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답하라 1997] CCM 세대의 추억은 정주행 중…

요새 하도 말들이 많은 드라마인지라 지금까지 놓친 부분을 정주행했다. 케이블 채널이 만들었다고 하기엔 꽤나 완성도가 있는 구성에 재미있게 보고 있다. 하지만 이 글은 드라마에 관한 내용은 아니니 그걸 기대하셨다면 살포시 뒤로가기 버튼을 누르시기 바란다.

드라마를 보면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아, 드디어 내 또래도 추억팔아 돈이 될만큼 세월이 흘렀구나’하는 것이다. 최근 나온 ‘건축학 개론’이나 ‘신사의 품격’처럼 8090의 향수를 겨냥하고 나오는 것들이 재미있긴 하지만 나의 입장에서는 뭔가 2%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왜냐하면 그 이야기들은 대부분 나보다 5~6살 정도 많은 오늘날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향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드라마는 그야말로 나의 시절 이야기이고 주인공들은 나보다 한살 어린 80년생의 이야기가 아니던가.

[응답하라], 이래서 1997년이구나 이 기자가 말하는 것처럼 97년은 한국 문화의 황금기의 정점을 찍은 시점이었다. 그러다보니 참 문화적으로 많은 추억거리를 가지고 있는 세대라고 할 수 있다. 언젠가 박진영도 방송에서 자신이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경계에 태어난 것이 감사하다고 말했던 적이 있었다. 나는 1990년대 후반의 시대를 살았다는 것에 얼마나 감사하고 있을까?

물론 연예인을 미치도록 좋아해본 경험이 없을 뿐 아니라 하이텔이나 천리안 같은 PC통신을 할만큼 집이 넉넉치도 않았기 때문에 그런 소위 ‘빠순이 문화’나 PC통신 문화는 아직도 적응이 잘 안된다. (내가 컴퓨터를 접한 것은 99년도 군대가서 아마도 윈도우 95로 기억되는 환경에서 한글 타자연습을 한 것이 처음이었다.)

당시에 기독교에는 한참 CCM이라는 새로운 기독교 문화의 바람이 불면서 나는 연예인 대신 CCM가수들의 공연장을 찾아다니고 외국 가수들의 음반을 찾아듣기에 바빴다. 당시에 나는 Michael. W. Smith의 I’ll lead you home 앨범과 D.C. Talk의 Jesus Freak앨범을 접했고 그들의 콘서트 비디오까지 외국에서 공수해서 볼만큼 열광적이었다. 아직도 96년 도브 어워드와 D.C Talk의 Welcome to the FreakShow의 장면들은 내 기억 속에 강렬한 자극으로 남아있다.

내가 고3이던 1997년 초 해외 유명 CCM 그룹 페트라의 내한공연이 화곡동 88 체육관에서 열렸다. 감사하게도 당시 나는 화곡동에 살고 있었고 어렵지 않게 이 역사적인 공연을 볼 수 있었다. 98년 예레미가 2집 [out of fear]를 들고나와 센세이션을 일으키기 전이었기에 당시 페트라의 공연은 흥분과 충격 그 자체였다. 조필성씨가 얼마 전 박완규 뒤에 나와서 기타치는 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옛날 생각이 났는지 모른다. 당시에 한국 CCM에서 락음악은 1집을 발표하고 보컬을 교체로 인해 활동이 저조했던 조필성의 예레미와 신중현과 엽전들의 드러머였던 문영배씨가 이끌던 아브라조라는 팀이 전부였다.

그 해 여름엔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찬사연에서 주최하는 제1회 찬양사역자 컨퍼런스가 대전 침신대에서 열렸고 나는 아마도 당시 컨퍼런스에 참여했던 유일한 고3이었을 것이다. 당시 나는 김명식씨와 최인혁 집사님의 강의를 들었던 것 같다(확실히 기억은 안난다). 분명 찬양 사역자들을 위한 컨퍼런스였던 것 같은데 당시엔 나같은 청소년도 꽤 많아서 몇일 있는동안 서로 많이 친해졌었다.

그리고 그 해 가을쯤 한국 CCM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앨범이 발매된다. 예수전도단 8집 [부흥]. 이 앨범 이후 경배와 찬양으로 대표되던 예배 찬양이 점차 콘서트적인 성격을 띄게 되었고 대형교회들의 지원을 받는 워십음악들은 2000년대 모던 워십이라는 흐름을 타고 CCM이라는 장르를 사실상 질식시켰다. 지금의 워십 일변도의 찬양문화를 반갑게 생각하지 않는 나의 입장에서, 이 음반의 히트와 그 이후의 진행은 참으로 안타까운 추억이라 하겠다. 뭐 이런 말을 하고 있지만 98년 나는 부흥 콘서트에 콰이어를 서기 위해 대학수업도 빼먹으며 다녔던 열성 예수전도단이었으니… 이런 아이러니가…

97년 겨울 최인혁 집사님의 4집 [하나님의 손]이 발매되고 수능 전날 나는 그 콘서트를 보러 갔다가 새벽에서야 집에 들어왔다. 조환곤 선교사의 [방황하는 친구에게]가 대박난 시점도 이때쯤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당시 그 메인 보컬이 지금의 가수 김연우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당시 김연우의 이름은 본명인 김학철이었다. 김연우는 97년이었나? CCMBIG이라는 컨테스트에도 나와서 유현선이라는 여자보컬과 듀엣으로 대상을 받기도 했다. 당시 그 컨테스트 현장에 있었는데 그 노래 참 좋았었다.^^ 당시 2등이 ‘얼터’라는 얼터너티브 락 그룹이었으니 할말 다 했다. 당시에 얼터의 보컬은 리더였던 남자였는데 나중에 나온 앨범엔 여성보컬을 영입하면서 대박을 쳤다. 나중에 이 여성보컬은 대중음악계로 진출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이름은 모르겠다.

아참, 이 대회 주관사가 당시 CCM전문 잡지였던 LOOK이라는 잡지사였다. 아놔… 추억 돋네.

1997년이 한국 대중문화의 황금기였듯 기독교 음악에서도 다양한 요구와 색깔이 나타났던 황금기였다. 지금처럼 천편일륜적인 문화에 비해 훨씬 세상을 향해 열려있으려는 노력들이 있었고 그에 상응하는 자극들이 있었던 시기였던 것 같다. 물론 내가 기억하고 있는 기독교 문화에 대한 추억은 당시의 일반적인 문화였다가보다는 꽤나 변두리적 관심에서 나온 그림들이다. 하지만 드라마를 보면서 왜 이 시기 기독교 문화에 대한 향수는 힘을 얻지 못할까 안타깝다. 드라마에 필받아 갑자기 추억돋는 글을 적어댔다.

2 Comments

  1. 반갑네요^^ 저두 1997년 대전 침신대에 있었습니다^^ 당시 저는 고 1이었고, 정말 행복한 시간이었는데… CCM 컨퍼런스 다시 했으면…ㅋㅋㅋ 평안하세요^^

Leave a Comment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Content Protected Using Blog Protector By: PcDro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