’는 확실한 차이가 있습니다. 저는 원어성서원에서 공부하셔서 헬라어를 마치고 히브리어를 공부하시는 분께 배웠습니다. 뒤에 주격이 아니라 대격이나 여격이 붙어야 한다는 문법적 해석의 중요성 보다는 ‘엔’ 과 ‘에피’ 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쓰여졌는지가 중요하다는걸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에피’라는 전치사는 주로 구약에 쓰였으며 제한적성격을 띄고 있습니다. 주고 안주고의 주체이신 하나님이 주셨다가도 다시 가져가시는 ‘에피 프뉴마’ 의 역사하심은(외적성령) 사울(삼상16:14)과 삼손(삿16:20)이 대표적이 예이며, ‘엔 프뉴마’ 는 (내적성령) 거의 신약에 나오는데 영원의 성격을 띄웁니다. 고전 13장 의 사랑은 은사잖아요? 사랑의 은사, 은사중의 최고의 은사인 사랑의 은사는 한번 주시면 절대 다시 가져가시지 않는 ‘엔 프뉴마’의 역사, 하나님 사랑의 실체이신 진리의 성령,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안에, 속으로’ 거하시는 역사입니다. 이 진리의성령이(요14,15,16) 우리 ‘속에’ 오시는것이(히9:28) 바로 이땅에서 성도들이 하나님나라를 누리며 살아가게 되는 상태가(눅17:20~21)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본체이신 그리스도께서(빌2:6) 이땅에 예수님으로 오시고 (요1:14) 그분을 진리(진리의성령)로 증거하러 오신것을(요14:6),(요1서3:19),(요18:37)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눅18:17) 받아들이면 우리에게 기쁨으로 충만하게 해주시는(요15;11)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얘기 하고 싶었습니다. 어릴적 사고로 인하여 한다리를 절게 되고 지금까지 육체의 고통 가운데 있으나 그분이 주신 기쁨으로 충만하게 되어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하나됨을(요15:9,10)(엡1:10)을 경험하는 한형제의 하나님 찬양이라 생각해 주시면 좋겠네요.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과 평강이 형제님 안에서 나날이 풍성하여져 가길 바랍니다 🙂

        1. 제 경고가 부족했던 모양입니다. 제 경고를 전혀 이해 못하신 것 같아서 한번 더 경고를 드립니다. 님의 글이 기분이 나쁜 것이 아니라 과하게 왜곡된 원어 사용과 수준 이하의 성경 해석방법으로 자칫 이 글을 읽는 다른 분들에게 오해를 일으킬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정중하게 경고드립니다.
          원어성서원에서 배우셨으면 원어에 대해서는 잘 모르시는게 맞을 것 같습니다. 간단하게 말씀드립니다. 헬라어 επι는 ~위에 입니다. 즉 επι πνευμα는 외부에 임하는 성령이 아니라 ‘성령 위에’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성경엔 ‘επι πνευμα’는 성경에 등장하지 않는 용례입니다. 한글로만 보더라도 성령위에서 뭘 한다는 것이 말이 안되잖아요? 성령이 어디 위에 ‘πνευμα επι ~’는 가능하겠지만요. 마찬가지로 εν πνευμα는 ‘~안에’라는 뜻으로 내부로 임하는 성령이란 뜻이 아니라 ‘성령 안에’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구약은 헬라어로 쓰인 것이 아니라 히브리어로 쓰였습니다.
          내용문제를 떠나 꽤 애를 써서 댓글을 써주신 것 같아 바로 지우지 않고 한번 더 경고드립니다. 더 이상의 댓글은 아무리 노력을 담아 쓰셔도 바로 삭제하겠습니다. 댓글을 지웠다고 진리를 외면한다느니, 논쟁을 피한다느니 그런 말도 안되는 오해는 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4. “도대체 그렇게 불법적이고 이기적인 기도를 하나님이 왜 들으셨는지는 그냥 모르는 것으로 남겨둬야 옳다고 생각한다.”

    형제님의 견해에 의하면 야베스의 기도는 “불법적이고 이기적인 기도”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기도를 하나님이 들으셨다고 하였습니다. 그럼 하나님은 “불법적이고 이기적인 기도”도 들으시는 분이라는 것입니까?

    1. 모든 불법적인 기도를 다 들으시는 것은 아니겠지만 우리의 기도가 선하기 때문에 들으시는 것이 아니듯 불법적이고 이기적인 기도도 들이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들으심의 결과가 그에게 복이 될지 화가 될지는 전혀 다른 문제겠지요. 누군가의 기도는 ‘들으심’ 자체가 그에게 화가 될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이기적인 기도를 듣느냐 마느냐보다는 하나님이 악을 자신의 목적을 위해 사용할 수 있는가를 묻는 신정론의 문제겠지만요.

  5. 저는 시대적 상황 혹 히브리 문자상의 의미로 성경을 본다면 지성적이거나 논리적이어서 좋은면도 있으나 이 야베스의 기도 컨텍스트안과 우리에게 믿음을 허락하신 성경의 하나님에 대한 통합적 이해로 쉽게 이 기도를 읽어보면 이렇습니다. 먼저 저는 생명과학자로서 지난 15년간 3번의 우울증을 거치며 “고통의 의미”를 좀 배웠습니다. 고통을 거친자는 자연스레 부드러워지고 정말 고통이 다시 오길 원치 않습니다…전 야베스가 고통을 아는 자 이기에 그의 기도는 인격적 하나님에게 이미 연결 되었다고 봅니다….그의 기도는 아도나이 즉 주님을 부르고 기도합니다. 이것은 주기도문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하며 부자 관계의 친밀성에 기도의 처음 부터 그분의 품에 자기를 던지는 겁니다. 복에 복을 더 함은 그 정도의 사람이라면 땅달라고 지경을 넓혀달라고 이유 없는 억지를 요구하지 않았으리라 봅니다…먼저 근심을 가져가 주십시요…고통의 vally of death 를 넘은자들은 자연 스럽게 근심의 근원 즉 구조 악 정치 이해 관계 돈관계 같은 것에서 오는 시험과 악에서 구해달라라고 자연스레 부탁 합니다. 그리고 근심이 하나님으로 인해 떠난다면….이제 고통으로 단련된 신앙으로 자기의 사명을 알게되며 그 사명를 위해 팔료한 땅의 리소스들을 당연히 하나님께 구하게 되고…하나나님은 기도를 들으시고 그대로 허락하십니다….이 야베스의 기도는 마태복음 5장과 뜻이 통합니다….돈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기지 말고 우리의 주예수를 구하는 (그의나라와 그의 의를 구함)자들에게 이 모든것을 주십니다….

    1. 좋으신 하나님입니다. 하지만 이 본문은 그런 의미의 본문은 아닙니다. 제가 본문에서 히브리어를 주석하고 시대적 상황을 살피는 것은 지성적이거나 논리적으로 성경을 읽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을 오해하지 않기 위함입니다. 선생님의 감동적인 고백은 감사하나, 그것은 이 본문을 통해 하나님이 하시려는 말씀은 아닌 것 같습니다. 선생님이 경험하신 하나님에 본문을 맞추지 마시고 본문을 통해 선생님의 생각보다 크신 하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그럴려면 먼저 본문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 아셔야겠지요.
      그리고 말씀하신 마태복음은 아마도 6장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마태복음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구할 때 우리에게 주시겠다 약속하는 것은 야베스가 구하는 복의 복과 지경을 넓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일용할 양식, 즉 하루 먹을 양식과 들의 백합화가 입는 수준의 입을 것입니다. 이것은 생존의 문제입니다. 즉, 마태복음에서 약속하시는 하나님의 약속은 고통당하는 성도들을 향해 위로하시며 지키실 것을 약속하시는 것이지요. 결코 커다란 사명을 위해 돈벌게 하신다는 약속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돈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는 것입니다.

  6. 언제 쓰신 글인지 모르나 많은 부분 수긍이 갑니다.

    도를 들으셔서 존귀하게 된 것인지라는 부분은 우리의 선입견일 뿐입니다.
    주님이 그 기도를 들으셨다는 것에서도 우리는 알 수 있는 부분이 없습니다.

    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모든 기도를 들으십니다. 응답하셔서 그 기도대로 해주셨는지 알길이 없습니다.

    문제는 왜 야베스의 기도가 족보 본문 안에 들어왔는지 연구해야 합니다.
    단순히 한 단어 한 문장의 의미로 모든 걸 설명하기엔 부족한 것이 많습니다.
    더구나 본문이 너무 짧습니다.

    몇가지 같이 생각해보고 싶어서 글을 남깁니다.

    1 야베스는 누구일까요? 족보에 이상하게 끼어들어간 야베스는 누구일까요?
    정말 어머니가 이름지어서 고난받는 사람일까요? 이름이 고난이라서 무조건 고난일까요?
    혹시 어머니가 정말 힘들게 아프게 낳아서 그렇게 베노니(베냐민) 처럼 한 것은 아닐까요?
    (손이 귀한 부자집에서 정말 힘들게 얻은 아들이라 그런것은 아닐까요?)
    도대체 야베스는 누구일까요?

    2 야베스는 유다지파의 족보 사이에 끼어있는데 그는 이스라엘 사람이 아닌 것은 아닐까요?
    (어머니가 유대인이면 유대인이라는 매우 후대의 본문은 이 본문과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3 야베스가 지경을 넓혀달라고 한 부분과 환란에서 벗어나게 해달라는 두 가지중 어느 부분을 중점적으로 우리는 바라볼까요? 같은 의미를 반복한 것이라고 한다면 지경이 넓어지는 것이 환란을 벗어나게 해준다는 것이 되야 하는데 그 의미는 무엇일까요?

    질문만 드려서 죄송합니다. 저도 짧은 시간 본문을 보다 궁금하여
    검색하다가 글을 남깁니다.

  7. 별 영양가 없은 쓰잘데기 없는 성경 논쟁이 있었군요.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은 고작 66권에 불과한데,
    그것을 가지고 마치 하나님의 모든 뜻과 그의 마음을 다 아는양…

    히브리어가 어떻고 문법이 어떻고 원어가 어떻고…
    그렇기에 본인만이 성경의 정확하고 확실한 해석을 했다고 착각하는..

    조금이라도 본인과 다른 견해와 해석이 나오면 마치 이단 대하듯…
    본인의 글이 타인의 수준이하의 성경해석으로 말미암아 뭐라구요?

    성경을 알고 배우면 배울수록 더욱 더 겸손해 져야 됩니다.
    죄인의 괴수임을 깨달아 가는 것이 성경입니다.

    죄송하군요.
    저도 이런 듣기 싫은 얘기를 하는 것 보니, 아직 덜 된
    인간입니다.

    이 글을 쓰면서 내 자신 스스로
    좀 더 좋은 인격과 덕을 높이는 인성을 길러야 되겠습니다.

    불편하시면
    삭제 하셔도 좋습니다.

  8. 보다 정확하고 분명하게 성경을 이해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더 잘알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합니다.
    베땅이님의 견해가 설득력이 있습니다.
    베땅이님의 해박한 지식에 박수를 보냅니다.
    저는 믿음이 연약한 모태신앙인으로 평생 성전 마당만 밟고 다닌 늙은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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