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받는 자 가운데 하나님이 계셔?

몇일 전 민중신학 수업을 듣는 중에 ‘하나님의 현존’에 대해 너무 쉽게 말하는 사람들에게 화가나서 페이스북에 열폭을 했습니다. 그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글들을 여기에 옮겨와 봅니다. 다른 이야기들도 섞여 있어서 글이 어지럽습니다. 이해하고 봐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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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의 신조 가운데 하나는 옳은 말이나 옳은 행동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옳은 결과를 만들어 내는 삶이라는 것이다.
에큐메니칼을 외치면서 배타적인 자들을 밀어내고 정작 에큐메니칼을 진영화 시키는 이들이 진정한 에큐메니칼인가? 아니면 보수측에 가서는 골보수처럼 말하고 진보에 와서는 진보처럼 말하면서 서로의 의견을 좁히려 애쓰는 박쥐들이 진정한 에큐메니칼인가?
고통받는 자 가운데 하나님이 계시다? 말은 쉽지만 그만큼 폭력적인 언어가 또 있을까?
문제는 옳은 말을 하느냐 아니냐가 아니라 그 고백 속에 현실을 바꿔낼 힘이 있느냐이다.
고통받는 사람들의 현실을 나열해놓고 “이들 가운데 하나님이 계십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을 의미없는 존재로 만드는 언사이다.
하나님이 전능하시다 고백하는 것이 돈 잘벌게 해주신다는 뜻이 아니라고 말하려면, 그냥 옛날 신화일 뿐이라고 말하지 않으려면, 하나님이 어디서 어떻게 어떤 결과들을 만들어 내시는지 삶을 통해 밝혀낼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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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밖에서 신학을 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오늘날 교회가 사람들의 눈에 실망스러운 것은 사실이니… 근데, 소위 예수 믿는 무리들 사이에서도 현실화 될 가능성 없는 이상 따위에 귀 기울여 줄만큼 세상은 한가한 바보가 아니다. 신학은 어떤 방식, 어떤 형태로든 교회를 통해 자신의 가능성을 증명해야 한다. 오늘날 한신신학의 발전 한계는 여기 있다고 생각한다. 마지막 문장에 동의하든 말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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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생들의 가장 큰 문제점은 다른 사람이 평생 고민해서 고백한 것을 마치 공식처럼 너무 쉽게 가져다 쓴다는 것이다. ‘고통 가운데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오직 믿음으로 구원얻는다’ 등등… 신학이란 내 믿음을 내 말로 진술하는 것이다. 그들이 왜 그 말을 할 수 밖에 없었는지를 고민하는 과정없이 말만 가져오는 것은 삶의 경험을 왜곡시키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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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내가 가장 싫어했던 말 가운데 하나가 “너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말이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내 마음에 드는 생각은 ‘이해해줘서 고마워’가 아니라 ‘니가 뭔데?’였다. 빚쟁이 피해서 야밤에 도망다니고, 먹을 것이 없어서 옆집에서 감자 두세알씩 훔쳐먹고, 과자 사먹을려고 두시간씩 걸어서 중학교를 다녔던 것을 이해한다고? 그 오만함에 쓴 웃음을 지었다. 오히려 나를 위로한 말은 어떤 전도사님이 해주셨던 ‘당신은 도대체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다’라는 말이었다.
그래, 고난받는 자들 가운데 하나님이 계실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하나님은 고난받는 본인이 발견하는 것이지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이 함부로 발견하는 무엇이 아니다. 고난 가운데 계신 하나님은 이론이 아닌 신비다. 그것을 발견하려는 자는 그만한 자격이 필요하다. 우리가 할 수 있은 것은 그 속에 하나님이 계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그 자리에서 그냥 함께 울어주는 것이다. 고통이라는 현실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모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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