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제자들 [1] – 선발대 (6: 12~19)

#글이 길어져서 부득이하게 두편으로 나눠서 업로드 합니다.

그 무렵에 예수께서 기도하려고 산으로 떠나가서, 밤을 새우면서 하나님께 기도하셨다. 날이 밝을 때에, 예수께서 자기의 제자들을 부르시고, 그 가운데서 열둘을 뽑으셨다. 그는 그들을 사도라고도 부르셨는데, 열둘은 베드로라고도 이름을 주신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 그리고 야고보와 요한과 빌립과 바돌로매와 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열심당원이라고도 하는 시몬과 야고보의 아들 유다와 배반자가 된 가룟유다이다.
예수께서 그들과 함께 산에서 내려오셔서, 평지에 서셨다. 거기에 그의 제자들이 큰 무리를 이루고, 또 온 유대와 예루살렘과 두로 및 시돈 해안 지방에서 모여든 많은 백성이 큰 무리를 이루었다. 그들은 예수의 말씀도 듣고, 또 자기들의 병도 고치고자 하여 몰려온 사람들이다. 악한 귀신에게 고통을 당하던 사람들은 고침을 받았다. 온 무리가 예수에게 손이라도 대보려고 애를 썼다. 예수에게서 능력이 나와서 그들을 모두 낫게 하였기 때문이다.

평행본문 마 10:1~4, 막 3:13~19

누가는 사도에게 관심이 있을까?

week4-large이 장면은 누가복음에서 처음으로 사도라는 용어가 등장하는 장면이다. ‘사도(αποστολος)’는 누가복음에 7번 등장하지만 마가복음에서는 2번, 마태복음에서는 1번 밖에 등장하지 않는다. 그나마 마가복음의 병행구에 나타나는 케이스는 원문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본문비평상 마가복음의 “그들을 또한 사도라고 이름하셨다”라는 구절은 고대 사본들에서 문장 전체가 앞뒤로 옮겨다니거나 생략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것은 실수에서 나오는 차이가 아니라, 특정시기에 본문 난외주에 표기되었던 것이 다음 필사자들에 의해 서로 다른 방식으로 본문에 삽입되거나 생략된 케이스이다. 그리고 그 원인은 아마도 누가복음 본문의 영향일 것이다.

쉽게 말하면 이런 것이다. 누가복음을 열심히 읽던 어떤 사람이 어느날 마가복음을 읽다가 ‘사도’라는 명칭이 없는 마가복음의 병행구를 발견한다. 그리곤 자신이 열심히 읽던 누가복음의 병행구절을 떠올리며 예수가 불러 세운 열둘이 누가복음에 나오는 사도라고 본문 옆에 메모해 놓는다. 그런데 시절이 지나고 후대 사람이 이 메모를 발견하고 그것을 배껴쓰기 시작했다. 문제는 이 후대 사람은 이 메모를 적은 사람이 어떤 의미에서 이런 메모를 적은건지 모른다는 것이다. 당시에는 필사기술이 그렇게 정교하게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필사를 하다가 잘못 기록하는 경우가 많았고, 이런 오류들은 후대 필사자들에 의해서 수정이 되거나 잘못 수정되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후대 필사자는 이전 사람이 기록해 놓은 메모를 보고 ‘아, 원래 이 구절이 들어있던 건데 실수로 빼먹어서 여기다 적어놨구나’라고 생각하고 마치 그 메모가 원래 본문의 일부였던 것처럼 자기가 생각하기에 알맞은 위치에 끼워넣은 것이다. 이 경우엔 몇몇 필사자가 서로 다른 위치에 이 문장을 끼워넣은 결과들이 사본으로 남아있다. 이와 달리, 필사자의 메모가 없는  더 오래 된 사본을 보고 쓴 사본은 이 구절이 빠져 있는 것이다.

쉽게 정리하자면, 병행구 중에서 이들을 사도라고 부르는 본문은 없다. 누가만이 유일하게 그들을 사도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특히나 누가가 마가복음을 참고해서 자신의 복음서를 기록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이 차이는 꽤 중요하다. 그렇다면 독자들은 이들의 역할에 집중해야 할까? 많은 해석가들이 그렇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본문은 전혀 반대의 전개를 보여준다. 다른 복음서들은 사도(제자)들을 선발하는 목적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있다. 각각 해당 병행구에서는 사도 선발의 목적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예수께서 열둘을 세우시고 [그들을 또한 사도라고 이름하셨다.] 이것은, 예수께서 그들을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그들을 내보내어서 말씀을 전파하게 하시며, (마가복음서 3:14 RNKSV)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셔서,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시고, 그들이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고 온갖 질병과 온갖 허약함을 고치게 하셨다. (마태복음서 10:1 RNKSV)

그렇다면 이 열두명의 사람들을 특별히 ‘사도’라는 용어까지 써가면서 표현한 누가는 어떨가? 뭐가 더 대단한 무언가가 서술되고 있을까?

예수께서 자기의 제자들을 부르시고, 그 가운데서 열둘을 뽑으셨다. 그는 그들을 사도라고도 부르셨는데,

끝이다. 누가는 사도라고 불리는 열두명에 대한 아무런 설명이 없이 그저 이름만 나열하고 있다. 누가는 사도집단의 정체성에는 관심이 없다. 그들이 무슨 일을 하고 왜 존재하는지, 어떤 힘과 권위를 가졌는지는 관심도 없을 뿐 아니라, 독자의 관심이 그들에게 쏠리는 것도 반가워 하지 않다. 다만 알 수 있는 것은 누가가 제자라는 용어와 별개로 사도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과 그들이 본래 예수가 먼저 부른 제자라는 큰 무리에 속해 있었던 사람들이라는 것 뿐이다.

이렇게 아무런 중요성 없이 훌쩍 지나가버린 ‘열두명의 사도’라는 사람들은 9장에 가서야 다시 등장하고 예수가 그들을 파송하는 장면에 가서야 비로소 그들의 역할과 임무가 설명된다. 하지만 바로 이어지는 10장에서 72인(개역개정에는 70인으로 되어 있음)의 제자파송 기사를 통해서 그들의 활약은 상쇄되어 버린다. 특히 72인의 제자파송 기사가 누가복음에만 나오는 자료라는 점은 큰 의미가 있다. 여기서 대비되는 두가지 파송 이야기는 의도적이다. 하지만 이 대비는 서로 차이를 드러내어 둘 사이에 위계질서를 잡기 위한 대비가 아니다. 누가복음에서 열두 사도와 72인의 제자는 서로 다른 계급이나 서로 다른 집단이 아니라 예수의 사명선언이 발전되고 확장되는 단계 속에 있다.

그렇다면 도대체 ‘사도’는 누구인가?

여기서 누가가 ‘사도’라는 용어에 대한 아무런 설명 없이 바로 언급할 수 있는 이유는 누가의 독자들에게 이 용어가 익숙했기 때문이다. 즉, 누가는 ‘사도’라는 용어에 대해 굳이 다시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누가복음의 독자들은 이미 ‘사도’라고 불리는 어떤 사람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누가는 ‘사도’라는 용어에 어떤 힘이나 권위도 부여하지 않는다. 원래 ‘사도’라는 용어는 “보냄받는 자”라는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다. 이 용어의 해석 때문에 마치 사도가 특별한 사명을 가진 선지자처럼 여겨지곤 한다. 하지만 누가에게 있어서 사도는 그저 보냄을 받은 자들이다. 예수 – 12사도 – 72제자로 이어지는 파송의 사건과 그것을 통한 예수의 사명선언의 확장속에서 ‘사도’라는 단어는 원래의 뜻인 ‘메신저’ 그리고 쫌 더 쉽게 이해하자면 ‘선발대’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 물론 사도행전에 나타나는 그 용어의 중요성을 부인할 수 없지만, 재밌는 점은 사도행전에서 정작 가장 ‘사도’다운 삶을 사는 이는 사도의 전통성에서 벗어나 있던 바울이며, 그 범위가 열둘에 한정되지 않는다는 것이다(행 14:14).

누가복음에서 사도들은 그 중요성이 반감된다. 그들은 다른 제자들보다 더 뛰어난 자들이 아니다. 공관복음서 가운데 가장 늦은 시기에 쓰여진 누가의 기록은 사도라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체계를 잡아나가고 있던 교회 상황을 전제로 하고 있다. 어쩌면 그들은 ‘사도’라는 이름을 통해 어떤 특권을 누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누가에게 있어서 그들은 아직까지 제자들이라는 집단에 속한 어떤 사람들일 뿐이다. 특별히 선발대의 역할을 맡은 것을 무시할 수 없지만 그것이 그들에게 하늘이 내려주는 직무나 특권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그들보다 제자들이 먼저 부르심을 받았으며 사도들은 그 속에서 뽑혔을 뿐이다. 이것은 분명 누가의 공동체 안에 존재하는 계급체계를 재고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사도의 권위는 상대화되고 그 자리는 제자들로 채워진다. 이어지는 이야기를 통해 누가는 독자들이 자신을 사도가 아니라 제자들에게 동일시 하도록 강권할 것이다. 그리고 이런 제자집단과의 동일시는 누가의 독자들을 향한 더 발전된 자기 정체성을 제공할 것이다.

사도와 정탐꾼, 그리고 선발대

앞에서 나는 손 마른 자의 이야기를 예수의 공격 전술이라는 제목으로 풀었다. 기존 체제에 대한 예수의 공격을 여리고성 이야기에 빗대어 생각해본다면 여기서 사도들은 먼저 보냄을 받았던 열두명의 정탐꾼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이야기에서도 누가복음처럼 열두 정탐꾼의 이름을 일일이 나열하고 있다. 하지만 당시 열두명의 정탐꾼은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는 가나안 땅에 있는 아낙 자손들을 보고 겁을 집어 먹는다. 하지만 이 이야기에서는 흐름이 다르다. 예수의 공격 전술에 맞서는 사탄의 대응은 이전의 실패를 거울 삼아 더 발전했다. 12명 중에 다수를 포섭했던 이전의 전술은 결국 나머지 두명으로 인해 결론적으로는 실패한 작전이 되고 말았다.  이번에 사탄은 다수가 아닌 단 한명의 배반자를 숨겨 놓음으로써 열두 정탐꾼을 무력화 시킬 생각이다(22:3). 하지만 누가는 열두 사도가 아니라 제자들에 방점을 둠으로써 사탄의 전략이 결론적으로 실패할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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