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적’이라는 ‘악’에 대하여

이 글은 페이스북에 썼던 내용을 조금 읽기 편하게 옮겨 온 것입니다.
무엇보다 이 글은 동성애를 ‘성경적’ 근거로 반대하시는 분들에게 쓰는 글입니다.
이 글에 베이스가 되는 몇몇 자세한 내용들(예를 들어 성경의 통일성, 성경중심주의 전통의 취약성, 죄와 정죄의 관계, 동성애에 대한 성경의 언급 등에 대한 내용)이 빠져 있기 때문에 이 글 자체로는 큰 설득력이 없을 것이라 생각되고, 많은 오해가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성경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그리고 지금 우리는 무엇을 잊고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하고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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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적 근거로 무언가를 결정하는 분들이 있는데, 사실 성경은 그다지 일관되지 않습니다.

성경은 완전하신 하나님의 완전하신 말씀이 아니라 완전하신 하나님에 대한 불완전한 인간의 기록입니다. 성경은 스스로 모순되며, 갈등하고, 투쟁합니다.
성경이 가치있는 이유는 66권이 일관되게 같은 말을 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서로 모순되고 갈등하는 목소리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 속에 역사하신 것을 증언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통해 드러나는 하니님은 우리가 보기에 일관되고 내 입맛에 맞는 이해하기 쉬운 하나님이 아니라 내가 옳다 생각하는 틀을 부수시고 내가 죄인이라 미워하는 이를 감싸 안으시며 내가 실패라 여기는 순간을 통해 승리하시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크신 하나님입니다.

“왜 간단히 성경에 써있는대로 믿지 않느냐?”고 뭐라 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분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성경이 많은 것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지구가 태양을 도는지, 태양이 지구를 도는지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아이폰이 성경적인지 아닌지도 말하지 않습니다.
동일하게 성경은 동성애라는 게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쓴 책입니다.
성경대로 하자면 우리는 침묵하는 것이 맞습니다.

성경이 말하지 않는 것에 대해 ‘성경적으로’라는 이름으로 하나님보다 앞서 사람들을 정죄하는 것은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의 근거는 종이와 글자로 된 성경책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죄인인 우리를 아무런 조건없이 끌어 안으신 하나님의 사랑의 사건입니다.
그 ‘조건 없음’에는 하나님을 믿는지 아닌지의 조건도 없으며, 그 사람이 남자인지 여자인지, 트렌스젠더인지에 대한 조건도 없습니다.

저 사람은 용납받지 못할 죄인이지만 나는 그럴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만큼 큰 죄는 없습니다.
우리에개 그 사람을 죄인이라 말할 권리가 있는 것일까요?
다른 이를 향하여 ‘성경적’이라는 정당성을 내세우는 것만큼 그리스도의 은혜를 배반하는 행동은 없습니다.

 

의인을 위해서라도 죽을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더욱이 선한 사람을 위해서라도 감히 죽을 사람은 드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이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실증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로 의롭게 되었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에서 구원을 얻으리라는 것은 더욱 확실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일 때에도 하나님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었다면, 화해한 우리가 하나님의 생명으로 구원을 얻으리라는 것은 더욱더 확실한 일입니다.(롬 5:7-10)

스스로 의롭다고 확신하고 남을 멸시하는 몇몇 사람에게 예수께서는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다. 한 사람은 바리새파 사람이고, 다른 한 사람은 세리였다.바리새파 사람은 서서, 혼자 말로 이렇게 기도하였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나는, 남의 것을 빼앗는 자나, 불의한 자나, 간음하는 자와 같은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으며, 더구나 이 세리와는 같지 않습니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내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그런데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우러러볼 엄두도 못 내고, 가슴을 치며 ‘아, 하나님,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의롭다는 인정을 받고서 자기 집으로 내려간 사람은, 저 바리새파 사람이 아니라 이 세리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눅 18:9-14)

2 Comments

  1. 성경은 일관적입니다. 단지 그것을 호라오 하지 못하고 옵타노마이 하니까 일관성 없이 보이는 거지요.

    1. 그럴리가요. 성경을 편견없이 다시 잘 읽어보세요. ㅋㅋ 그리고 οπτανομαι는 보는게 아니고 나타나는겁니다. 사도행전 1:3에 딱 한번 나오고요. 어디서 호라오와 옵타노마이의 차이에 대해서 배우셨는지 모르겠습니다만… 헬라어는 그렇게 쓰시면 안돱니다. 혹 누구한테 배우셨다면 그 분께 쫌 따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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