래리 웰본(Larry L. Welborn) 강연 후기

한국식으로 하자면 ‘잘났다(Welborn)’ 정도로 번역될 수 있는 웰본 교수가 지난 4일 민중신학회와 제3시대그리스도교 연구소 초청으로 강연회를 가졌다. 주제는 고린도후서 8장에 등장하는 평등(Equality)의 개념을 통해 예루살렘을 위한 바울의 모금행위의 의미를 새롭게 이해하는 것이었다. 바울과 경제에 관한 문제는 스티브 프리센의 글을 읽은 이후로 잠시 관심을 가졌던 주제인지라 기대하는 마음으로 강연에 갔다. 강연의 주제는 “That there may be equality”:The contexts and consequeces of a Pauline Ideal이었다.

래리웰본

처음 가서 놀랐던 것은 그다지 넓지도 않은 한백교회당에 외국인들 여러명이 자리를 잡고 앉아있었던 것이다. 뭐지? 강연 들으러 온건가? 앉자마자 누가 말이라도 걸까봐 열심히 바쁜 척을 했다. 근데 왠걸… 발표문도 영어다. 물론 강연은 통역과 함께 진행됐지만 영어 논문을 그대로 나눠주는 이 센스를 뭐라고 해야할까? ㅋㅋㅋ 다행히도 논문은 이미 인터넷에서 다운 받아서 읽고 간데다 우리나라 사람들을 배려해서인지 웰본 교수가 굉장히 천천히 그리고 또박또박 발음을 해주어서 이해함에 큰 무리는 없었다.

웰본 교수의 발표의 주된 주제를 간단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바울의 ισοτης개념은 70인역이 아니라 헬라 문화로 부터 나온 것이다. 웰본 교수는 ισοτης의 개념을 크게 우정, 정치, 철학이라는 세가지 영역에서 살펴본다.
2) 바울이 사용하는 ισοτης는 기본적으로 당시 사회의 ‘불평등한 우정관계’의 배경에서 이해해야 한다. 불평등한 우정관계는 평등(equality)을 회복하기 위해 적게 가진 자(수혜자)가 더 많은 애정을 (후원자에게) 베푸는 ‘뒤집힌 상대성(inverse proportion)’을 요구한다. 바울은 이 구조를 뒤집어 가난한 예루살렘교회를 영적인 부를 지닌 더 나은 포지션으로, 고린도교회를 많은 것으로 갚아야 하는 더 낮은 포지션에 위치시킨다. 당시 사회에 이런 바울의 요구는 사회근간을 위협하는 것으로 들렸을 것이다.
3) 정치적인 차원에서 당시 유대 공동체는 그리스의 폴리스와 동등한 권리를 갖지 못했다. 로마 도시인 고린도와 로마 시민인 고린도의 사람들은 식민지의 지배민족인 예루살렘 교회보다 정치적으로 우월한 위치에 있었다. 하지만 바울은 그 관계 역시 뒤집는다.
4) 당시 철학에서는 세계가 평등하게 창조되었으며 그것은 신에 의해 부여되는 것이라 이해했다. 하지만 바울에게 평등은 스스로 가난하게 된 그리스도 사건에 참여하는 인간의 행동을 통해 이뤄지는 것이다.
5) 바울은 평등의 개념을 경제의 영역으로 끌고 들어와 서로 다른 사회적 클래스 사이의 자발적 가난이라는 주제로 연결시킨다. 그리고 그 결과 드러나는 바울의 목소리는 우리가 이해하는 어떤 바울의 모습보다 더 급진적이다.

래리웰본
래리웰본

결론은 바울이 당시 사회가 가진 평등의 개념구조를 뒤집음을 통해서 경제적인 평등을 구현하려 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특히 스티브 프리센에 대한 그의 평가가 눈에 띄었다. 왜냐하면 내가 이 주제에 대해서 처음 접한 글이 프리센의 글이었기 때문이다. 웰본은 프리센의 해석이 당시 사회의 불평등 문제를 간과했다고 평가한다. 여기서 프리센에 대한 변명을 조금 하자면, 프리센은 바울의 연보를 가난한 교회 사이에 시행된 대안 경제 행위로 이해한다. 그가 이렇게 이해하는 이유는 바울 공동체에 대한 그의 분석에 근거하는데, 그의 분석에 따르면 바울 공동체는 중산층 이하의 사람들이 속한 가난한 교회였다. 교회 내에 존재하는 부자들에 대한 환상은 대부분 사도행전의 묘사에 따른 것일 뿐, 바울 서신에 나타나는 인물들은 중산층 이하 혹은 최저 생계 수준의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이런 분석은 고린도 교회도 마찬가지다.

이런 근거로 프리센은 바울의 연보가 당시의 후원자-수혜자 시스템을 통한 로마제국의 경제 시스템을 거부하는 가난한 집단 내부의 대안 경제 시스템이었다고 말한다. 웰본이 바울의 연보를 서로 다른(불평등한) 집단 간의 역전된 후원구조로 보는 반면 프리센은 동일한 집단 내에서 제국의 경제 구조를 대체시키는 행위로 보는 것이다. 내가 프리센을 변호하는 이유는 웰본이 주제구절로 사용하고 있는 고후 8:13-15에서 특별히 14절이 웰본의 해석보다 프리센의 해석을 지지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14절에서 바울은 두 교회 사이의 관계가 마치 상호적인 것처럼 묘사한다. 하지만 웰본은 그 구절의 상호성을 거부한다.

지금 여러분의 넉넉한 살림이 그들의 궁핍을 채워주면, 그들의 살림이 넉넉해질 때에, 그들이 여러분의 궁핍을 채워 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평형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8‬:‭14‬)

마지막에 이 내용에 대해 질문할 기회가 있었지만 웰본의 대답은 만족스럽지 못했다. 통역하시는 분이 성서학 전공자가 아니신지 내 질문을 잘 이해를 못하셨다. 영어가 안되는 내가 원망스러운 순간이었다. 옆에 앉아 계시던 김판임 교수님도 내 질문과 같은 맥락의 질문을 하셨는데, 역시나 만족하지 못하셨다. 사회학과 신약학에 동시에 능통한 어떤 이는 웰본의 결론이 만족스럽지 못한 듯 했다. 웰본의 재분배 개념이 겨우 강제로 세금 걷어서 나눠주는 수준에 그쳤다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재분배의 개념은 수입이 아닌 생산의 문제를 말해야 한다는 의미로 들렸다.

21세기에 사는 우리가 2000년 전에 쓰여진 성경을 읽다보면 아무리 애를 써도 ‘고대’라는 시대적 틀을 넘어가지 못한다. 그렇다고 21세기의 개념들을 쑤셔 넣으면 본문과 어울리지 않는 돌연변이가 탄생한다. 바울이 자본주의를 알리 만무하고, 예수가 21세기의 경제나 문화개념을 이해할리 없다. 성서학을 하는 입장에서 늘 안고가는 난점 중에 하나도 이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1세기의 예수와 바울을 21세기로 데려올 수 있는가? 성서학을 하는 입장에서는 재미있는 시간이었지만 성경을 대하는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는 고민이 깊어지는 강연이었다.

포덤대학 웰본 교수 소개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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