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신학에 사본학이 필요한 이유

p46몇일 전에 진보신학에서 사본학의 필요성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었는데, 글이 길어져서 블로그로 옮겨왔다. 우리나라에서 사본학은 잃어버린 원문을 찾자는 보수주의 신학자들의 비역사적 열망에 도취된 감이 없지 않지만, 사실 사본학은 우리가 가진 성경 텍스트라는 것이 얼마나 유동적이고 불안정한지를 전제한 해석학적 작업이다. 해석학이 발전하면서 텍스트에 대한 관심이 사라졌고, 자연히 역사비평적 작업들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듯하다. 하지만 나는 수많은 해석학적 연구 결과에도 아직 해석이 의미를 생산해내는만큼 텍스트가 의미를 제한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이런 형이하학적인 상징의 교체는 형이상학적 해석에 전혀 다른 틀을 제공해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서는 이미 많은 연구자들이 시도하고 있으면서 가장 잘 알려진 예를 들어보도록 하겠다.

마가복음 1:41절에 문둥병자를 치료하시는 장면에 보면 예수께서 그를 ‘불쌍히 여기셨다’고 되어있다. 그런데 아마 신학교에서 역사적 예수 관련된 수업 비스무리한 것을 들어봤다면 이 구절이 조금 문제가 있는 구절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어떤 사본에는 ‘불쌍히 여겼다’는 말대신 ‘화를 냈다’고 되어있기 때문이다. 역사적 예수 연구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화를 냈다’는 표현이 연구자들에게 더 선호된다는 것도 알 것이다.

하지만 이제 이것을 안 순간 당신의 교회 생활은 꼬여버린다. 왜냐하면 당신 주변 사람들이 보고 있는 성경에는 ‘화를 냈다’가 아닌 ‘불쌍히 여겼다’는 표현이 실려있기 때문이다. 그 텍스트 위에서 아무리 애를 써봐도 ‘예수의 성질머리’를 해석해낼 수는 없다. 아마도 당신은 누군지 알아먹지도 못할 학자들의 이름을 대가면서 ‘예수의 성질머리’에 대해서 오랜시간 설명하면서 친구에게 스트레스를 주다가 결국 상대방에게 “무식한 새끼 책 좀 읽어라”라면서 개무시하며 끝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당신은 교회에서 ‘이상한 애’가 될 것이다. 그런데 성경에 ‘예수가 문둥병자에게 화를 내시며’라고 되어 있다면 어땠을까?

이건 다른 번역본이나 영어성경을 읽는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번역의 문제가 아니라 헬라어 표준 텍스트의 문제 즉 본문비평적이고 사본학적(이하 사본학으로 통칭한다)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화를 냈다’는 표현은 5세기 본문인 베자사본과 몇몇 소문자사본에 등장하는 굉장히 열악한 조건의 이문이다. 워낙 많은 숫자의 사본이 ‘불쌍히 여긴다’라고 표기하고 있는데다 그 사본들의 가치가 뒤떨어지는 사본들이 아니기 때문에 ‘불쌍히 여긴다’는 표현이 더 원문에 가깝다고 보는 것은 당연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다행히(?) 사본학에는 ‘오래되고 다수인 본문이라고 해서 꼭 원문이라고 할 수는 없다’는 룰 같은 것이 존재한다. 현재 사본학의 태생이 3-5세기 사본의 발견과 함께 중세시대 수도원에서 대량 생산된 ‘수용본문’을 뒤집으면서 등장한 것이기 때문에 이 원칙은 무시하기 어렵다. 그래서 연대나 수량 같은 ‘외적증거’ 이외에 더 필요한 것이 ‘내적증거’라는 것이다. 내적증거에는 여러가지가 있고 학자마다 서로 취급하는 기준이 다르지만 여기서 한가지만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만약에 서로 다른 두개의 표현을 가진 사본이 있다고 할 때, 그 이문이 형성된 것을 설명할 수 없는 것은 원문일 가능성이 높다. 즉, 마가복음 1장 41절의 경우 신앙의 대상인 예수에 대해서 ‘불쌍히 여겼다’는 표현을 ‘화를 냈다’는 표현으로 바꿨을 가능성보다는 반대의 가능성이 더 높다. 왜냐하면 ‘예수가 나병환자에게 화를 냈다’는 표현은 지금처럼 그 당시 필사자에게도 불편한 표현이었을 것이기에 ‘굉장히 신앙적인 이유로’ 혹은 ‘아마도 이 표현은 잘못쓴거겠지’라는 생각으로 원문을 고쳤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불쌍히 여겼다’를 굳이 ‘화를 냈다’로 바꿨을 이유는 쉽게 설명되지 않는다. 즉, ‘화를 냈다’는 표현이 원문일 가능성도 충분히 열려 있는 것이다. 아니, 나는 이 표현이 더 원문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어차피 그런 표현이 있다는 것을 안다면 굳이 성경이 바뀌고 말고 큰 차이가 있을까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사실 이 차이는 꽤 크다. 좋든 싫든 기독교는 성경에 뿌리를 두고 있는 종교이고 아직까지 최고의 가치를 ‘말씀’으로 두고 있는 종교이다. 그런 종교에서 성경의 본문이라는 것은 단순히 글 하나가 바뀌는 의미가 아니라 그에 따른 수많은 해석사의 전환을 의미한다. 새번역과 개역한글 성경의 차이는 단순히 현대어로 번역했다는 의미 이전에 브루스 메쯔거가 개정한 네슬알란트 26판의 변경 사항을 반영했는가 아닌가의 차이이다. 덕분에 새번역에서는 마태복음의 포도원에 간 아들은 둘째에서 첫째로 바뀌었고(마 21장 31절) 요한복음 서론은 요한의 콤마라 불리는 쉼표 하나가 옮겨지면서 ‘그 안에 생명이 있었다’는 표현에서 ‘창조된 것은 그러부터 생명을 얻었다’는 표현으로 바뀌었다(바트 어만은 이 표현의 차이를 영지주의와 전통신학의 갈등으로 본다).

이렇게 본문이 바뀌면 해석의 문제는 사실상 제로 세팅된다. 우리가 다 함께 송영(대게 나라와 어쩌구)이 빠진 주기도문을 외우고 있다면(실제 NLT는 마태복음의 송영을 난외주처리했다)? 마가복음 16장 9절에서 끝나는 짧은 엔딩이 성경에 그대로 반영된다면? 이 내용을 굳이 주저리 주저리 설명할 필요 없이 그렇게 조정된 형태의 본문을 함께 읽는다면? 그 이후의 해석학적 대화는 많은 부분 달라질 것이다..

물론 사본학적 연구결과가 늘 진보적인 결론에 다다를 것이라 생각하지않고, 이런 변화에도 보수적 해석은 언제나 가능하며, 사본학에도 학문적 텃세라는 것이 존재하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읽고 있는 신약성경이 아직 충분히 불안정하며, 의미있는 새로운 시도들이 나타나고 있다는 점에서 많은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나는 이렇게 새로운 해석의 판을 짜는 것이 해석이라는 피로한 작업에 지친듯한 오늘날 진보신학에 큰 도움을 주리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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