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신학은 위험하다.

원문링크 : 박영식 목사의 신앙과 신학, 세상이야기

<모든 신학은 위험하다.>

유학을 하고 돌아올 때, 내 맘에 쏙 박힌 말이다. 지도교수의 말이었다.

19세기를 풍미했던 자유주의신학은 당시 교회와 사회, 문화, 정치계, 학계 등에서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이들의 신학사상은 소위 <전쟁신학>으로 이어졌고,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리면 이에 더 큰 사랑이 없다”는 구절을 통해

히틀러가 불러일으킨 전쟁을 신앙적으로 지지했고,

이들의 <문화신학>은 자신들의 문화와 종교에 대한 반성을 불가능하게 만들어

사회의 흐름에 대해 침묵하고 동조하는 무비판적인 신학을 양산했다.

 

그러나 이러한 위험에서 건져낸 바르트의 신학은

“종교는 불신앙이다.”는 말을 통해,

더 나아가 “기독교 자신을 포함한 모든 종교는 불신앙이다.”는 말을 통해 충격과 새로운 전망을 내 놓았다. 또한 바르트가 포이어바흐의 종교비판을 환영했다는 것은 모두가 잘 아는 주지의 사실이다.

당시의 종교비판, 즉 기독교에 대한 비판을 적극적으로 옹호함으로써 바르트는 위기에 빠진 기독교를 구출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바르트와 함께 고백교회 전통에 서 있었던 본회퍼는 바르트의 기독교 신앙 재건이 “계시실증주의”라고 비판하면서 종교없는 기독교, 성서에 대한 비종교적 해석을 제시했다.


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그 분의 뒤를 철저히 따라가야 한다는 제자도의 신학과 더불어, 그는 기독교를 내면의 종교로 생각하는 자들의
사상 속에서 역겨움을 발견했고, 그들이 말하는 하나님은 “작업가설”에 불가하다고 일침을 가했다. 오히려 “하나님 없이 하나님
앞에” 서야 한다는 역설을 그는 내뱉었다. 신앙인들이 “오 하나님”하고 의미없이 부르짖는 소리는 감옥 속에서 수감자들이 내뱉는
농담보다 더 의미가 없다고 그는 말했다.

 

몰트만은 급기야 기독신앙의 하나님은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이라고 정식화했다. 하나님은 더 이상 기존의 헬라사상에 기초한 기독교가 신봉하던 왕좌에 앉아 세상을 관망하는 존재도
아니며,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면서 불변하는 존재도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기독교 신앙의 하나님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의
아버지 하나님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에게 하나님은 전능하고 불변하며 모든 것을 자기 마음대로 좌우하는 존재가 더 이상
아니다.

 

이러한 모든 신학적 언설들은 참으로 “위험한 발언”이었다.

바르트의
종교비판가에 대한 찬성은 오늘날 한국교회에서는 안티기독교에 대한 찬성으로 이해될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 더구나 바르트는 “참된
기독자는 참된 사회주의자이며, 참된 사회주의자는 참된 기독자”라는 말까지 했으니, 반공에 찌들어 있는 사람들에게 바르트의 신학은
여전히 위험할 수 밖에 없다.

 

본회퍼도 역시 마찬가지다. 본회퍼도 역시 위험하다. “하나님 없이”라는 그의 표현이나, 우리를 위하시는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시는 하나님”이라는 그의 사상은 한국교회 설교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위험한 사상이다.

 

몰트만의 신학도 역시 위험하기는 마찬가지다.

바르트와 쌍벽을 이루는 불트만의 비신화화는 말해서 무슨 말 하겠는가?


럼에도 이들, 바르트와 불트만, 본회퍼, 몰트만의 신학이 세계적인 신학으로 추앙을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위험한 신학들이
교회에 생명력을 불어넣으며 얼마나 유용하고 유익한 신학들이 되었는지는 눈을 열어 세계교회를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국교회에 만연한 보수신학의 시각에서 볼때는 이들의 신학은 모두 <위험하고> <이단적이며>
<반기독교적>이고 <반성서적>이라는 딱지를 붙일 수 밖에 없을텐데, 아직 이들의 글을 주의해서 읽지 않아서
인지 아니면 자기생각 외에 바깥 구경은 아예 하고자 하지 않기 때문인지, 이들에 대한 보수신학계의 제대로 된 비평이 보이질
않는다. 어쩌면 사회에 해악이 되는 가장 위험한 신학과 사상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전혀 그것을 의식하지 못하고 <마이
웨이>를 부르며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들의 신학과 사상을 <위험한 것>이라고 치부함으로써 자신의 순수성을
보장받으려는 사상적 자폐증을 앓고 있는 대다수 교회신학이야 말로 진정 가장 위험한 신학이 아닐까 생각한다.

한국
교회는 이제 한국사회에 위협적인 요소가 되었다는 것은 나의 생각만은 아니다. 소위 한국교회는 선교초기의 “박해받던 교회”가
아니라, 오히려 사회에 “압력을 행사하는” 단체가 되었다. 일종의 권력기관이 되었다. 총회장 선거나 교단정치에 관심을 두는 것을
보면, 교회가 권력이라는 말에 반대할 정당성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문제는 권력의 절대부패는 소통의 부재,
흐름의 차단에 있다는 것이다. 스스로를 반성할 수 없는 권력은 절대부패한다. 모든 생명은 죽음과 삶의 흐름 속에서 자신을
“넘기는”데 있는데, 권력은 이러한 소통과 흐름을 단절시켜 자기만의 철옹성을 쌓고서 이제 밖을 향해 소리친다는 것이다.

“위험한 것들을 피하라!!!” “보지도 만지지도 마라” 


는 모든 신학을 문제사의 관점에서 본다. 다시 말하면, 모든 신학은 나름의 문제의식에서 출발했고, 또 다시 하나의 문제점에
도달한다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이 신학의 젖줄에서 양분을 빨아먹고 더 넓은 지평을 보면서 우리 현실에 맞는, 우리를 위한
신학을 구상하는 것은 우리의 몫일 뿐, 저들에게서 발견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그런데 한국교회에서 깜짝
놀라는 것은 어느 특정신학에 대한 우상숭배에 찌들어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자신들은 이것이 우상숭배인지도 모르고 있다는 것이
내겐 더 큰 충격이다. 웨슬리만을 고집하는 사람, 오직 칼빈신학만 고집하는 사람, 아니면 자신이 어릴 때부터 배우고 들었던
이름도 빛도 없는 자기만의 신학, 근본주의신학, 복음주의라는 익명에 힘을 잔뜩 불어넣어 만든 또 하나의 폐쇄적인 신학, 오직
믿음만을 강조하면서 산상수훈과 바울 서신 곳곳에 숨겨진 진귀한 제자도의 가르침을 망각하는 믿음지상주의의 신학, 배타적이고
전투적인 신학, 대화를 모르는 독단의 신학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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