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롭게 번역된 주기도문에 대한 생각

요새 교회에서 성경을 개역개정으로 바뀌면서 새롭게 번역된 주기도문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몇십년 외운 주기도문을 새롭게 외워야 되는 것도 어려움이었지만
그보다 이게 쓰다보니 답답한 구석이 한두군데가 아닙니다.
이 글에선 새롭게 번역된 주기도문의 문제점을 몇가지 짚어보고자 합니다.

읽으시는데 도움이 되셨으면 하는 마음에 성서공회에서 발행하는 [원문연구]에서 주기도와 관련된 논문들을 링크해봅니다. <여기>

일단 새롭게 번역된 주기도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한 양식을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우리를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아멘

다음은 헬라어 원문입니다.

πάτερ ἡμῶν ἐν τοῖς οὐρανοῖς,
ἁγιασθήτω
τὸ ὄνομά σου,
ἐλθάτω βασιλεία σου,
γενηθήτω τὸ θέλημά σου, ὡς ἐν οὐρανῷ καὶ ἐπὶ γῆς.
τὸν ἄρτον ἡμῶν τὸν ἐπιούσιον δὸς ἡμῖν σήμερον·
καὶ ἄφες ἡμῖν τὰ ὀφειλήματα ἡμῶν, ὡς καὶ ἡμεῖς ἀφήκαμεν τοῖς ὀφειλέταις ἡμῶν·
καὶ μὴ εἰσενέγκῃς ἡμᾶς εἰς πειρασμόν,
ἀλλὰ
ῥῦσαι ἡμᾶς ἀπὸ τοῦ πονηροῦ.

1 ‘아버지의’ VS ‘당신의’

가장 걸리적 거리는 것은 ‘아버지의’라는 소유격 반복구 입니다.
이건 헬라어 σου를 번역함에 있어서 지속적으로 제기되는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존댓말이 없는 외국의 주기도문이야 그냥 you로 번역을 하면 되겠지만 이걸 우리나라 말로 옮기면서 2인칭 존댓말을 찾기 힘들다는 것이 문제인 것이지요.
가장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는 대안이 ‘당신’이라는 말이긴 합니다만… 이 ‘당신’이라는 말을 반대하시는 분들의 논리는 분명합니다. “너는 니네 아버지한테 ‘당신’이라고 하냐?”는 것이죠. -_- 사실 이렇게 말하면 할말은 없습니다.
하지만 이 ‘당신’이라는 말이 사실 존댓말도 아니고 반말도 아닙니다.
이 말은 친숙한 관계에서 사용될 때 반높임말의 느낌을 갖음과 동시에 반대로 친숙하지 않은 상황에서 사용될 때는 상대에 대한 반낮춤말 느낌도 있습니다.
즉, ‘당신’이라는 말 자체는 어떤 뜻도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다시 말해서 ‘아버지의’라는 말보다 ‘당신의’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문법적인 판단 기준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보다는 주기도문을 산문이 아닌 운문으로 볼 때 시적 언어로써의 ‘당신’의 사용이 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아직 우리나라에서 시적언어로 쓰이는 ‘당신’이라는 단어는 낮춤말의 의미보다는 높임말의 의미를 더 많이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기때문에 주기도문의 언어들을 과도하게 생활용어나 산문용어의 문법으로 가위질하기 보다는 시적언어의 느낌을 살리는 편이 더 자연스럽다는 생각입니다.

2 이런 일용할…

다음으로 걸리적 거리는 것은 여전히 고쳐지지 않고 사용되어지는 ‘일용할’이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를 들을 때마다 저는 이 말이 본래 가지고 있는 의미에 물타기를 하려는 의도처럼 보여 껄끄럽기 그지 없습니다.
사실 이 단어는 하루먹을 양식에 대한 간구입니다. 이틀도 아니고 단 하루 먹을 양식말입니다.
이것은 지속적으로 인간의 소유욕에 대한 제동을 걸고 있는 주기도문의 보석같은 단어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현대에 거의 사용하지 않는 ‘일용할’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뜻을 모호하게 하고 있습니다.
과거 한글개역판에서 그 단어를 쓴 것은 이해할 수 있으나 나름 개정되어서 다른 것들에는 손을 대면서 이 단어에 손을 대지 않은 것을 이해하기 힘듭니다.
이것은 총신대 정훈택 교수님이 제안하신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이나 ‘하루 먹을 양식’ 같은 말로 번역되거나 ‘굶지 않게 하소서’같은 의역이 사용되어지는 것이 훨씬 좋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그리고 일용할 ‘양식’보다는 ‘밥’이나 ‘끼니’라고 하는 것이 옳바른 번역이라고 생각되네요.

3 잘못한 것 ≠ 죄?

다음으로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것은 사람에게 잘못한 것과 하나님께 잘못한 것을 구분하는 듯 보이는 언어사용입니다.
개정 주기도문은 우리가 용서하는 것은 ‘잘못한 것’으로 하나님이 용서하시는 것은 ‘죄’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두가지는 원래 같은 단어입니다.
더군다나 ‘죄를 용서하다’라고 번역된
ἄφες ὀφειλήματα가 원래 ‘빚을 탕감해주다’라는 사회적 의미를 포함하고 있음을 감안할 때 이런 언어적 구분은 “우리에게 빚진자를 탕감해주듯이 우리의 빚을 탕감해 주소서”라는 직역에서 짐작해 볼 수 있듯이 원문이 가진 사회적이고 관계적인 의미를 훼손시키고 있는 번역이라고 생각합니다.
더군다나 두가지 단락이 다른 길이로 인해 운율상으로도 읽기에 심하게 어색합니다.
둘중에 하나로 통일을 시키던지 했으면 좋겠습니다.

4 권능은 또 뭐냐?

일단 한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흔히 주기도문에서 송영 역할을 하는 이 부분은 헬라어 원문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후대 삽입구로 고대사본들에는 나타나지 않아 네슬알란 27판에는 본문에서 삭제되어 있는 구절입니다.
하지만 워낙 교회에서 오랫동안 써왔고 보수적인 교단에서는 이 부분을 삭제하기를 반대하기 때문에 유지되고 있는 구절이라 하겠습니다.
개인적인 생각에선 성서신학적인 연구결과들을 조금은 더 반영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일단 본론으로 넘어가서 과거 개역에서는 이 부분을 ‘권세’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런데 그걸 알기 쉽게 번역한다면서 ‘권세’와 별다를 것 없는 ‘권능’이라는 말로 번역했습니다.
이런 개정은 왜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그냥 헬라어의 느낌을 그대로 살려 ‘능력’이라고 번역한다면 더 없이 좋겠으나 찬송구절이라 그걸 굳이 ‘권능’이라 쓴 것은 이해하겠습니다.
하지만 그냥 ‘권세’로 뒀어도 별 문제 없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만큼 의미없는 개정이라는 생각입니다.
* 실제 ‘새번역’에선 그냥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라고 그대로 쓰고 있네요.

5 주기도문이 몇개?

무엇보다 이번 주기도문이 맘에 안드는 것은 우리나라에 출판된 어느 성경 번역본에도 반영되지 않은 번역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마태복음을 읽으면서 읽게되는 주기도문과 외우게 되는 주기도문이 서로 다르다는 것입니다.
새번역과 같은 의미동등성을 중시하는 번역본이야 그럴 수 있다고 치지만 예배용 성경으로 기획되어 만들어진 개역개정 성경의 최신판인 4판에도 이 주기도문은 반영되어 있지 않습니다.
하긴 개역개정보다 후에 번역된 주기도문이니 어쩔 수 없겠네요. -_-
이건 번역보단 이걸 채택한 교단들에 대한 불만이라 하겠습니다.
결국 개역개정 5판이 나올 계획이거나 새로운 예배용 성경으로 온 교회가 다시 바꿀 계획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앞으로 우리는 예배때 읽는 성경에도 나오지 않는 번역의 주기도문을 외워야 합니다.
예배용 성경과 연결되지 않은 주기도문이라니 이건 개념을 어디다 뒀는지 모르겠습니다.
새로 번역된 사도신경도 그렇지만 현대적 느낌을 살리지도 못한 상태에서 기존에 것들에도 손을 대버려 사용하기에 거슬리는 것이 한두가지가 아닙니다.
정말 개정을 하기 위해 사업을 벌린 것인지 이벤트용으로 후다닥 만들다보니 엉성해진 것인지…-_-
더 어처구니 없는 것은 사람들에겐 이 주기도문이 개역개정 번역으로 소개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말은 바로 하랬다고 개역개정에는 기존의 주기도문이 그대로 들어가 있습니다.
이번 주기도문은 성경번역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이벤트인 것 같습니다.

120년만에 주기도문과 사도신경 개정

어쨋든 여기까지 새롭게 번역된 주기도문에서 맘에 안드는 것 몇가지를 짚어 봤습니다.
결론은 새로 번역된 주기도문은 한마디로 뷁!!이라는 겁니다. -_-
이건 철저히 개인적인 의견입니다. 이견이 있으시면 댓글로…^_^v

5 Comments

  1. 헬라어 원문이라고 인용한 사본은 무슨 사본입니까? 네모칸으로 기록된 곳은 유실된 단어를 뜻하는 것인지요. 마6의 정경화에 있어서 시내산 사본이나 바티칸 사본이 사용되었는데, 시내산 사본에는 3글자만 유실되었고, 바티칸 사본에는 모두 기록이 되어있습니다. 출처자체가 비중없는 사본 같습니다.

    1. 네모칸으로 기록된 것은 작은그릇님의 컴퓨터가 유니코드를 제대로 표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유니코드의 추가 글꼴을 설치하시기 바랍니다.

      헬라어원문으로 인용한 것은 티셴도르프 8판입니다. 무슨 사본이냐고 물어보시면…-_-;;

      본문비평을 할 때 어느 특정사본만을 가지고 하지는 않습니다. 여러가지 사본들을 수집하여 분석하고 가장 원문에 가까운 본문을 재구성해놓은 것을 비평본이라고 합니다.
      아마 지금 작은 그릇님께서 보시고 계신 본문은 네슬알란트 27판일 것입니다. 티셴도르프8판은 그것보다 약간 먼저 나온 것이구요. 본문이 크게 다르진 않습니다. 참고로 티셴도르프는 시내사본과 바티칸 사본을 최초로 발견하고 출판한 성서고고학자입니다.

      출처자체가 비중없는 사본이라는 말은 주기도문을 번역한 본문이 잘못되었다고 말씀하시는 것인지요? 아니면 제가 쓰고 있는 글의 전제가 되는 헬라어 본문이 잘못되었다는 말씀이신지요?
      어떤 쪽이든 헬라어 원문은 현재 가장 권위있는 네슬알란트 27판(UBS4판)의 본문을 동일하게 기준으로 하여 사용하고 있습니다. (제가 티셴도르프8판 본문을 인용한 것은 UBS4판의 본문을 웹상에 개시하는 것이 저작권 위반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6장의 비평본 작업에는 바티칸 사본과 시내사본뿐만 아니라 5만여개에 이르는 신약 사본들이 사용되었습니다.
      그것의 결과물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네슬알라트 27판 혹은 UBS4판이라 불리는 비평본입니다.

      제가 확인해본 결과 주기도문 번역에 있어서 문제가 되는 사본은 (특히 마지막 구절의 생략에 관해서) 디다케와 다수본문이라 불리는 사본들입니다.
      범위를 넓혀서 마태복음 6장 전체를 보더라도 시내사본과 바티칸 사본의 기록은 대부분 일치하는 반면 베자사본을 비롯한 과거 서방본문으로 불리던 것들은 이문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시내사본과 바티칸 사본이 사용된 것은 정경화 작업이 아닌 이처럼 지금 작은 그릇님께서 보고 계실 비평본과 그 밑에 달린 흔히 이문이라고 부르는 비평장치들을 만드는데 사용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번 주기도문의 문제는 동일한 본문의 번역에 있어서의 문제이지 사본학적인 문제는 아닙니다. 동일한 사본학적 전제 위에서 그것을 번역함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한 것입니다.

      본문비평에 대한 도움은 메쯔거나 알란트의 사본학 서적을 참고하시길 바라며 간단하게는 신현우 박사님이나 장동수 박사님이 쓰신 책들도 괜찮습니다.

  2. 개정된 사도신경 주기도를 쓴 지 수년이 되었지만 입에 붙지 않아 예배때마다 맘이 좀 불편해서
    여기 저기 사도신경에 대한 이런 저런 내용을 찾다가 베땅이님 홈피까지 오게 되었네요…

    개정된 사도신경과 주기도문으로 인해 교단사이에서 혹은 신구세대간에 혹은 지역간에 당황스런 사례들이 여전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예장 총회에선 개정된 사도신경과 주기도문의 사용을 금지해 달라는 헌의안도 있었는데 부결 되었더군요.

    비단 주기도문 뿐만이 아니라 공인된 성서공회의 개역 개정판에 오역들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의미를 희석하거나 심지어 꼭 필요한 부분들을 빠트리기도 했다는 글들을 볼때 원문을 보는 나라의 사람들이 부럽기도 합니다.

    120명의 학자분들이 머리를 맞대고 완성하신 것이라던데…ㅡㅜ
    아니함만 못하면 차라리 그대로 두는 것이 나은 것인데…

    성경의 번역을 현대에 맞게 개정하는 것엔 이의가 없으나 성급하고 조급했던 건 아닌지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좋은 글 잘 보고 갑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평안하시길^^

    1. 일단 부족한 글에 관심 가져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희도 거의 1년이 다 되어 가는데 아직 어른들은 외울 엄두도 못내고 계십니다. -_-
      하지만 사도신경과 주기도문의 번역과 개역개정성경의 번역은 그 의미나 평가가 다르게 이뤄져야 할 것입니다. 서로 다른 단체에서 번역했고 그 의도 역시 다릅니다.
      성경번역에 오역문제는, 어떤 번역본도 완벽한 번역은 없습니다. 새로운 번역에 대해서 오역이 많다던가 의미를 왜곡했다던가 하는 것은 보통 개정이라는 작업자체를 별로 안좋아하는 보수단체들에서 흠집잡기용으로 흘리는 이야기들입니다. 공동번역이 나왔을 때도 새번역이 나왔을 때도 언제나 있어왔던 문제제기이지요. 귀담아듣지 마시길…
      오역의 문제라면 사실 개역개정보다 개역한글때 더 심했습니다. 많이 나아진 것이지요. 특히나 개역개정과 개역한글의 사이에는 헬라어 본문 자체가 변했다는 문제들도 감안해야합니다. 새로운 고고학적 발견으로 원어 본문 자체가 바뀌었으니 어느정도의 차이는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주기도문과 사도신경의 번역 문제를 제기한 것은 번역에 문제가 있다는 자체의 문제이기보다는 하려면 더 과감히 했어야 한다는 문제제기입니다. 교단의 눈치를 보느라 너무 이도저도 아닌 번역이 되어버렸기 때문이지요. 저는 개인적으로 현대적인 언어의 번역을 선호합니다. 그런 입장에서 볼 때 별다른 개정의 느낌이 없는 주기도문과 사도신경의 번역은 교회에서 쓰기에는 불편하고 개선은 되지 않은 그런 작업처럼 보였기 때문에 쓴 글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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