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생각하는 목회자론

예전부터 정리를 해봐야지 생각은 했었지만 엄두가 나질 않았는데

뉴스앤조이에
TV 속 목사들, 설교인가 쇼인가?라는 글에서 평소에 내가 생각하던 목회자론과 비슷한 의견을 많이 발견하고 정리해보기로 했다. 역시나 아직 정리하여 글로 쓸 단계는 아닌 듯 하여 두서없이 짧은 글들의 형태로 생각나는 것을 적어본다.

차후에 완성된 형태의 글로 만들거나 추가하거나 수정하거나 하는 작업들이 있을 것이다.


귀차니즘 때문에 완성된 글의 형태가 나올지는 장담 못하겠다.

1) 목회자는 성직이 아니다.

목회자는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제사장이 아니다. 우리의 제사장은 예수그리스도 한분 뿐…


목회자에게 부르심이 있다고 말하지만 목회자에게 있는 부르심을 주장하기보다 평신도의 직업과 삶에 동일한 부르심과 확신이 없음을 부끄러워해야 한다.


우리의 부르심은 직업을 위한 부르심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의 길을 따르는 부르심이며 그 앞에 구분은 존재하지 않는다.


평등한 공동체, 몸된 교회 안에 하나의 기능으로써 존재하는 목회자라는 직분


전임사역으로써의 목사 혹은 전도사의 직분은 몸 가운데 자신의 기능을 충실히 수행하느라 더 깊은 말씀으로 들어갈 기회가 적은 다른 기능을 담당하는 지체들이 그 부분에 대한 것을 위임하여 생활비를 지원하여 일할 수 있는 풀타임 사역자를 고용하는 것.


교회에서 목회자는 분명 공동체에 의해 고용된 사람이다. 이 말이 싫다면 위임된 사람이라고 하자.


적어도 권력을 가지고 휘두를 수 있는 사람은 아니라는 것이다.

2) 교회의 당회장은 일반신도에게

목회자의 직분이 성직이 아니라 몸의 기능일 뿐이라면 당연하게도 교회의 당회는 그 기능을 담당하는 다른 신도에게 위임되어야 한다.


물론 개척교회의 상황에서 이런 실행은 불가능하다. 목회자 혼자 모든 일을 해야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선 어쩔 수 없다.


목회자가 성직이 아닌 하나의 성도로써의 기능이니 목회자가 하는 것도 가능하다.


하지만 목회자의 기능이 분리될 수 있는 시점이라면 최대한 빨리 그 기능은 다스림의 은사를 가진 성도에게 위임되어야 한다.


이 시점은 장로가 서는 시점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물론 우리나라 장로님에 대한 신뢰가 목회자 가운데 그다지 두터운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목회자가 성도를 양육하는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장로는 돈주고 따는 자리가 아니다.

3) 설교는 피드백을 필요로 한다.

목회자의 직분이 다른 기능을 담당하는 지체들의 신앙적 부족을 채우는 역할이라는 것은 다른 부분에 있어서 목회자 역시 부족함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실질적으로 가장 사회경험이 적은 사람이 목회자이며 전도사들이고 사역 이외에 가장 좁은 인간관계를 유지하게되는 부류의 사람이 목회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만큼 일반성도의 삶에 대한 이해가 부족할 수 밖에 없고 그 현장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경험이 부족할 수 밖에 없다. 당연스럽지만 목회자가 자신의 경험 밖에 있는 것을 설교하는게 진실할리 없다.


물론 이 말은 목회자가 인간관계를 넓히고 사회경험을 많이 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성도들이 설교와 양육에 대한 부분을 목회자에게 위임하듯이 목회자의 경험의 부분도 목회자가 성도에게 위임할 수 있어야 한다.


이 기능을 담당하는 것이 피드백이다. 더 쉬운 말로 하자면 설교에 대한 질문 비평을 해야한다는 것이다.


목회자가 어떤 설교를 했다면 그 설교가 성도 전체의 삶에 그대로 적용될리 만무하다.


성도의 삶에 문제가 있건 설교에 문제가 있건 말씀은 삶과 부딫히는 것이 정상이다.


그 가운데 목회자의 설교에 대해서 질문하고 지적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이런 말씀을 하셨는데 제 삶에는 도무지 적용이 되질 않습니다. 또 성경의 다른 부분엔 이런 이런 말이 있는데요. 목사님 설교와 뭔가 다른 것 같습니다만…” 이런 식의 질문이 될 것이다.


그러면 목사는 그 피드백을 받아들여서 설교를 재검토하고 혹 설교가 잘못되거나 부족한 이해위에 서 있다면 성도들 앞에서 수정해야 한다.


“이전에 이런 이런 설교를 했었는데 누구 누구의 질문을 받고 다시 연구해보니 이런 이런 측면은 전달 과정에 충분한 설명이 이뤄지지 않은 것 같고 이런 부분은 성경안에 전혀 다르게 읽는 시각도 존재하는 것 같다. 또 이런 이런 부분은 분명히 나의 개인적인 생각으로 인해 잘못되거나 제한적인 이해만을 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런 이야기를 했을 때 목회자의 설교에 대한 신뢰가 떨어지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과정들이 반복된다면 수정되지 않는 부분에 대한 신뢰는 더욱 확고해질 것이다.


난 적어도 부흥강사 같은 1회성 설교를 하는 사람이 아닌 한 교회를 담당하는 담임목사의 최고의 축복은
이전에 자신이 잘못한 설교를 수정해서 알려줄 수 있는 청중이 늘 내 앞에 있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설교를 하다보면 내가 생각해도 말도 안되는 것 같은 설교를 하는 경우가 있다. 혹은 설명이 부족하다고 생각되는 부분도 있다 그럴 때 그 사람이 계속 내 옆에 있다면 나중에라도 그 사람을 붙잡고 설명해줄 것이다. 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

4) 목회자를 죄로부터 보호하는 것은 평신도의 몫

목회자가 아무리 청렴하다고 해도 끊임없는 유혹앞에선 장사없다.


교회는 서로를 이 죄로부터 보호해줄 의무가 있다.


무엇보다 문제는 목회자의 도덕성을 과하게 신뢰하고 신경쓰기 싫어한다는 것이다.


목사님 이름으로 된 통장에 교회 재정이 지속적으로 관리된다면 그건 목회자를 위한 성도의 직무유기이다.


감사와 총회의 재정보고는 그래서 있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낸 헌금이 어떻게 쓰이는지 가장 발벗고 감시해야 하는 사람은 그 헌금을 낸 사람이다.


목회자가 아무리 맘을 굳게 먹어도 참치선물세트같은 선물들마저 거절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결국 그것이 밴츠가 되고 골프회원권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목회자를 보호하는 가장 좋은 길은 성도 스스로 그런 선물들을 자제하는 것이다.


누군가 반대할 수 있다. “목회자가 좋은차 타고 다니면 그것이 죄인가? 교회를 대표하는 사람이 후줄근하게 티코나타고 다녀서 되겠는가?”라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건 죄가 아니지만 너무 심한 것은 문제가 아니냐고 말하겠지만 난 담대히 말한다. 그것은 죄이다.


세상을 향해서 예수그리스도가 걸으셨던 십자가의 길을 왜곡하여 성공주의인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모든 행위는 죄이다.


그리고 목회자를 그렇게 죄 가운데 방치하는 성도는 더 큰 죄이다.


그것이 죄인지 아닌지 혹은 세상법에 저촉되는지 아닌지를 떠나서


목회자라는 지체로 하여금 하나님 외에 맘몬이라는 것에 자신의 안정감을 두게 내어버려두는 교회의 죄이다.

5) 목회자에게 직업을 허락하라.

목회자는 일해야 한다. 적어도 노동의 값어치에 대해서 이야기하려면… 또한 우리나라에 내가 낸 헌금이 목사 배부르게 하는데 쓰이는게 싫다는 인식이 종식되게 하기 위해서라도 목사는 스스로 직업을 가짐을 통해서 교회 재정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물론 풀타임 사역자가 다른 일을 갖는 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적어도 한두시간짜리 일이라도 가지려고 노력하라. 안되면 글을 쓰던가 아르바이트라도 하라.
봉투라도 붙이던가 구슬이라도 꿰라!!

바울은 그렇게 했다. 그가 자비량으로 일한 것은 돈이 필요해서도 아니고 후원을 받을 권한이 없어서도 아니다.


바울은 그 이유를 교회에게 걸림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고 고린도전서에서 밝히고 있다.


목회자는 자신의 사역을 통해서 생계를 유지할 권한이 있다.


물론이지만 이런 의미에서 목회자의 사례는 수입이고 당연스럽게 소득세를 내야한다.


하지만 가능하다면 혹은 불가능하더라도 될 수 있는대로 직업을 가지라.


그리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재정들이 조금이라도 더 많이 남을 위해 흘러가게 하라.

6) 십일조는 구제비로

언젠가 들었다. 우리나라 교회의 십일조만 다 걷으면 세계의 기아문제가 해결된다고…


물론 이 통계가 맞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원래 십일조의 의미가 가난한자(과부, 고아, 외국인, 레위인)을 위한 것임을 이해해야 한다.


십일조를 지금 해야 하느냐 하지 말아야 하느냐로 싸우는데


내 의견은 간단하다.


십일조는 성경적이지 않다. 하지 마라. 대신
십십조를 하라.

기독교는 십의 일을 드리고 나머지는 내가 갖는 종교가 절대 아니다.


십의 십을 모두 드릴 준비가 되어 있다는 의미로 십의 일을 드리는 것이 기독교의 전통이다.


십일조를 해야하는지 말아야 하는지는 기독교인에겐 너무 부끄러운 문제제기이다.


나 스스로는 십일조 폐지에 찬성하지만 그 이유는 십십조를 하기 위해서이다.


물론 있는 것을 전부 교회에다 가져다 바치라는 말은 절대 아니다.


교회에 십일조를 하지 말라 대신 하나님 나라에 십십조를 하라는 것이다.


교회에 바치는 헌금은 운영비로 쓰여선 안된다. 운영비는 별도의 회비를 걷어야 할 것이다.


헌금으로 드리는 돈은 ‘나’ 혹은 ‘우리’의 경계를 넘어서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사용되어져야 한다.


그리고 그 가장 작은 실천이 십일조이며 그 십일조는 절대로 다른 재정들과 통합되어서 관리 되어서는 안되고


별도로 구분하여 사용되어져야 한다.

7) 예배는 일주일에 한번만, 나머지는 다른 시간들로

우리나라는 예배가 참 많다. 하지만 그 때문인지 ‘세상가운데서 십자가의 길을 따라살려 노력하던 하나님의 백성들이 일주일에 한번 함께 모여 서로를 위로하고 사랑하는 자리’라는 예배의 본래 의미가 상실되어 버렸다.


특히나 새벽예배는 정한수 떠놓고 기도하던 풍습이 그대로 교회 안으로 들어온 케이스라고 생각된다.


“예수님이 새벽에 기도하셨으니 우리도 해야한다.”라고 말하시는 분들은 정작 그 이벤트가 아닌 그 삶을 따라살고 있는지 점검해보자.


교회에서 함께 모일 시간이 있다면 그 시간을 예배 외의 다른 순서들로 채워낼 수 있을 것이다.


주일 예배는 온 성도가 함께 모이는 자리여야 한다.


정말 어린 아이들을 위해 예배를 나눠놨는지, 아니면 어른들이 예배드리기 시끄럽고 정신없으니 아니들을 몰아낸 것인지, 그 시작은 알 수 없지만 예수님이 가까이 오는 것을 막지 말라 하셨던 어린 아이가 참여하지 못하는 예배가 올바른 예배라고 나는 믿지 않는다.


주일학교 성경공부 같은 것들은 예배 시간 외에 연령별 순서등에서 이뤄질 수 있는 부분이다.


또한 새벽 기도회는 서로 나누는 묵상모임으로 대체될 수 있다.


설교는 1주일에 한편이면 족하다. 그 한편이라도 삶에 적용시킬 수 있다면…

8) 교회는 건물이 아니죠.

무슨 말이 더 필요하랴… 교회는 공동체의 모임이지 건물이 아니다.


스타벅스에 모여도, 길거리에서 모여도 성도가 있는 그 모임이 교회이다.


건축은 하지 말자.


초대 교회 때 교회들은 대부분 가정집에서 예배를 드렸다.


스데반 집사가 왜 죽었나? 그의 마지막 말 중에 이런 말이 있다.


“사람의 손으로 지은 곳에 하나님이 계실 수 없다.”


오늘도 우리는 이 사람을 향해 돌을 던지는 사울 같은 자가 되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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