낸시랭의 신학펀치 구약편(5,6회) 리뷰

구약의 주제로 들어가니 드디어 이 프로그램의 한계가 보이기 시작했다.

우선 좋은 얘기부터 하자면, 패널을 신약학자 2명에서 신약학자 1명, 구약학자 1명으로 교체한 것은 좋은 선택이다. 구약 주제에 있어서 한정된 패널 구성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이전보다 좋아보였다. 내 말을 듣고 바꾼 것은 아니겠지만 ㅋ 문제는 신약학자의 역할을 해줘야 할 김학철 교수가 신약학자처럼 행동하지 않는다는 정도…? 구약을 주제로 다룬 두 차례의 방송에서 김구원 교수라는 캐스팅은 썩 괜찮았다고 본다. 흔히 복음주의권의 소장학자들 가운데 꽤나 돋보이는 인물이니, 적절한 캐스팅이라고 해도 좋겠다. 문제는 그의 예능감이겠지만…ㅋㅋ

이번 두번의 방송에서 핵심이 된 논점은 두가지다.
1) 사랑의 하나님이 어떻게 잔인한 살육을 명했는가?
2) 구약은 주변의 비슷한 얘기를 배낀 신화인가?

두 가지 주제 모두 기독교인이 성경을 읽다가 ‘어! 이건 뭐지?’라며 의문을 갖게 되는 부분들이고 안티기독교가 기독교를 공격할 때 주로 사용하는 개념이니 주제 선정은 적절했다고 보여진다. 하지만 교수들은 이 주제에 바로 답하지 않고 자꾸 저자의 문제와 성경을 읽는 방법에 대한 얘기로 돌아간다. 그러면 낸시랭은 다시 똑같은 질문을 할 수 밖에 없다. 이런 패턴이 계속 반복됐다. 지루할 정도로… 내 생각에 이 문제는 낸시랭이 무식해서 그런게 아니라 두 교수가 답을 피해 도망다니고 있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답을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답을 했지만 질문과 다른 답을 했다. 그들의 답이 틀린 답은 아니지만 그들은 왜 다른 대답이 필요한지 그 차이를 명확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이 반복되는 몰이해의 순환을 풀어줄 고리는 없는 것일까?

간단하다. 성경은 역사가 아니라 신화라고 전제하고 넘어가면 된다. “하나님이 정말 그런 잔인한 명령을 하셨을까요?”라는 물음에, “아니요, 그렇지 않을겁니다. 성경은 역사 기록이 아니라 신화입니다.”라고 대답했어야 했다.  ‘현대적인/과학적인 진리가 아니다’, ‘신화가 다 곧 거짓말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같은 설명 전에, 성경은 역사가 아닌 신화이며, 실제 하나님이 하신 말을 받아 쓴 것이 아니라 저자들이 생각하기에 그럴 것 같은 하나님에 대해서 적은 것이라고 말하면 얘기가 편해진다. 결국 우리는 성경에 써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진짜 하나님이 하신 것인지 알 방법이 없고, 저자가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했는지만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실제 하나님의 성품과 다를 수 있다. 심한 경우, 그것은 저자의 상상 속의 이야기일 수도 있다. 물론 교수님들이 그런 얘기를 안한건 아니다. 사람들이 교수님들의 말 속에서 어떤 부분을 오해하고 있는 것인지 눈치채지 못할만큼 최대한 돌려돌려, 조심조심 말했을 뿐이다. 그들은 “성경은 신화입니다”라고 전제할 뿐, 말하지 않았다. 물론 그렇게 말하지 못하는 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태도는 앞으로의 방송에서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전제가 다른 두가지 대화를 마치 같은 대화인 듯 끌고 가는 것은 결코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럼 왜 그렇게 안하냐고? 우리나라 기독교 문화, 그것도 기독교 방송이라는 곳에서 그렇게 말하면 자유주의자가 되고 이단이 되거든.

교수들이 자꾸 하나님이 아니라 저자에 대해서 말하는 이유는, 텍스트는 사실의 기록이 아니라 사건에 대한 해석의 결과물이라는 것이 현대 역사학의 기본적인 전제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받아적은 기록이 아니라 저자가 이해한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렇기에 거기에는 역사적인 왜곡도 있고 주관적인 편견도 있다. 심하게 말해 텍스트에는 실재로서 하나님이 담기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낸시랭처럼 “어떻게 하나님이 그런 잔인한 명령을 내리실 수 있나요?”라고 물으면, 그 물음 자체가 잘못된 물음이 된다. 하나님이 실재 사건으로써 그런 발화행위를 했는지 우리는 알 방법이 없다. 우리는 그 음성을 들었다는 누군가의 증언만을 가지고 있고 그것은 역사 그대로의 역사가 아닌 누군가의 삶의 상황과 성장 배경, 언어 등에 의해 해석된 역사이다. 그렇기 때문에 당연히 그것은 과학적 사실이 아닐 수 있다. 교수들이 말하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은 바로 이 저자가 고백하는 하나님의 모습이 하나님의 말씀으로써 가치를 가진다는 것이다. 그것을 직접 하나님이 말씀하셨거나 역사적이고 과학적인 사실 그대로가 담겼기 때문이 아니다(물론 여기에는 정경의 가치에 대한 문제가 또 걸려 있지만 여기선 넘어가도록 하자). 문제는 그런 차이를 설명하지 않고 ‘실재’에 관해 묻는 이에게 ‘해석’에 대한 답을 하고 있으니 이야기가 겉돌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여기서 ‘텍스트 속에 실재가 있는가?’라는 문제는 아직 그렇게 쉽게 결론내리기엔 많은 반론이 따를 수 밖에 없다. 아마 두 교수도 내가 단정해버린 그들의 관점에 대해 불만이 많을 것이다. ㅋ 어쨌든, 내 생각에 “그럼에도 정말 하나님이 그렇게 말하셨는가?”라는 낸시랭의 물음은 여전히 의미있다. 교수들은 이 물음에 답해야 한다.

이번 구약편에서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잔인함이 고대근동의 전쟁문학적 표현들과 유사하기 때문에 하나의 문화로써 이해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이 하나님에 대한 변호가 된다고 생각해야할까? 6화에서 김학철 교수는 창세기의 천지창조이야기가 고대 근동의 창조설화들과 같은 소스를 사용하지만 전혀 다르게 풀어내고 있다는 점에서 거기에 담긴 소스가 아닌 독특한 줄거리에 나타난 저자의 의도를 봐야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바벨론 포로기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창세기 이야기를 통해서 표현하려고 했던 하나님 이해가 담겨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저자의 의도라는 점에 방점을 찍은 것이다. 그렇다면, 창세기처럼 구약의 전쟁이야기는 고대근동의 전쟁문학과 다른 줄거리적 독특성을 가지고 있는가? 내가 보기엔 그렇지 않다. 혹 그렇다치더라도, 김학철 교수와의 견해와는 달리, 줄거리적 독특성에 나타난 의도와는 별개로, 구약의 저자가 고대근동의 표현방식을 빌려와서 하나님을 묘사하고 있다는 것은 결국 그런 표현에 나타난 하나님의 모습이 그들이 이해한 하나님의 모습 혹은 모습 가운데 일부라는 말이다. 쉽게 말해, 그들이 서로 다른 성격으로서의 하나님을 말하지만, 동시에 공통적으로 하나님이 세상을 만들었다는 것, 즉 창조자로서의 하나님이라는 이미지를 공유하고 있었다. 이것이 김구원 교수가 말했던 인류 공통의 경험이라는 개념의 한 측면이다. 즉, 구약의 전쟁 이야기가 고대 근동의 전쟁 문학과 줄거리적 차이를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들에게 있어서 전쟁에서 적을 말살하는 강한 하나님이라는 이미지는 공유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저 하나의 말버릇이 아니라 그 시대의 문화와 상황이 그들의 하나님 이해에 영향을 미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크로산은 이런 것들을 인류의 폭력성이 성경에 반영된 것으로 보고 예수의 비폭력을 그런 이미지와 구분하려고 시도하는 것이다. 그들의 변명은 안타깝게도 구약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하나님의 모습에 무죄선고를 내리지 못했다.

앞에서 구약에 들어가면서 보이기 시작했다는 이 프로그램의 한계라는 것이 이런 지성적인 해결을 통해 보수적인 성경관을 유지하려는 사람들이 빠지게 되는 오류이다. 이런 이들은 역사학적 연구의 전통을 따라 성경 66권을 역사적 결과물로 이해하면서도, 그 역사적 결과물 속에 역사하는 ‘성령의 감동’을 ‘단일 저자’라는 틀 속에 가두고 싶은 욕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쉽게 말해 원래 서로 다른 저자가 다른 문화와 환경 속에서 기록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서로 다른 하나님 개념을 그렸을 것이라고 이해해야 하지만, 그럼에도 66권은 성령이라는 한 명의 저자가 쓴 것처럼 같은 하나님 이해를 담고 있어야만 그것이 성령의 감동인 것처럼 여긴다는 뜻이다. 이것은 성령의 감동을 과도하게 제한시키는 것이면서 동시에 역사학적 결과물을 교리적 틀 속에 끼워다 맞추려는 헛된 욕망이다. 구약에 나타난 잔인한 하나님은 마가복음이 말하고 싶었던 예수의 하나님은 같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도 다른 모습의 하나님이다. 물론 이렇게 말하면 아마 영지주의로 몰릴 것이다. ㅋㅋㅋㅋ(엄밀히 말하면 이건 영지주의는 아니다.)

물론 거기 나온 교수들이 그렇게 믿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역사학적 틀 위에서 사고하는 이들의 해답을 신앙의 틀 속으로 가져오는 적절한 방법을 아직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그러니 그 공백을 자꾸 공부하라는 말로 메우려 하는 것이다. 하지만 시청자들의 지적수준이 교수들의 수준까지 올라오는 것만이 성경을 제대로 읽는 것인냥 말하는 것은 좋지 못하다. 이런 그들의 요청은 다시한번 그들의 성경 읽는 방식이 자신들이 말하는 ‘인간의 글로서 성경 읽기’와 모순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들의 읽기는 전형적인 ‘학자적 읽기’이다. 섹스피어 전공자가 섹스피어를 읽는 것만이 올바른 섹스피어 읽기이고 서점에서 섹스피어를 사서 읽는 이의 섹스피어 읽기는 잘못된 읽기라고 말해야 하는가? 이것은 그들이 비판하는 ‘신의 글을 읽는 방법’이지, 그들의 말처럼 ‘인간의 글을 읽는 방법’은 아니다. 성경을 ‘인간의 글’로 읽는다는 것은 해석의 유연성이라는 것이 존중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 텍스트의 ‘올바른’ 해석이라는 환상은 자칫 텍스트의 해석 주체를 지식인으로 한정하는 오만으로 연결될 수 있다. 이것은 현대 보수적 기독교가 범하고 있는 성직자 중심의 성경해석의 21세기 합리주의 버전일 뿐이다.

애초에 이 프로그램이 기획된 것이 그 의도이니 그 문제에 대한 해답을 가지고 있을리 만무하다. 그러니 더 기다려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 하지만 기다릴래도 일단 재미가 없다는 게 문제다. 낸시랭이라는 캐릭터를 더이상 되바라진 학생 정도의 이미지로 낭비하지 말길 바란다.

10 Comments

  1. 자유주의자가 되고가 아니라 자유주의니간 그렇게 말하는거임 자유주의가 아닌 누가 저렇게 말함? 보수주의에선 저런 결론 자체가 나올 수 없는데

    1. 자유주의란 19세기 유럽과 20세기 초반 미국에서 발흥한 특정 신학사조를 일컫는 말입니다. 그 당시 신학이 아닌 다른 신학성향에 대해 자유주의라고 하는 것은 용어 사용의 오류입니다. 어떤 사람의 의견이 ‘자유주의적이다’ 혹은 ‘자유주의와 유사하다’라고 말할 수는 있지만 ‘자유주의다’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한국의 보수 기독교에선 자기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을 비판하고 편가르기 하는데 자유주의라는 말을 쓰지요.
      보수주의의 반대말은 자유주의가 아닙니다. 보수 안에도 근본주의와 복음주의 개혁주의 등 그 서로 다른 신학성향을 가진 집단이 있습니다. 그리고 낸시랭의 신학펀치에 나오는 교수님들은 미국적인 색깔이 짙은 복음주의 신학노선에 계신 분들입니다. 물론 여기서 복음주의란 ‘복음적이다’, ‘신실하다’는 뜻이 아니라 빌리그레이엄 같은 미국부흥운동과 함께 발생한 특정 신학성향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이 신학성향의 특징 중에 하나가 신앙과 이성이 공존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지요. 그래서 저런 방송도 하고 그러시는 겁니다.
      진짜 자유주의자들은 저런 얘기 안합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이라니요. 어디서 그런 검증되지 않을 비이성적인 말을 합니까? 자유주의가 뭔지는 알고 말하는거냐고 하셨는데, 질문하신 분이야 말로 자유주의에 대해서 공부를 해보시는 것이 어떠실지… 아니, 굳이 그럴 것 없이 보수주의나 복음주으이에 대한 공부라도 쫌 해보시길 바랍니다.

  2. 필력이좋다는건 이해가안되네요 그저 횡설수설.. 신학펀치에나오는 학자들의 새로운버전같네요

    1. 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부족한 부분은 앞으로 더 보완해가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필력이 좋다는 것은 확실히 과찬이지요.^^ 그런데 이해가 안가시는 부분이나 횡설수설하고 있는 부분을 조금 설명해주시면 제가 글을 쓰거나 수정하는 데 더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누구도 자기가 잘못 쓴 걸 알면서 횡설수설 하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자신이 쓴 글을 읽다보면 논리가 부족한 부분이나 안맞는 부분이 잘 안보입니다. 그래서 다른 분들이 글을 읽고 잘못된 부분에 대해서 짧게라도 답글을 달아주시면 글 쓴 사람에게는 많은 도움이 됩니다. 조금 더 자세한 설명 부탁드립니다.

  3. 안녕하세요. 지나가다가 댓글을 답니다. ‘신의 글을 읽는다’고 믿고 있고 또 계속 믿고 싶은 크리스천입니다. 실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붙이기도 부끄럽게 기도도 제대로 안 하고 있네요;; 방송에 대한 평을 찾다 보니 어떤 분들이 이 방송에 자유주의의 낙인을 찍는 걸 봤습니다. 정말 보수적인 교회를 다니는 제가 듣기에도 이 정도 논리가 자유주의라면 굳이 우리 교회에서 그 사상에 대해 불쾌함을 가져야하나 고민했었는데 애초에 자유주의 신학을 하시는 분들이 아니었군요. ^^ 교회엔 대놓고 물어볼 수 없는 부분들을 거침없이 질문할 수 있고 성경 속의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 생각하게 만드는 방송이라는 점에서 좋게 보고 있습니다. 이게 방송의 의도라면 뭐 저는 착실히 의도된 바대로 진행 중입니다. 아는 분들은 여러 부분에서 부족함을 느끼겠지요. 글 잘 봤습니다. ^^

    1. 뭐 신의 글로 읽는 방식도 좋은 방식이지요. 근데 성경은 인간의 글로 읽어야 쫌 더 재밌습니다. ㅋ
      좋은 기획이었는데 안타깝게 종영이 되었네요. 쫌 더 다양한 기독교의 모습들이 담겼다면 좋았을텐데 너무 비슷한 성향의 교수들만 불러서 답 정해놓고 얘기하는 것 같아서 그렇게 편하게 보지는 못했습니다. ㅋㅋ
      제 글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셨다면 좋겠습니다. 부족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4. 먼저 좋은 글을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전에 필력이 좋다고만 언급했는데, 우연히 다시 블로그 들려서 누가 댓글을 달았길래 다시 끄적거리게 되었습니다.

    저도 낸시랭 프로그램을 대부분 다 보았고, 또 글에서 언급하신 부분도 물론 보았습니다.
    제가 느끼기엔 포스팅하신 분이 그 방송과 또 방송에 출연한 교수들에 대해서 시니컬하게 느끼는 부분은

    성서에 대해서 역사적 접근을 하지만 보수적인 성경관을 견지하는 것에 대한 것이라고 느껴집니다.

    물론 보수라는 말은 상대적이지만, 그들은 이 블로그 주인장님보다는 보수적이겠지요. (적어도 제가 느끼기에는요)

    그러나 제가 볼 땐 오해를 하고 있는 부분이 있다고 여겨지는 것이,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성경관을 가지고 있는 저 분들이 성경의 저자가 한 사람(?) 이라고 생각한다는 것과, 그래서 성경 각권이 통일성( 같은 하나님 이해)있는 다른 메시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에 대한 오해가 있으신듯합니다.

    그 부분은 제 생각엔 국내에서 스스로를 개혁주의로 자처하는 실상은 근본주의자들이 가진 성경관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고 생각이 들구요. 각 권의 메시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입장이라고 전 여겨졌어요. (낸시랭 프로를 보면서)

    이미 구약학적으로 보았을 때 성서의 통일성과 구약의 중심이 있는가 대한 부분은 아이히로트 이후로 무너지고 폰라트에 의해서 부정되며 새롭게 재해석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고 봅니다. 폰라트의 기여가 있다면 통일성이 아니라 각 권의 메시지를 그대로 보자는 부분이겠지요.

    성서를 하나님의 말씀을 담은 책이면서 동시에 그에 대한 인간의 증언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상당히 바르트적일테고, 그렇게 볼 때 적어도 낸시랭에 나왔던 교수들은 그런 면에서 보수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온 교수들이 모두 조직신학자가 아니고 성서학자라고 볼 때, 사실 글쓴분이 내리는 평가는 좀 섣부르지 않나 생각이 듭니다. 그럼에도 이 포스팅 안에서 저도 날카로운 지적에서 고민을 잠시나마 해봤네요. 고맙습니다.

    지나가다가 주제넘게 끄적여 보았습니다. 그럼.

    1. 일단 긴 댓글 감사합니다. 제가 과도하게 시니컬한 부분이 있었지요. 딱 이 글을 쓸 때 쯤 기대했던 프로그램에 실망하던 시점이라 그럴겁니다. ㅋ 이 글은 5,6화 방영 당시에 쓰여진 글입니다. 그 뒤로 조직신학자도 나오고 가톨릭 신부님도 나오고 바울신학에 대한 재미있는 논쟁도 있었지요. 글의 내용은 프로그램에 대한 종합적 평가이기보다는 극히 단편적인 리뷰입니다.

      말씀하신 통일성 부분은 제가 방송에서 언급된 ‘성령의 감동’에 대한 말을 듣고 쓴 것으로 기억합니다. 글에 썼듯이 그 분들이 그렇게 믿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각 권의 메시지를 그대로 읽어내시려 노력하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다만, 그 속에서 충돌하는 세계관이 엄연히 존재함에도 그것을 성령의 감동이라는 이름으로 퉁치려는 몇몇 시도가 보여서 쓴 글입니다.

      그리고 이런 단일저작자로서 성령을 언급하려는 노력이 굳이 근본주의의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정경비평적 경향이나 구속사적 경향을 성서해석에 적용시키는 대부분의 신학사조에서 이런 단일저작자로서의 성령의 역할은 꽤 중요한 주제라고 봅니다. 최근 네러티브 비평이나 톰 라이트의 비판적 실재론 같은 경우도 이런 노선 위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성서해석에 있어서 연속성과 통일성이란 분명 중요한 주제이지만 그런 시도가 그 속에 나타나는 세계관의 충돌과 다양성을 은폐하는 위험성이 있기때문에 썼던 내용입니다.

      저도 권연경 교수님 팬이고 김구원 교수도 좋아합니다. ㅋ 그 분들의 성향을 오해할 정도는 아닙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그분들보다는 더 진보적인 입장이긴 하겠지만요. ㅋ 다시 한번 소중한 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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