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밖에는 구원이 없는가? : 베땅이 도사와 어떤 청년의 가상 대화록

[종교간의 대화와 선교]라는 과목의 기말레포트로 “교회밖에는 구원이 없는가”라는 주제로 자유로운 글을 쓰는 과제가 있었습니다. 뭘 쓸까하다가 가상의 여자 청년을 모델로 하는 대화록을 구성해봤습니다. 이 여자 청년은 가톨릭 신도인 남자친구와 결혼을 진지하게 고민중입니다. 개인적인 신뢰관계는 성립되어 있다는 전제입니다. 평소에 종교다원주의에 대해서 제가 생각하고 있던 것들이 나름 잘 표현 되었다고 생각되어서 블로그에 그 내용을 옮겨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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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 전도사님 교회말고 다른데에서는 구원 못받아요?
도사 : 흠. 쉽지 않은 얘긴데, 갑자기 그건 왜 궁금해졌을까?

청년 : 제 남자친구가 천주교인이거든요. 결혼하게 되면 어떻게 되나 해서요.
도사 : 천주교도 같은 하나님 믿는데 뭐 문제가 있을라구.

청년 : 그렇긴한데, 서로 믿는게 다른거 아니예요? 마리아를 신으로 믿는다던데.
도사 : 남자친구한테 물어봤어? 정말 그렇게 믿냐구?

청년 : 아니요. 왠지 둘이 있으면 종교 얘긴 잘 안하게 되서요.
도사 : 그런건 직접 물어봐야지. 정말 그렇게 믿냐구.

청년 : 그런거 아니예요? 어떤 목사님들은 천주교가 이단이라고 하시던데.
도사 : 뭐, 긴 역사가 있긴한데, 그걸 다 설명하기도 뭐하고 설명해도 별 의미도 없고 그래.
근데 단순하게 생각해보면 우리가 천주교 이단이면 몰라도 천주교가 이단이라는건 쫌 이상하지 않니?

청년 : 왜요? 왜 우리가 이단이예요? 천주교가 잘못되서 우리가 나온거 아니예요?
도사 : 거기서 차이가 생기는건데… 넌 이단을 판단하는 기준이 뭐라고 생각하니?

청년 : 성경말씀이지 않나요? 말씀대로 믿는지, 그렇지 않은지.
도사 : 그럼 그 사람이 말씀대로 믿는지, 그렇지 않은지에 대한 판단은 누가할까?

청년 : 그건 성경 제대로 읽으면 다 아는거잖아요 써있는 그대로 이해하면 된다고 하시던데.
도사 : 거기서 차이가 생기는 거야. 우리는 말씀은 있는 그대로 읽으면 누구나 판단할 수 있다고 믿거든. 그래서 이단에 대한 기준도 성경을 읽으면 된다고 생각해. 그런데 성경말씀을 써있는 그대로 이해한다는게 그렇게 간단하질 않거든. 똑같은 구절을 읽어도 서로 다르게 이해하는 일들이 생긴다는거지. 이건 해석학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하지만 어려운 이야기는 넘어가자고.

청년 : 뭐 이런건가요? ‘언제 한번 밥먹자’라고 하면 어떤 사람은 ‘아 밥먹자는 뜻이구나’라고 이해하는데 어떤 사람은 ‘잘 지내라는 뜻이구나’라고 이해하는 뭐 그런건가요?
도사 : 그렇지!! 그런데 그것보다 쫌 더 재미있는 예가 있어. 옛날 가요 중에 한대수의 ‘행복의 나라로’라는 노래가 있어. 혹시 알고 있니?

청년 : 글쎄요. 제목은 들어본 것 같은데…
도사 : 아마 노래를 들어보면 알꺼야. 근데 그 가사가 대충 이렇게 돼. ‘장막을 걷어라 너의 좁은 눈으로 이 세상을 떠보자 창문을 열어라 춤추는 산들 바람을 한번 또 느껴보자 가벼운 풀밭 위로 나를 걷게 해주세 봄과 새들 소리를 듣고 싶소 울고 웃고 싶소 내 마음을 만져줘 나는 행복의 나라로 갈테야’ 이 노래의 가사를 성경말씀이라고 생각하고 한번 읽어볼래? 무슨 의미 같아?

청년 : 글쎄요. 행복의 나라로 가고 싶다는 얘기? ㅋㅋㅋ 자연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 것 같은데요.
도사 : 그렇지? 가사만 보면 굉장히 목가적이라고 해야하나? 그런 분위기거든. 그럼 이 노래는 그런 의미의 노래일까? 근데 이게 80년대 금지곡이었어요. 군사 독재 시절에 윗분들이 보기엔 행복의 나라가 여기여야 되는데 자꾸 어딜 가자고 그러거든. 그 분들은 가자고 하는 행복의 나라가 북한일거다 생각을 한거지.

청년 : ㅋㅋㅋ 무슨 코미디 같아요.
도사 : 뭐 꼭 그런 의미는 아니지만 당시 청년들이 이 노래를 운동가요처럼 불렀거든… 뭐 행복의 나라를 꿈꾸는데 여기는 그곳이 아니라는 점에서는 윗분들이랑 생각이 비슷했는지도 모르겠어.

청년 : 흠… 그런 의미가 있었군요.
도사 : 근데 과연 이 청년들이 이해하고 부른 의미가 원래 이 노래의 의미일까? 이 노래가 만들어 질 적에 한대수는 미국에서 히피생활을 하고 있었거든. 히피문화의 전형적인 몇가지 공식들이 있어. 무정부주의라던가, 자연으로의 회귀같은거… 우리가 저자의 의도라고 하는데, 그럼 이게 원래 뜻에 가까운 거 아닐까?

청년 : 엥? 모르겠어요. 그러니까 이 노래가 도대체 무슨 뜻이라는 거예요?
도사 : 각자 그것을 접하는 상황에 따라 틀리다는거지. 말씀도 비슷해. 우리가 흔히 ‘문자 그대로’라고 해버리면 굉장히 쉽게 얘기가 끝날 것 같지만 사실 글자로 쓰여진 성경에는 굉장히 오랜시간동안 사람들에 의해서 전해지면서 담긴 의미들이 가득하거든. 그렇다보니 똑같은 문장을 읽고도 서로 다른 해석을 할 수 있는 식이 되는거지.

청년 : 에? 전도사님이 그렇게 가르쳐도 되요? 그럼 왠지 성경은 다른 책이랑 별달라보이지 않는데.
도사 : 그런가? ㅋㅋㅋ 근데 우리가 오직 성경이 모든 것의 기준이라고 말하기 시작한 것은 사실 한 500년 정도밖에 안됐어. 그 전에 살던 사람들은 개인적으로 성경을 소지할수도 없었고 성경을 해석하는 것은 더더욱 안됐거든. 우리나라에서도 천주교 미사에서 우리나라말로 예배를 드린 것이 불가 4~50년 전부터니까. 그 전엔 예배가 몽땅 라틴어로 드려져서 사람들은 그 자리에 앉아있으면서도 뭔 소린지 몰랐지. 그럼 그 전에 교회는 무슨 기준으로 이단을 구분했을까?

청년 : 글쎄요? 성경말고 무슨 기준이 있었어요?
도사 : 사실 이 부분에서 가톨릭과 우리가 나뉘는 큰 지점 가운데 하나인데, 가톨릭에서 성경이란 하나님의 진리를 판단하는 굉장히 중요한 소스이지만 그 보다 더 중요한게 있어. 바로 전통이라고 부르는거지. 우리가 아무리 오직 성경이라고 말해도 가톨릭 입장에선 성경도 교회가 만든거기 때문에 그 말을 이해하기 힘든거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이 이렇게 한권의 책으로 묶이기까지 교회의 합의와 결정이 있었거든. 사실 초대교회 때는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66권의 책 말고 다른 책들도 많이 있었거든. 그 중에는 지금은 이단으로 정죄된 책들도 있고. 그런데 교회가 그 문제를 함께 고민하고 결정한 내용을 기반으로 66권의 책이 결정된 것이라고 보면 쉽지.

청년 : 그럼, 전통도 해석하기 나름인거 아니예요? 우리나라 전통놀이도 동네마다 규칙이 다른고 그렇잖아요? ㅋㅋㅋ
도사 : 적절한 지적이네. 그래서 가톨릭에서는 전통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내세우는 근거가 사도계승권이지. 베드로의 후계자인 교황에 의해서 이 전통이 지켜지고있다고 믿는거야. “교회 밖에 구원이 있는가?”라는 문제가 역사에 처음 등장한 것도 사실 이 문제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지. 처음 이 말이 역사에 나온 것은 키프리안이라는 감독에 의해서인데, 당시 키프리안은 노바티안주의자들을 정죄하는 입장에서 이 말을 사용했지. 바로 아까 아까 말했던 전통의 권위를 부여하는 사도계승권에 반기를 들었던 사람들이거든. 당시 노바티안주의자들은 박해 때 배교했다고 다시 돌아온 사람에 의한 주교 임명을 반대하면서 자기들이 새로운 주교를 세웠지. 그 때 키프리안이 한 말이 바로 “교회밖에는 구원이 없다”라는 말이었어. 새로운 주교들이 준 세례는 유효하지 않다는 뜻에서 이 말을 한거거든. 여기서 교회는 바로 이 사도계승권 아래 있는 교회를 말하는거지.

청년 : 아… 어렵네요.
도사 : ㅋㅋ 역사로 들어가면 원래 그래. 이름도 도통 못알아먹을 사람들이고. 어쨌든 내가 이 얘기를 한 이유는 처음 이 말이 생겨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똑같은 말이 정 반대로 가톨릭 교회를 공격하는 말로 사용되기 시작해. 어처구니 없는 상황이긴 하지만 어쨌든 상황은 비슷했어. 도덕성이 문제가 된거지. 그래서 도나투스를 따르던 사람들에 의해서 다시한번 저항이 일어나는데 이 때 이 도나투스파가 가톨릭 교회를 향해서 했던 말이 바로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라는 말이었어. 이들은 가톨릭 교회는 더 이상 거룩한 교회가 아니라고 생각한거지. 두가지 주장에 다른 점이라면 앞에서 키프리안이 말한 교회는 사도계승권에 강조점을 뒀다면 도나투스파가 말한 교회는 ‘거룩한’ 교회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지. 이 시점에 도나투스파와 맞섰던 사람이 그 유명한 어거스틴인데, 어거스틴은 교회는 밀과 가라지가 섞여 있는 곳이라면서 도나투스파를 비판했지. 즉, 교회란 너희들이 생각하는 그런게 아니라는 거야. 여기서 중요한 것은 똑같은 주장이 서로 다른 상황에서 다른 집단을 향해 쓰여지고 있다는거야. 그리고 어거스틴이 이 주장을 극복한 방법은 ‘교회’의 개념을 재정의한거지.

청년 : 흠, 결국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라는 말은 교회를 뭐라고 생각하는지에 따라서 달라진다는 말인가요?
도사 : 정답!! 이런 차이가 그대로 개신교와 가톨릭 사이의 관계에서 드러나는 거지. 우리는 개신교니까 개신교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똑같이 “교회밖에는 구원이 없다”라고 말하는 사람 중에도 가톨릭은 인정하는 사람들도 있거든. 이건 가톨릭을 동일한 교회로 바라볼 것이냐의 문제에 차이가 생기는거지. 반면 “교회밖에도 구원이 있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교회 개념을 기독교나 천주교의 가시적 바운더리를 넘어선 ‘비가시적 교회’, 즉 눈에 보이지 않는 교회로 이해하려는 경향이 강하다고 할 수 있지.

청년 : 그럼 가톨릭은 어떻게 생각하는데요?
도사 : 가톨릭은 제 2차바티칸 공의회를 거치면서 교회 밖에도 ‘익명의 그리스도인’이 있다고 인정하는 입장을 견지하다가 요즘에 교황이 바뀐 뒤에는 다시 보수적인 방향으로 전환하고 있어. 보수적인 입장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사도계승적 교회가 유일하고 거룩한 교회인 것이지. 반면 그에 반대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눈에 보이는 교회의 한계를 넘어서 활동하시는 분이 되는거고. 우리나라 가톨릭도 추기경님이 바뀌시면서 이런 보수적인 흐름을 따라가고 있는 상황이지.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에서는 상대편에서 받은 세례를 인정하는데, 개신교 차원에서는 천주교에서 받은 영세를 인정하기 때문에 가톨릭에서 받은 구원을 인정한다고 보는게 맞지. 반면 천주교는 요즘들어 개신교의 세례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움직임들이 있는 것 같아.

청년 : 그럼 전도사님은 어떤 입장이예요?
도사 : 나? 난 “교회 밖에서 왜 구원을 찾냐?”주의라고 해야하나? ㅋㅋㅋ

청년 : 엥? 그게 뭐예요?
도사 : 내 입장을 굳이 설명하자면 교회 밖에 구원이 있는지 없는지를 말하려는 것이 사실 서구중심의 구시대적 사고방식이라는거야. 아시아나 아프리카의 미개한 사람들을 보면서 ‘저 사람들도 구원을 받아야 할텐데’라고 생각했던 서구인들의 사고체계가 그대로 우리나라에 들어온거지. 옛날에 그런 얘기 했잖아. ‘이순신이 천국 갔을까 못갔을까?’ ‘선교사가 이 땅에 전해지기 전에 죽은 사람은 몽땅 지옥갔을까?’ 뭐 이런 물음들이 다 거기서 나온거지.

청년 : 아, 그거! 궁금했는데, 이순신 천국갔을까요? ㅋㅋㅋ
도사 : 이순신이 굳이 천국에 가고 싶어했을까?

청년 : 엥? 그런가?
도사 : 생각해봐. 불교인이 두명이 와서 널 앞에다 두고 싸우는거야 ”저 사람도 성불할 수 있다.”, “아니다. 불교도가 아닌 사람은 성불할 수 없다.”라고 하면서 말이야. 그럼 중간에서 넌 뭐라고 생각할까? “아, 나도 성불할 수 있다는 쪽이 이겼으면 좋겠다.” 이렇게 생각할까?

청년 : 짜증나겠죠.
도사 : 그렇지. 난 이렇게 생각할 것 같아. “얘들 뭐야? 누가 그런거 한데?”

청년 : ㅋㅋㅋ 어이없는거죠.
도사 : 그러니까. 기독교의 구원이라는 틀을 그대로 가지고 가면서 죽어서 천당에 갈 수 있는지 없는지로 타 종교인을 다루는 것 자체가 폭력이라는거지. 물론 나의 가치관이 중요하지만 그것을 그대로 다른 이에게 적용시키는 것은 문제라고 할 수 있어.
불교인이 왜 구원을 받아야 해? 성불하면 되는거지. 왜 구원을 교회 밖에서 찾으려고 해. 구원도 좋고, 성불도 좋고, 각 종교는 각 종교의 지향점이 있는거야. 옛날에 어떤 바보같은 사람이 종교란 ‘같은 봉우리를 올라가는데 서로 다른 길로 가는 것’이라고 말했는데, 그게 아니라 사실 서로 다른 봉우리였던거지. 다만 인생에 있어서 두가지 봉우리를 오를만한 힘이 우리에게 없기 때문에 우리는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거야.

청년 : 그래도 하나님은 한 분이지 않아요?
도사 : 아이러니하게도 그게 종교다원주의자들이 말하는거지. 절대자는 한분이라는 거. 생각해보면 종교다원주의자들만큼 철저한 유일신론자들도 없어. 근데 그들이 생각하는 우주적 절대자라는게 사실 어떤 종교에도 없는 가상의 존재거든. 그냥 철학자들이 뭔가 절대자라고 하니까 만들어낸 이미지에 근거한거지. 만약 그런 신이 있다고 해도 그게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과는 사뭇 다르거든. 뭐 그런게 있다고 치자고. 근데 불교는 사실 신이 없어요. 불교 교리를 간단히 설명하면 자기가 부처가 되는거야. 세상에 많은 번뇌가 있는데 사실 그 고통을 느끼는 내가 원래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으면 해탈하는거야. 거기에 신이 들어갈 자리가 어딨어. 미륵불이나 이런 것들은 다 이후에 다른 종교들과 혼합되면서 생겨난거지.

청년 : 하긴 그렇네요. 신이 없는 종교에게 ‘넌 신의 일부만 아는거야’라고 말하면 그것도 어처구니 없겠네요. 근데 그럼 그냥 서로 다른 종교면, 우리는 어떻게 전도해요? 이게 어떻게 진리라고 말할 수 있는거예요?
도사 : 난 그렇게 생각해. 구원도 좋고 해탈도 좋고, 극락왕생도 좋지. 다만 나는 기독교를 통해 구원이라는 것을 받았고. 이게 너무 좋아. 그래서 혹시 너에게 괜찮다면 너도 이 구원을 받았으면 좋겠어. 이게 얼마나 좋은지는 내 삶을 통해 증명될 수 있었으면 좋겠고.
그렇다고 다른 종교의 진리와 내 종교의 진리가 동등한 가치를 갖는다는 것은 아니야. 나에게는 이것이 최고지 이것과 비교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이건 도무지 세상이 줄 수 없는 것이거든. 다만, 그것이 다른 이들에게도 최고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 그 사람에게도 이것이 복음이라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거든. 그렇기 때문에 그저 정중하게 초청할 수 있을 뿐인거지.

청년 : 아항, 그렇구나. 어쨌든 대충 궁금했던 건 해결된 것 같아요.^^ 교회 밖에 구원이 있는지 없는지 보다 내가 만난 구원이 다른 사람들을 초청할만큼 부끄럽지 않은 것인지 먼저 생각해야되겠네요.
도사 : 굿!! 역시, 그대는 멋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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