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와 나무에 대한 두가지 해석

The tree and rood
이미지 출처 : http://www.nycore.org/2013/11/rsvp-for-nycores-november-meeting/

지하철에서 이런 맥락의 광고를 보았다.

뿌리 없이 자라는 나무가 있을까? 우리의 뿌리인 부모를 잊고 어찌 우리가 잘 살 수 있을까?

똑같은 것을 보고 드는 정 반대의 생각

뿌리 없이 자라는 나무가 있을까? 이 사회의 뿌리인 아이들을 외면한 채, 우리는 언젠가 낙엽이 되어 스러질 잎파리와 열매만을 영원할 것처럼 붙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

둘 중에 어떤 것이 옳은 해석인가? 그런거 없다.
문제는 둘 중에 하나가 자신은 해석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를 본 것이라고 말할 때 생기는 것이다.

아마 어떤 분은 두 번째 해석이 불편할 것이다.
어른들은 낙엽에 비유하는 것을 불온하다 생각할지도 모른다.
아이들을 뿌리에 비유하는 것은 ‘무리한 끼워 맞추기’라고 비난하실지도 모른다.
그렇다.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그럴만하게 들리는지’를 따져볼 ‘개연성’의 문제이지 옳고 그른 ‘진리’의 문제는 아니다.
여기서 ‘뿌리’라는 것은 사회 혹은 개인의 근간이 되는 요소를 강조할 목적으로 사용되는 이미지일 뿐 그 안에 부모 혹은 어린이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지는 않다.
이것은 개인이 무엇을 중요하다고 생각하는지에 대한 가치판단에 따라 달리 해석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을 피터버거는 개연성 구조(plausibility structure)라고 말한다.
즉, 어떤 것이 정당한 것으로 여겨지려면 이미 개인 안에 내면화 되어 있는 구조에 의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말을 조금 부풀리자면 어떤 것이 정당하냐 그렇지 않으냐는, 그것을 수용하는 이에게 달렸으며 그것은 내가 판단하기 이전에 사회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다.

성경을 읽는 문제도 마찬가지다.
해석이 없는 성경 읽기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 누구도 해석하지 않고 성경을 그대로 읽는 사람은 없다.
만약 내가 성경을 있는 그대로 읽고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면 그것은 사회로부터 물려받은 개연성 구조를 그대로 따라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 구조는 나에게 가장 편한 읽기이고 해석의 불확실성 앞에서 더 고민하거나 생각하지 않아도 되도록 나를 ‘구원해주는’ 읽기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나에게 편한만큼 내 것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

성경을 아무리 쓰여있는 글자 그대로 읽더라도 그것은 여전히 ‘읽기’이며, 그 안에 담긴 여러가지 사회적 약속에 대한 ‘해석’의 과정이다.
내가 생각한 것이 아니라고해서 그것이 해석이 아닌 것은 아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읽을 때 중요한 것은 그 참 뜻을 찾는 것이 아니라, 나와 다른 해석이 일어나는 고민의 과정을 이해하고 어떤 해석이 오늘 우리에게 더 타당하며 유익한지를 따져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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