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방한기념 : 프란치스코 수도사들의 기도

이것도 제목이 너무 거창하네요 ㅋㅋㅋ 그냥 교황도 오셨겠다, 블로그 방문객 좀 늘려보려는 낙시성 제목입니다. (죄송) 사실 이 글은 예전에 어떤 잡지에 연재하려고 썼던 글입니다. 이 글을 쓰던 당시가 한참 교황의 파격적 행보에 감동하던 시절이라 뭔 얘기를 해도 교황으로 연결되던 때였습니다. ㅋㅋ 그러니 그냥 이해하고 보셔요. 뽀너스로 프란시스코 교황의 베스트컷도 모아봤습니다.

아참, 저는 가톨릭 신도는 아니지만 옆동네 대빵아저씨의 방한을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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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광해]에서 이병헌은 모든 정치적인 이해관계보다 백성을 소중히 여기고 하찮은 기미나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왕의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정말 저런 왕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나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자신의 권력을 버리고 진정 그 힘이 필요한 곳에 헌신하는 모습은 보는 이에게 큰 울림을 전해주는 것 같다. 하지만 권력을 가진 사람이 스스로 그것을 포기하고 낮아지는 것이 인간의 본성에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어서 그런지 이런 모습은 마치 영화 속에서만 볼 수 있는 허황된 이야기처럼 보이는지도 모르겠다.

pope francis그런데 요즘 뉴스를 보고 있으면 영화 속에서나 있을 법한 일들이 자주 들려온다. 얼마 전 새롭게 266대 교황의 자리에 오른 프란치스코 교황 얘기다. 가톨릭 역사에서 첫 남미 출신의 교황인 그는 교황의 자리에 오르면서부터 그야말로 파격의 행보를 걷고 있다. 교황 최초로 성직자가 아닌 여성과 소년원생의 발을 씻겨주고 입을 맞추는 세족식을 시행했고, 희귀병으로 인해 온 몸이 종기로 뒤덮인 환자를 안아주고 입을 맞췄다. 어린아이나 청소년과 스스럼 없이 어울리는 것은 물론, 밤이면 남 몰래 교황청을 빠져나가 노숙자들을 만난다는 뉴스는 정말이지 영화 속에서나 나오는 이야기처럼 들린다. 얼마 전 세계 교회에 보내는 교황권고에서는 교회가 더 더러워지고 상처받은 교회가 되길 주문했다.

이런 교황의 파격행보는 그가 교황이 되면서 아시시의 성인인 프란치스코의 이름을 선택했을 때부터 어느정도 예상되었던 일들이다. 지금까지 교황 가운데 그 이름을 선택한 사람은 그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아시시의 성인 프란치스코는 누구일까?

프란치스코는 13세기에 살았던 수도자인데, 이탈리아의 아시시 지방 사람이라서 흔히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라고 부른다. 많은 성인들이 있지만 아마 개신교와 가톨릭 전통을 통털어서 가장 사랑받는 성인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그 이유는 프란치스코가 일반적인 사람들은 흉내내기 힘든 존경스러운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부유한 상인 집안에서 태어난 프란치스코는 가난한 자들, 특별히 나병환자들과의 만남을 통해 신을 경험한 후 모든 것을 포기하고 수도자의 삶을 살게 된다. 그는 화려함과 권위를 강조하던 당시 중세 교회의 문화에서 자신의 권위를 벗어버리고 거리에서 가난을 실천하며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과 병자들을 돌아보았던 성인이었다. 그의 삶에 감동을 받은 사람들이 프란치스코와 함께 모여 수도회를 만든 것이 지금의 프란치스코회(작은 형제회)이다.

이번 시간엔 이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수사들의 기도를 소개하려고 한다.

하나님께서 편한 길과 반쪽짜리 진리,
피상적인 관계를 불편하게 여기는 심령을 주셔서,
마음 속 깊이 침잠하는 삶을 살게 하시길 빕니다.

하나님께서 불의와 핍박, 인간에 대한 착취에
분노할 줄 아는 심령을 주셔서,
정의와 자유, 평화를 위해 일하게 하시길 빕니다.

하나님께서 아픔과 거절,
굶주림과 전쟁으로 고난당하는 이들을 위해
눈물 흘릴 줄 아는 심령을 주셔서,
기꺼이 손을 내밀어 세상의 고통을 어루만지며
괴로움을 기쁨으로 바꿀 수 있게 되기를 빕니다.

아울러 하나님께서 어리석음의 복을 주셔서
스스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게 하시길 빕니다.
그리하여 다들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일들을 행함으로써
모든 아이들과 가난한 이들에게 정의와 사랑을 가져다 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그리스도교의 경전 가운데 하나인 마태의 복음서에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라는 예수의 말이 전해지고 있다. ‘마음이 가난하다’는 말을 마치 ‘국물이 시원해요’처럼 형식적인 문법에는 맞지 않는 말이다. 그래서 있는 그대로 알아먹으려면 도대체 무슨 의미인지 짐작하기가 힘들다. 그러다보니 학자에 따라 이런 저런 서로 다른 해석들을 내어놓기도 한다. 2000년이 지났지만 아직 이 구절의 의미에 대해서는 명확한 답이 없다. 그런데 이 의미를 짐작해볼 수 있는 방법이 한가지 있다. 바로 예수의 행적을 적은 다른 글과 비교해보는 것이다. 마가라는 사람에 의해서 쓰여졌다고 전해지는 또 다른 복음서는 예수의 말을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라는 말로 적고 있다. 학자들은 마가의 기록이 조금 더 오래되었을 것이고 그것을 본 마태가 ‘마음이’라는 구절을 끼워넣었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아마도 마태는 마가의 기록이 본래 의미를 전달하기에 충분하지 못하다고 느꼈던 것 같다.

그리스도교 뿐 아니라 여러 종교 전통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요소 가운데 하나가 ‘자발적인 가난의 실천’이다. 간단히 말하면 자기 재산을 버리고 자발적으로 가난한 생활을 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수도사나 승려들은 개인 재산을 갖지 못하게 되어 있는 경우가 많고, 심한 경우는 거리에서 구걸(탁발)을 하는 경우도 있다. 프란치스코 수도사들도 마찬가지이다. 프란치스코 수도회 인준회칙은 형제들의 소유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나는 모든 형제들에게 단호히 명합니다 : 형제들은 직접 혹은 간접으로 금전이나 돈을 절대로 받지 마십시오. (인준회칙 4.1)
형제들은 집이나 장소나 어떤 물건, 그 어느 것도 자기 소유로 하지 말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순례자나 나그네 같이 가난과 겸손 안에서 주님을 섬기며 신뢰심을 가지고 동냥하러 다닐 것입니다. (인준회칙 6.1-2)

이런 자발적 가난은 그 자체에 목적이 있기보다는 그런 자발적 가난을 통해 종교적 언어들로 표현되는 정신적 가치를 소유하기 위한 것이다. 그렇다면 물질적 가난이 추구하는 정신적 가치는 어떤 것일까? 법정스님의 유명한 책인 [무소유]에는 법정스님이 난을 키우면서 얻게 된 소유와 집착에 관한 깨달음을 적어 놓은 구절이 있다.

난을 가꾸면서는 산철[僧家의 遊行期]에도 나그네길을 떠나지 못한 채 꼼짝 못 하고 말았다. 밖에 볼일이 있어 잠시 방을 비울 때면 환기가 되도록 들창문을 조금 열어놓아야 했고, 분을 내놓은 채 나가다가 뒤미처 생각하고는 되돌아와 들여놓고 나간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것은 정말 지독한 집착이었다.

우리는 가난해지면 불편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돈이 없으면 없는만큼 할 수 있는 것이 줄어드니까 더 불편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정상처럼 보인다. 하지만 법정 스님은 소유라는 행위가 가져오는 구속과 속박, 집착의 굴레를 발견했다. 그리고 그 소유를 포기하고 스스로 가난해졌을 때 찾아온 것은 불편함이 아니라 집착으로부터의 자유였다. [응답하라 1994] 같은 드라마를 보고 있으면 ‘저 때는 핸드폰도 없이 어떻게 살았을까’라는 생각도 들지만 정작 그 시절에 우리는 그런 것 없이도 잘 살았다. 오히려 2013년의 우리는 SNS에서 실시간으로 다른 이들이 좋아할지 말지를 의식해야 하고, 한두통의 부재중 전화에도 그 사람의 안위를 걱정해야 하는 시절을 살고 있다.

마음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흔히 마음 속에도 뭔가를 더 많이 채워야만 행복해진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다른 이들의 관심, 사랑, 행복, 인정 같은 것들을 끊임없이 소유하길 원한다. 다른 이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걱정하고 자신의 삶을 늘 다른 이의 눈을 통해 확인받고 싶어한다. 그리고 법정스님의 말씀처럼 물질적 소유가 집착을 낳듯이 마음의 소유 역시 집착을 낳는다. 세상을 선하게 이끄는 것보다는 자신이 이상한 사람으로 여겨지거나 비난받을 것을 걱정하고, 정의나 자유와 같은 가치보다 평판과 체면을 먼저 생각하는 것이 마음의 부유함에서 비롯된 결과들이다. 마음의 가난함이란 이런 마음의 재산을 소유하지 않는 것, 다른 사람의 눈을 통해 나의 가치를 평가하고 다른 이들과 비교하면서 내 삶의 결과를 판단하는 일을 멈추는 것이다.

그리고 물질적 가난이 그렇듯 마음의 가난은 이런 집착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킨다. 즉, 다른 이들이 자신을 바라보는 눈에 좌지우지 되지 않고, 그것에 의존하지 않는 삶을 살며, 나의 나됨을 회복할 수 있는 것이다. 마음의 가난은 자아에 대한 성찰에서 올 수도 있고, 신에 대한 철저한 의존에서 올 수도 있다. 아마도 마태는 마가의 기록을 읽으면서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말했던 본래 의미가 이런 마음의 가난함에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마음의 가난은 그저 마음 속에만 머물지 않는다. 앞에서 살펴본 프란치스코 수사들의 기도문에는 마음의 가난이 만들어 내는 결과에 대한 그들의 기원이 담겨 있다.

아울러 하나님께서 어리석음의 복을 주셔서 스스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게 하시길 빕니다.

프란치스코 수사들이 추구했던 마음의 가난은 세상을 향한 그들의 허황된 소망으로 이어진다. 그들은 모두가 할 수 없다고 말하는 일을 할 수 있다고 말하고, 불평등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세상 속에서도 모든 아이들과 가난한 이들에게 정의와 사랑이 베풀어질 것이라고 믿는다. 마음이 가난한 이들은 다른 이들의 평판을 잃어버릴 것에 대해서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루어지지 못할 것을 꿈꾸고 그 꿈꾸는 것이 마치 지금 실재하는 것처럼 산다. 그리스도교에서는 이것을 ‘믿음’이라고 말한다. 전통이 만들어낸 교황직의 위엄이나 체면을 생각하기 보다 지금 자기 앞에 무릎꿇은 종기 투성이 병자를 껴안는 것이 가난한 마음이다. 예수는 그런 사람들이 진정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사람은 사회적인 동물이라 언제나 다른 이들의 영향을 받는다. 조금 더 좋은 평판을 얻기 위해 싫은 것도 참고 견디는 것이 인간이고, 세상에 치이고 깍이면서 자신의 꿈도 겸허하게 포기하게 되는 순간 그것을 철들었다고 말하는 것 또한 인간이다. 하지만 그런 인생은 우리에게 행복을 약속해주지 않는다. 인간이 사회적이라는 것은 우리가 그 사회에 어울려 사는 것을 현실로 받아들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우리가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오늘도 불가능한 꿈을 꾸고 있다면, 세상을 조금 더 아름답게 만들 수 있다고 믿는다면, 프란치스코 수사들의 기도를 함께 해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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