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제자들 [2] – 본진 (6:12~19)

luke

그 무렵에 예수께서 기도하려고 산으로 떠나가서, 밤을 새우면서 하나님께 기도하셨다. 날이 밝을 때에, 예수께서 자기의 제자들을 부르시고, 그 가운데서 열둘을 뽑으셨다. 그는 그들을 사도라고도 부르셨는데, 열둘은 베드로라고도 이름을 주신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 그리고 야고보와 요한과 빌립과 바돌로매와 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열심당원이라고도 하는 시몬과 야고보의 아들 유다와 배반자가 된 가룟유다이다.
예수께서 그들과 함께 산에서 내려오셔서, 평지에 서셨다. 거기에 그의 제자들이 큰 무리를 이루고, 또 온 유대와 예루살렘과 두로 및 시돈 해안 지방에서 모여든 많은 백성이 큰 무리를 이루었다. 그들은 예수의 말씀도 듣고, 또 자기들의 병도 고치고자 하여 몰려온 사람들이다. 악한 귀신에게 고통을 당하던 사람들은 고침을 받았다. 온 무리가 예수에게 손이라도 대보려고 애를 썼다. 예수에게서 능력이 나와서 그들을 모두 낫게 하였기 때문이다.

평행본문 마 10:1~4, 막 3:13~19

본문의 맥락

앞에서 나는 예수가 뽑은 열두명의 사도가 특별한 직책이나 권위가 아니라 선발대를 의미하며 누가의 관심은 사도가 아닌 그들과 함께 예수를 따라 산으로 올라갔던 제자들 그룹에 있다고 말했다. 열두명의 사도는 여리고를 공격하기 전 정탐을 보냈던 열두명의 정탐꾼의 이미지와 연결되지만 여기서 누가의 관심은 앞으로 실패할 것이 예견되어 있는 사도들이 아니라 제자들로 이뤄진 그들의 본진이다. 누가가 그리는 예수의 공격 전술은 선발대가 아닌 본진을 통해서 이뤄질 것이다. 이것이 열둘 안에 숨어 있는 배신자가 절망의 이유가 될 수 없는 이유이다.

그렇다면 이 본문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열두 사도를 부르는 일 이후에 이어지는 단락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 단락의 앞뒤 문맥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누가에게 있어서 더 중요한 대목은 이어지는 단락이기 때문이다. 앞서서 우리는 손 마른 사람 이야기를 통해 기존 종교 체계를 향한 예수의 공격이 본격화되는 상황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그 가운데 등장한 손 마른 사람의 믿음의 행동은 누가의 독자들로 하여금 자신들을 동일시하면서 손 마른 사람을 부르는 부름 속에서 자신을 향한 예수의 부름을 듣는다. 그리고 이어지는 본문에서 누가는 예수나 제자들에 대한 서술을 생략하거나 뒤로 미뤄둔 채 예수가 만난 사람들에 대한 서술로 넘어간다.

마태복음의 경우 제자들을 선출하는 이야기는 제자들의 전도여행으로 곧바로 이어진다. 원래 마가복음에서는 바알세불 논쟁이 뒤이어 등장하지만 마태는 그 논쟁을 제자들의 파송 뒤로 미뤄버린다. 그리고 바알세불이라 불릴 것을 먼저 경고받는 것은 바로 제자들이다(마 10:25). 이처럼 마태복음은 제자들을 예수를 위해 박해받는 예수의 대리자로까지 끌어 올려진다(마 10:22). 심지어 그들에 대한 대우에 따라 종말론적 보상이 약속되기도 한다(마 10:42). 이런 서술은 다분히 박해를 받는 마태공동체의 경험이 열두명의 제자들을 통해 투영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마태의 독자들은 자신들의 삶의 기억과 소망을 이 선택받은 열두명에게 투영시키 그들을 통해 자신들과 예수의 관계는 물론 자신들의 사명과 정체성을 해석한다. 하지만 누가는 이런 제자들의 파송 장면을 9장까지 미뤄 버림으로써 이런 연결을 따르지 않을 뿐 아니라 72인의 파송을 통해 열두명이라는 특정 집단에 대한 중요성을 상쇄시킨다.

그렇다면 누가가 참고했던 마가복음은 어떨까? 마가는 누가처럼 제자들의 파송장면이 열두 제자를 부르는 장면과 동떨어져 등장한다. 이런 유사점은 누가가 마가복음을 보고 기본적인 이야기의 골격을 참고했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이다(이에 비해 마태는 마가보다 훨씬 제자들의 역할을 훨씬 강조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마가의 강조점은 곧바로 ‘바알세불 논쟁’으로 알려진 이야기로 넘어간다는 점에서 예수 자신에게 있다. 이 이야기를 통해 마가는 열두 제자의 이야기를 ‘예수의 정체가 뭐냐?’라는 질문으로 연결시킨다. 열둘과 예수를 연결시킨다는 점에서 마태와 유사점을 발견할 수 있지만 여기서 마가의 논점은 예수 자신이다. 마가는 마가의 독자들이 열두명의 제자들보다는 그들처럼 예수 자신에게 동일시하기를 기대했을 것이다. 하지만 누가에게서 바알세불 논쟁은 72인의 제자들을 파송이 마무리 된 후인 11장에 가서야 등장한다. 게다가 누가의 바알세불 논쟁은 72인의 제자들이 파송에서 돌아온 후 사마리아인의 비유와 마리아 이야기를 통해 새로운 제자 집단이 표면화 된 후(눅 10:25-42), 예수가 실질적인 집단으로써 그들을 현실화 하는 행위(기도를 가르쳐 주다; 눅 11:1-13)의 결과로 나타난다. 즉, 누가복음에서 바알세불 논쟁은 예수의 제자집단의 정체성 문제로 인해서 제기된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복음에서 사도들을 부르는 이야기는 어떤 이야기로 연결되고 있을까? 누가는 마가복음에서 제자들을 부르는 장면 앞에 위치했던 큰 무리들에 대한 기사를 사도들에 대한 서술 뒤로 옮겨 놓는다. 본래 마가는 3:1-6에서 이어지는 치유기사의 연속선상에 큰 무리에 대한 이야기(막 3:7-12)를 하지만, 누가는 사도들을 선발한 후 평지로 내려와 제자들의 큰 무리를 만난다. 여기서 ‘제자들’이라는 집단은 산 위에서의 이야기와 평지로 내려온 후 이야기를 연결시키는 역할을 한다. 즉, 이렇게 연결되는 두가지 이야기의 중심은 사도가 아니라 예수와 ‘제자들’의 만남이다. 큰 무리 이야기가 병자치유 장면과 연결되는 마가복음에서는 예수가 만난 큰 무리는 병자들이었지만, 누가복음에서 예수가 만난 큰 무리는 (병자들이 포함된)제자들이었다. 공간적 측면에서도 이런 이야기 구분은 힘을 얻는다. 마가의 경우 제자들을 부르시는 이야기와 큰 무리 이야기는 바다와 산이라는 공간적 차이를 통해 구분되어 버린다. 큰 무리를 만난 곳은 바닷가지만 제자들을 부른 곳은 산이었다. 마가는 이런 둘 사이에 어떤 연결고리도 제공하지 않으며 두 이야기는 서로 독립된 단위로 분리되어 있다. 하지만 누가는 산에서 사도들을 부르신 후에 예수가 “산에서 내려오셨다”고 말한다. 누가는 이처럼 서로 다른 공간을 연결시키면서 두 이야기를 하나의 이야기로 만든다.

평지로 내려오시다.

누가의 맥락 속에서 주목해야 할 점이 몇 가지 있다. 그 중에 첫째는 예수가 사도들을 선택한 후 평지로 내려왔다는 것이다. 이 표현은 누가복음에만 등장하는 것으로, 내가 생각하기에 누가복음 전체에서 가장 의미 있는 서술 가운데 하나이다. 그 이유는 이 표현 뒤 이어 이어지는 이야기가 소위 ‘산상수훈’이라고 불리는 자료이기 때문이다. 팔복을 비롯해 하나님 나라 백성의 정체성을 설명하는 이야기의 배경을 누가는 ‘평지’라는 말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마태가 예수의 말씀이 선포되는 장소로 ‘산’을 선택한 것과 대비되면서 오늘날 우리에게 더 극적으로 다가온다. 유대교 자료와의 관계 속에서 마태복음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마태가 자신의 복음서에서 의도적으로 예수와 모세를 비교하고 있다는 부분에 대해서 동의한다. 그렇기 때문에 모세가 백성들을 위한 율법을 시내산에서 받은 것처럼 예수는 하나님 나라의 법률을 ‘산’에서 선포하는 것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산이라는 장소가 갖는 이미지는 ‘일상’이라는 시간/공간과 구별되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런 산에 대한 신성시는 오늘날에 비해서 고대에는 더 심했다. 산에 대한 신성시는 구약성경 전체를 비롯해 대부분의 고대 사회에서 동일하게 연결되고 있는 이미지이다. 신과 연결되는 장소는 언제나 하늘과 가까운 산에 지어졌고 산은 신이 머무는 장소로 이해되었다. 그렇기에 마태가 새로운 율법이 선포되는 장소로 산을 선택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누가가 이런 전통과 전혀 관계없이 산이라는 이미지를 공유하고 있지 않았다면 오히려 큰 의미가 없을 수 있지만 누가 역시 ‘신성한 장소로서의 산’의 이미지를 많은 장면에서 공유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누가가 예수의 가르침의 장소로 평지를 택한 것은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누가의 예수는 ‘저 높은’ 산에서 ‘이 낮은’ 평지로 내려온다. 그리고 자신의 제자들과 눈과 눈을 마주보며 평등한 입장에서 그들을 만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초대교회가 공유하고 있던 성육신의 의미를 예수의 이야기 속에서 가장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방식이다. 여기서 다시한번 중요한 두번째 포인트가 드러난다. 그것은 그가 내려와 누구를 만났는가 하는 것이다.

김기창[12] 치유누가는 예수가 평지로 내려오셔서 두 개의 큰 집단을 만났다고 말하고 있다. 첫째는 예수의 제자들로 이루어진 큰 무리이고 두번째는 유대와 예루살렘, 두로와 시돈에서부터 예수의 말씀을 듣고 병도 고치고자 몰려온 사람들이었다. 여기서 예수의 ‘제자들’은 앞에 이야기와 이 이야기를 연결시키는 고리 역할을 한다. 앞에 이야기에서 예수의 제자들은 열두명의 사도를 포함하는 집단으로 역할하면서 열두사도의 특수성을 상쇄시켰다. 하지만 여기서 예수의 제자들이 하는 또 하나의 역할이 있다. 바로 예수의 제자들과 병자들로 이뤄진 또 다른 큰 무리의 정체성을 혼합시켜 버리는 것이다.  그 자리에는 제자들의 큰 무리와 이방을 포함한 여러 지역에서 몰려든 큰 무리가 있었지만, 온 무리가 예수에게 손이라도 대보려고 애를 썼다.” 누가에게 있어서 제자들은 이 “온 무리”로부터 분리되지 않는다. 그리고 예수는 그들을 “모두” 고쳐주었다. 예수를 보기 위해 사방에서 몰려온 이들은 병들고, 고통당하는 자들이었을 것이다. 예수의 제자들 가운데 병든 자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누가는 그 두 무리를 하나의 집단으로 통합시켜 버린다. 이런 정체성 혼합은 또 다른 결과를 낳는다. 바로 앞에 언급되었던 열두 사도가 예수의 제자집단이라는 중간 매개를 통해서 병자들의 큰 무리와 같은 집단으로 통합되는 것이다. 즉 누가에게서 열두 사도는 실질적으로 병자들과 같은 존재가 된다. 그들 모두 예수의 제자들이다.

예수는 산에서 평지로 내려와 아파하고 고통스러워 하는 사회적 죄인들과 같은 눈높이에서 마주보며 서 있다. 이들은 예수의 사명선언(눅 4:18-19)이 직접적으로 지시하고 있는 대상들이다. 하지만 얼마 후 그들은 이 사명선언을 실현하는 주체가 될 것이다(눅 10:9). 누가의 이야기 속에서 사명선언의 대상이 수동적이지 않고 적극적으로 스스로 주체가 된다. 해산하지 못하는 여인은 남자를 알지 못했던 여자 아이는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담대하게 수용하고 그 것이 의미하는 바를 정확히 이해하고 찬양한다. 제자들은 예수의 부름에 ‘모든 것’을 버리고 그를 쫓고, 나병환자는 예수를 찾아와 “원하시면 나를 깨끗하게 할 수 있다”고 당돌하게 요구한다. 중풍병자의 친구들은 지붕을 뜯고 예수에게 다가가며, 손 마른 사람은 손을 내밀라는 예수의 요청에 그 말 그대로 응답한다. 누가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아들의 사명은 단순히 저 높이 있는 왕이 아래로 내려온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 은혜의 수혜자들은 스스로 그 은혜의 주체자가 되어 구원을 쟁취하고 사명을 실현한다.

예수의 사명 선언은 큰 무리의 제자들을 포함한 (아마도 미래의 확장된 제자집단일 수 있는) 또 다른 큰 무리에 의해 현실화 된다. 누가의 서술에는 큰 무리로 인해서 당황해서 배를 준비하는 마가의 스펙타클함 같은 것은 없다. 문제를 가지고 온 모든 사람들은 치유를 받았다. 그리고 열두 사도를 포함한 예수의 제자들 그리고 그들에게 공감하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듣고 있을 독자들은 이야기 속에서 예수에게 고침받고자 찾아온 이들과 동일시하도록 요청받는다. 실제 제자그룹에 속한 자들이 예수에게 손을 대려고 애를 썼는지, 그들 중에 고침 받은 병자가 포함되어 있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들은 사명선언의 현실과 구분되지 않았고, 그들과 함께 있었다. 예수가 그랬듯 그들은 예수와 함께 산에서 내려와 고통받고 고난 당하는 자들과 함께 있었다. 아니, 그들은 예수보다 먼저 그곳에 있었다. 예수의 사명은 그저 선한 삶을 살거나 남을 도와주는 삶의 방식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시대의 현실과 삶의 맥락을 살아가는 것이며 그 속에 동일한 그 시대의 사람으로 함께 있는 것이다. 함께 웃고, 함께 아파한다. 예수가 전하는 새로운 삶은 바로 그런 이들을 향해 선포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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