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책읽기 [9] 리부팅 바울 : 권리 없는 자들의 신학을 위하여 _ 김진호

리부팅 바울컴퓨터를 사용하다가 가끔 문제가 생겨서 도대체 이놈의 컴퓨터가 말을 듣지 않을 때, 굉장히 단순하게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하나 있다. 바로 컴퓨터를 껐다켜는 것이다. 컴퓨터에 문제가 있는 것이라면 깔끔하게 버리고 새로 살텐데… 그러기엔 분명 본체에는 문제가 없는 것 같고, 정상적으로 쓰기엔 도대체 제대로 돌아가는 것이 없을 때, 왼쪽 아래 윈도우 키를 누르고 이렇게 외친다. “리부팅!!!”

아는 사람이 얼마나 있는지 모르겠지만, 이 제목을 처음 봤을 때 김진호라는 이름이 가지고 있는 이미지와 뭔가 잘어울린다는 생각을 했다. 다시보기라던가, 개혁같은 말대신 바울을 ‘리부팅’한단다. ㅋ 뭔가 근본부터 뜯어고치겠다는 의지가 담겨있는 제목이라 하겠다. 제목처럼 이 책은 지금까지 우리가 알아왔던 바울과는 굉장히 낯선 1세기 디아스포라 유대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의 책 중이 가장 재미없는 책이라는 지인의 평을 스스로 서문에 소개할만큼, 이 책은 기존에 김진호 목사님의 색깔과는 뭔가 어울리지 않는 듯한 글이다. 마지막에 나오는 ‘덧붙이는 글’이 가장 저자스럽다고 해야할까? 그렇다고 비추라는 뜻은 아니다. 전통적인 바울 이해에 익숙해져 있는 사람이라면 제목처럼 바울에 대한 생각을 깔끔하게 리부팅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저자의 글맛을 기대하며 책을 구입한 사람이라면 조금 책값이 아까울지도 모르겠다.

이 책의 기본적인 내용은 김창락 교수가 주장했던 ‘투쟁하는 바울’이라는 이미지의 연장선상에 있다. 바울서신을 ‘교리’라는 틀에서 읽는 것이 아니라 ‘논쟁’이라는 맥락에서 읽는 것이다. 문제는 그 ‘논쟁’의 성격이 무엇인가 하는 것인데, 김창락 교수는 ‘복음을 위한 투쟁’이라는 말로 논쟁의 성격을 약간 뭉뚱그린 측면이 없지 않다. 이에 대해 저자는 바울 서신의 사회문화적 재구성을 통해 바울의 투쟁의 성격을 가난한 이들, 소외당하는 이들, 비존재적 존재를 위한 투쟁임을 밝혀내고 있다. 바울의 서신들을 논쟁보다는 목회적으로 읽어내는 것이 요즘 추세인 점을 감안할 때 저자는 확실히 성서신학의 메인스트림과는 다른 목소리를 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저자의 바울 해석이 민중신학적 기반 위에 있기 때문이다. 물론 민중신학이 여전히 (그리고 앞으로도) 비주류이긴 하겠으나 최근들어 민중신학이 관심을 가져왔던 영역들이 새롭게 주목받고 있는 상황을 생각한다면 저자의 새로운 바울 해석은 분명 귀기울여볼만한 가치가 있다 하겠다.

여기서 저자가 바울서신의 사회문화적 성격을 재구성해내는 방식이 상당히 독특한데, 이런 독특함은 바울신학의 주된 재료인 사도행전을 사용하는 방식에서 발생한다. 저자는 바울서신을 해석하면서 사도행전의 자료들을 적극적으로 사용한다. 소제목들만 보면 바울서신에 대한 해석들이 담겨있을 것 같지만 사실 이 책 내용의 대부분은 사도행전에 대한 것이다. 저자가 이 책을 통해서 시도하고 있는 것은 바울서신의 내용보다는 그 배경이 되는 사도행전 내용에 대한 역사적 재구성이다. 학자에 따라서 사도행전의 역사성에 대한 견해가 다르지만 그 가운데서도 저자가 사도행전을 사용하는 방식은 굉장히 새롭고 낯설다. 마치 지금까지의 바울 연구사를 리부팅하기라도 하듯 저자는 바울 서신 연구의 일반적인 전제라고 여겨져왔던 것들을 역사학자의 눈으로 하나씩 재검토 한다. 저자가 전해주는 바울의 이야기의 시작은 예루살렘이 아닌 다메섹이며, 바울서신의 배경은 독립된 집단으로서의 교회공동체가 아닌 유대교의 이민자 자치단체인 디아스포라 회당이다. 마치 길 잃은 미로를 빠져나가기 위해 첫번째 갈림길로 되돌아가는 사람처럼 이런 기초적인 사실관계의 재구성은 우리로 하여금 지금껏 알지 못했던 낯선 바울을 만나게 한다.

이를 통해서 저자는 바울의 이야기 속에서 묻혀버렸던 당시의 고통받는 이들의 이야기를 바울서신의 전제로 끌어 올린다. 수차례의 전쟁으로 정신병에 시달리는 빌립보의 프뉴마 퓌토나 들린 여자, 주인에게 버려져 먹고 살 길을 잃어버린 고린도의 비공식적 해방노예들, 동포들의 공동체 속에서도 이방인 취급을 받아야 했던 갈라디아의 가난한 자들, 적극적인 반로마주의자들에 의해 희생될지 모를 로마의 민중들. 저자는 바로 이들이 바울의 관심이며 바울 서신의 사회적 배경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바울의 의인론이나 종말론은 바로 이런 사회적 배경 속에서 민중에 대한 편듦과 권세에 대한 저항으로 읽혀져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가 새롭게 구성하는 사도행전의 이야기들은 분명 굉장히 재미있고 2000년을 뛰어넘어 오늘날과도 맞닿아 있다. 하지만 과연 저자는 새롭게 그려진 밑그림 위에 올바른 색깔을 칠하고 있는가? 저자의 화려한 글 솜씨에 감탄하면서 읽다보면 깜빡 잊어버리게 되는 질문이다. 저자가 그려내는 바울의 그림은 사도행전에서 보여지는 바울과 비교했을 때 굉장히 낯설다. 문제는 저자의 바울초상이 바울 자신에게도 상당히 낯설게 느껴진 것 같다는 점이다. 하나만 예를 들면, 저자는 빌립보서를 해설하면서 빌립보 사역에서 바울이 만났던 귀신들려 점치는 여종과의 만남에 대해 쓰고 있다. 사도행전은 여기서 바울이 이 여종을 치유한 이유가 ‘귀찮아서’라고 쓰고 있는데 이 구절을 근거로 저자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바울은 아직은 낯선 도시 빌립보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겠다는 생각에 몰두한 나머지 자기 앞에 다가온 사람의 고통을 미처 살피지 못했다. 또한 그녀의 고통 뒤에 가려진 빌립보 사람들의 고통을 짐작하지 못했다. 그런 점에서 바울의 빌립보 선교는 실패였다. 그는 빌립보에서 길을 잃었다.(93페이지)

하지만 이를 토대로 저자가 빌립보서의 ‘그리스도 찬가’를 해석하는 방식은 굉장히 의아하다. 저자는 빌립보서의 그리스도 찬가가 이 여인을 귀찮아했던 자신의 ‘자만’에 대한 성찰이라고 말한다. 자신의 자만에 대한 반성이 그리스도의 겸손을 강조하는 찬가로 나타났다는 말이다. 그런데 정작 빌립보서에서 나타나는 바울의 모습이 그렇게 겸손하지 않다는게 문제다.

형제자매 여러분, 다 함께 나를 본받으십시오. 여러분이 우리를 본보기로 삼은 것과 같이, 우리를 본받아서 사는 사람들을 눈여겨보십시오.(빌 3:17)

바로 앞부분에 악한 일꾼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자신의 자랑거리들을 주~ㄱ 늘어놓는 것은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바울은 자신을 빌립보인들의 신앙의 모범임을 강조한다. 여기서 ‘나를 본받으라’는 바울의 권면은 다른 서신에도 등장하는 바울의 관용적인 표현으로, 단순히 자기 자랑을 넘어 자신을 본받는 것이 신적 정당성이 있음을 주장하는 내용이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사람인 것과 같이, 여러분은 나를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고전 11:1)

즉, 빌립보서에 등장하는 그리스도 찬가는 자신이 그렇게 행동하지 못한 것에 대한 반성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그러셨던 것처럼 나도 그렇게 너희에게 겸손하게 행했다는 자신의 정당성에 대한 주장이다. 악한 일꾼과는 달리, 수많은 자랑거리에도 그것을 내세우기보다 그리스도를 위해 이 모든 자랑거리를 해로 여겼던 자신의 사역을 그리스도의 겸손과 비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바울의 당당함은 저자가 그려내는 낯선 바울의 초상에 바울 자신이 동의할 수 있을지를 물어보게 만든다.

오늘날의 사회적 문제 상황 속에서 적절한 대답을 내어놓지 못한 채 낡은 책속에만 갇혀있던 바울을 새롭게 꺼내놓았다는 점에서 저자의 낯선 바울은 분명 큰 울림을 준다. 이런 저자의 관심은 오늘날 영국이나 미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바울에 대한 새로운 관심과 맥을 같이하면서 동시에 한국적 상황 속에서 일어난 민중신학의 관심을 새로운 논의의 장으로 끌어올렸다는 점에서 오늘날 바울을 이해하는 점에서 큰 변곡점에 서 있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컴퓨터를 리부팅하고 나면 다시 컴퓨터를 정상적으로 사용하기까지 꽤 많은 로딩시간이 걸리듯(요즘은 쫌 짧아지긴 했지만) 저자가 시도하는 바울의 리부팅도 정상적으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아직 시간과 논의가 더 많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Leave a Comment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Content Protected Using Blog Protector By: PcDro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