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공격 전술 (눅 6:1~11)

한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시게 되었다. 그런데 그의 제자들이 밀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벼서 먹었다. 그러자 몇몇 바리새파 사람이 말하였다. “어찌하여 당신들은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까?”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다윗과 그 일행이 주렸을 때에, 다윗이 한 일을 너희는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다윗이 하나님의 집에 들어가서, 제사장들 밖에는 먹어서는 안 되는 제단 빵을 집어서 먹고, 자기 일행에게도 주지 않았느냐?” 그리고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다.”
또 다른 안식일에 예수께서 회당에 들어가서 가르치시는데, 거기에는 오른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예수를 고발할 구실을 찾으려고, 예수가 안식일에 병을 고치시는지 엿보고 있었다. 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서, 가운데 서라.” 그래서 그는 일어나서 섰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에게 물어 보겠다. 안식일에 착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악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목숨을 건지는 것이 옳으냐? 죽이는 것이 옳으냐?” 예수께서 그들을 모두 둘러보시고서, 그 사람에게 명하셨다. “네 손을 내밀어라.” 그 사람이 그렇게 하니, 그의 손이 회복되었다. 그들은 화가 잔뜩 나서, 예수를 어떻게 할까 하고 서로 의논하였다.

평행본문 마 12:1-14, 막 2:23-3:6

누가에게 있어서 안식일 치유 사건은 예수님의 사역의 확장과 맞물려 돌아간다. 이전에도 그는 안식일에 병자를 치유한 적이 있다(4:31). 하지만 당시엔 예루살렘과 접촉이 없었다. 예루살렘으로부터 온 사람이 처음 언급되는 것은 그 후이다(5:17). 하지만 이번엔 문제가 된다. 더 이상 그는 가버나움 촌 동네에 살고 있는 이름 모를 누군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첫 걸음으로서 갈릴리 각 지역으로 자신의 사역을 확장시켰고 그런 그의 확장은 예루살렘에 있던 자들로 하여금 예수라는 듣보잡에게 관심을 갖게 했다. 그의 일거수 일투족을 예의 주시하고 있는 바리새인들 앞에서, 이제 예수의 도발이 시작된다.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다

누가는 이 이야기의 시작부터 마가와는 다른 설정을 하고 있다. 마가는 제자들이 길을 만들기 위해 밀이삭을 자른다. 이것은 율법에 어긋나는 행위이다. 하지만 누가에게서 이 문제는 손으로 비벼서 먹을 정도로 소량의 밀 이삭을 잘라서 길에서 허기를 채우는 제자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런 모습은 농경마을에서는 흔한 모습이다. 이 이야기를 읽는 사람들은 바리새인들이 이런 행위가 ‘안식일에 하지 말아야 할 일’이라고 주장했을 때 그 주장이 과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가 다윗의 예를 끌고 오는 것을 유의해서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 예시 속에 예수는 단 한번도 안식일에 대해 언급하지 않기 때문이다. 굳이 예시를 추가하면서까지 안식일에 대한 이야기로 끌고 가려는 마태에 비해 누가는 마가의 아이디어를 그대로 가지고 오고 있다. 즉, 누가의 예수는 안식일에 대해서 논쟁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가 논쟁하고 있다면 그것은 안식일보다는 먹는 행위에 대한 율법의 적용 가능성, 혹은 효용성 자체일 것이다. 예수의 대답은 인자가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인자가 종말론적 구원자에 대한 표현이라고 읽을 필요는 없다. 이전 사건에서도 그랬지만 누가에게서 인자는 그냥 ‘사람’이라는 의미를 포함하는 굉장히 중복적인 의미를 가진 단어이다. 안식일의 주인은 예수 자신이면서 동시에 그 날을 살아가는 우리네 사람들이다. 마가가 잘 지적하고 있듯이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읽을 때 이 구절에서 중요한 것은 그것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인지 아닌지의 문제가 아니다. 누가의 예수는 안식일의 개념에 대해서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바리새인들이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부분들을 예수가 교묘하게 피해가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와 바리새인의 첫번째 눈치싸움에서 바리새인은 자기들이 제기한 문제때문에 뻘쭘한 상황이 됐다. 차마 다윗을 범법자로 만들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누가가 ‘몇몇의 바리새인’이라고 표현하는 것을 바리새인에게 면책권을 주려는 의도라고 해석하는 것은 의미도 없고 근거도 없다. 그보다는 이 문제가 바리새인 가운데도 분명히 문제제기하지 못할만큼 애매한 상황이라는 설정을 하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즉, 이 문제제기는 처음부터 해석상에 무리가 있는 것이었고 아마도 ‘다른 바리새인’들은 그 문제제기에 동의하지 않았을 것이다.

두번의 안식일

두번째 이야기는 앞의 이야기와 구별되는 또 다른 사건이다. 누가는 ‘다른’ 안식일이라는 말로 두가지 사건을 7일 이상의 간격으로 떨어뜨려 놓는다.  이런 상황 설정이 어떤 효과를 나타낼지는 분명하지 않다. 구성상 두가지 이야기는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 분명하지만, 이런 시간의 간격은 두 이야기를 분리하기 보다는 이야기의 전개에 따른 반복의 효과를 보여주려는 것으로 보인다. 다시말해 두번째 사건은 첫번째 사건과 같은 날 일어난 동일한 이야기가 아니라 시간의 진행과 함께 더 발전된 갈등 상황을 만들어 내는 이야기이다.

이 두번째 안식일 이야기는 ‘안식일에… 가르치신다’는 말로 시작한다. 이 말은 조금 더 이른 시점에 있었던 사건을 떠올리게 하는데, 바로 그의 사명선언문인 이사야의 말씀이 읽어지던 사건이다(4:15~16). 이 이야기를 이 배경 속에서 읽을 때 우리는 그의 사명선언문 즉, “주님의 영이 내게 내리셨다. 주님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셔서,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셔서, 포로 된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먼 사람들에게 눈 뜸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 주고,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는 선언이 첫번째 안식일 치유 사역을 넘어 확장된 갈릴리 사역에서 어떻게 실현되어지고 있는지를 이 이야기 속에서 보게 된다. 그리고 그 대척점에 다시 바리새인들이 등장한다. 포로된 자, 눈먼 자, 억눌린 자를 만들어 내는 것이 무엇인지 이제 예수는 그들 앞에 보여줄 것이다.

앞서서 예수 때문에 난처한 상황에 처했던 바리새인들은 이번에는 뭔가 책잡을 것이 없을까 살피며 예수 근처를 어슬렁 거리고 있다. 그런 긴장감 속에서 예수는 회당에 있던  ‘손 마른 사람’을 만나게 된다. 바리새인들은 이것을 책잡기 좋은 기회로 여겼을 것은 분명하다. 예수는 바리새인들이 뭘 의도하고 있는지 이미 눈치를 채고 있다. 예수가 그들의 생각을 알았다고 해서 예수를 무슨 독심술사 인것마냥 그려낼 필요는 없다. 이 구절은 굳이 예수를 신적인 누군가로 그려낼 필요가 없다. 이미 누가가 설정해놓은 상황 속에서 바리새인들의 의도는 뻔히 보인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람의 마음을 읽어내는 예수의 신성이 아니라 이 상황을 뚫고 나가는 예수의 의도적인 도발이다.

그들은 예수가 이 사람을 고치시는지 지켜보고 있다. 만약 예수가 그를 고친다면 그것은 율법에 어긋나는 일이다. 랍비문헌에 따르면 당장 생명이 위험한 사람이 아니라면 안식일에 고치지 못하도록 되어 있다. 손 마른 사람은 당장 위급한 환자가 아니기 때문에 안식일에 그를 치유하는 것은 율법적인 책임을 져야하는 일이다. 반면 그를 고치지 않고 돌아선다면 지금껏 그는 바리새인들에게 굳이 해가 되지 않을 인물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 그는 바리새인들이 속한 사회를 유지하는 큰 원칙에 동의한다는 뜻이 된다. 하지만 예수를 따라다니던 무리들에게는 큰 실망거리가 될지도 모른다.

여기서 눈 여겨 봐야 하는 누가의 화법이 등장한다. 다른 복음서에는 그냥 ‘손 마른 사람’이라고 나오는 구절에서 누가는 구태여 그 사람의 마른 손이 ‘오른 손’이었다고 쓰고 있다. 왜 하필 오른 손일까? 당시 사회에서 오른 손은 ‘일하는 손’으로 여겨졌다. 그렇기 때문에 오른 손이 말랐다는 것은 그가 현재 일을 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말이 된다. 그는 아마도 한 가정의 가장이었을 것이고 누군가의 아버지였을지도 모른다. 정확히 그의 사정을 알 수 없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용직 노동자였을 당시 사회 속에서 오른 손이 말랐다는 것은 그가 오늘 먹고 살 것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라는 말이 된다. 어쩌면 그런 상황이 꽤나 오래됐을지도 모른다. 이것은 바로 앞에서 밀 이삭을 잘라먹던 제자들의 모습과 겹치면서 다시한번 율법을 향한 예수의 역공의 전제가 된다.

Yes or No?

예수가 묻는다. “안식일에 착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나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목숨을 건지는 일이 옳으냐? 죽이는 것이 옳으냐?” 질문의 내용만 놓고 본다면 바리새인들에게 예수의 질문은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는다. 목숨을 건지는 일은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좋은 일이라도 안식일에 일을 하는 것은 율법으로 금지된다. 단순하게 대답할 수 있는 물음처럼 보이지만 오른 손 마른 사람이 회당 중앙에 서서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는 상황에서는 얘기가 다르다. 원칙대로라면 그들은 이 사람의 고통을 외면해야한다. 하지만 이것은 자기 자신들에게도, 그들을 바라보는 이들에게도 쉽게 납득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오른 손 마른 사람이라는 율법의 경계 상황을 정면에 내세우고 있는  예수의 도전적인 수사법은 두가지 물음을 나란히 연결시킴을 통해서 첫번째 물음이 곧 두번째 물음의 대답이 되도록 하고 있다. 각각 두가지 질문의 쌍으로 연결된 두가지 수사법은 사실 각 쌍의 첫번째 질문에 yes할 수 있는지를 묻는 것이다. 바리새인의 경우 두번째 쌍의 첫번째 질문인 생명을 살리는 것에는 yes할 수 있다. 하지만 첫번째 쌍의 첫번째 질문에는 yes할 수 없다. 이런 바리새인들의 ‘원칙’이 ‘오른 손 마른 사람’이라는 현실 앞에서 난관에 봉착한다. 바리새인들이 첫번째 물음에 No하게 되면 그것은 이 사람의 현실을 외면하는 것이다. 그것은 곧 두번째 질문에도 No를 하는 것과 다르지 않은 상황이 된다. 즉, 이 사람의 고통을 외면하는 바리새인들의 율법은 그를 죽이는 행동과 다르지 않다!!!!

자, 손 마른 사람은 위급 환자가 아니다. 바리새인들은 그것이 율법에 어긋나기 때문에 그 사람을 고치지 않는 것이 올바르다고 여긴다. 하지만 그 사람은 오른 손이 말라 있어서 당장 일을 할 수 없고 그로 인해 그는 하루하루를 고통속에 살고 있다. 그 고통에 대하여 율법은 무엇을 말하는가? 율법은 아무말도 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사랑이 없는 원칙은 현실 앞에서 철저히 무능력하기 때문이다. 세상을 지배하는 체제의 경계선에 선 이 사람처럼 누가의 공동체 역시 그 세상의 균열의 드러나는 현장, 그 중심에 선다. 그리고 그 곳에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자리를 만든다. 마가는 자신의 복음서에서 동일한 장면을 현실에 침묵하는 자들을 향한 예수의 분노를 표현하기 위해 사용하지만 누가는 율법의 맹점과 그 아래서 고통당하며 신음하고 있는 현실 속의 사람들을 정면에 내세우고 있다.

그렇다면 예수는 율법을 어기고 이 사람을 치유하는 것이 옳은가? 여기서 우리는 본문을 자세히 읽어야 한다. 예수가 무엇을 하는가? 손 마른 사람을 앞세우고 바리새인들을 향한 일격을 날린 예수는 그 사람을 그 자리에서 치료하지 않는다. 다만 그에게 말한다. “네 손을 내밀어라” 본문은 예수가 그 손을 치료했다고 말하지 않고 손 마른 사람이 예수의 이 말대로 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손이 회복되었다. 예수는 율법을 어겼는가? 여기서 바리새인들은 멘붕에 빠진다. 손 마른 사람을 앞세운 예수의 도전 앞에서 그들은 자신들이 중요시 하던 율법의 한계를 뼈저리게 느끼면서 침묵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자신들을 향해 도전해오는 예수를 앞에 두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력 상태에 빠진다. 왜냐하면 예수는 안식일 법에 어긋나는 치료행위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손을 내밀라고 말하는 것은 사람을 치료한 것도, 율법을 어긴 것도 아니다.그들은 예수를 고소할 아무런 근거도 찾지 못했다. 손 마른 사람은 예수의 말에 순종함으로 그의 구원을 성취했다. 그리고 예수가 가르치던 눌린 사람을 풀어주는 일이 현실이 됐다. 하나님의 나라가 전진한 만큼 세상의 권세는 후퇴했다. 그들의 율법은 현실을 반영하지도 못할 뿐 아니라 자신들의 체제를 유지시켜주는 힘으로서의 기능마저도 없었다. 하지만 자신들의 나라가 무기력해지는 그 순간 하나님의 나라는 현실을 바꾸고 승리하신다.

바리새인들은 화가 났다.  다른 복음서들은 이 부분에서 예수를 죽이기로 작정하는 바리새인들의 계획을 명시한다. 하지만 누가가 그려내는 바래새인들은 그렇제 주도면밀하지 않다. 여기서 바래새인들의 분노는 율법을 어긴 예수를 처단하려는 분노가 아니라 예수의 도전 앞에 멘붕당해서 그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하는 분노다. 멘붕이라는 말이 적절하다. 여기서 분노했다는 말은 사실 ‘얼이 빠졌다, 제정신이 아니다’라는 뜻이다. 더 이상 예수는 듣보잡 동네 예언자가 아니다. 율법이라는 세상의 지배 시스템을 향한 그의 공격은 효과적이었다. 예루살렘은 갈릴리 촌동네에서 온 듣보잡 선지자 하나 때문에 혼란에 빠졌다. 그들의 법은 무능력해지고 그 법이 더 이상 세상을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은 명확해졌다.

구원을 완성하는 응답

앞에 이야기와는 달리 두번째 이야기에는 제자들이 등장하지 않는다. 마치 회당엔 예수 혼자 들어간 것처럼 제자들은 완전히 이 이야기에서 배제되어 있다. 율법과 예수가 부딫히는 그 경계선의 역할은 제자들에게서 손 마른 사람에게로 자연스럽게 넘어가면서 두 이야기의 흐름을 이어준다. 독자들은 제자됨의 모델을 제자들에게서 손 마른 사람에게로 전이시킬 수 있다. 이 이야기에서 누가의 독자들이 자신을 대입할 대상은 제자들이 아니라 바로 이 손 마른 사람이다. 그를 향해 하는 예수의 말과 그 사람의 행동 하나하나가 자신들의 이야기로 읽혀진다. 예수는 그 사람을 회당 가운데 서라고 명령한다. 그리고 그 사람은 그 말씀에 순종해 “일어나서 섰다.” 누가의 공동체는 이 대목에서 자신들을 향한 부르심을 듣는다. 그리고 그들은 손 마른 사람처럼 그 말씀에 순종해서 세상 가운데 하나님 나라의 표징으로 서야 할 자신들을 그려볼 것이다. 그리고 다시 한번 예수는 그에게 손을 내밀라고 요청한다. 그리고 그 사람은 “그렇게 했다.” 그리고 예수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예수는 다른 복음서처럼 침을 뱉지도, 엎드리지도 않는다. 여기에는 어떤 치료행위도 전제되어 있지 않다. 예수가 말했고 손 마른 사람은 그렇게 했다. 그리고 그의 응답은 결코 의미없는 응답이 아니라 구원을 완성하고 성취하는 응답이 된다. 앞으로 누가의 이야기 속에서 예수는 이런 응답들을 통해 자신의 사명선언을 완성해나갈 것이다. 즉, 그의 제자들을 통해 이제 가난한 자와 억눌린 자, 포로된 자, 눈 먼 자들을 양산해내고 종교라는 이름으로 그들을 억압하고 짓누르고 있는 체제를 향한 예수의 공격이 시작되는 것이다.

준비는 끝났다. 예수의 선제 공격은 성공적이었다. 그리고 적들이 혼란에 빠져있는 사이, 이어지는 이야기에서 예수는 12명의 사도들을 세울 것이다. 자, 이제 전원 공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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