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6편 : 무너진 영웅

지휘자를 따라 팔현금에 맞추어 부르는 다윗의 노래

주님, 내게 노하지 마십시오. 진노하지 마십시오.

나를 징계하지 마십시오.


주님, 내 기력이 쇠하였으니, 내게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내 뼈가 떨리니, 주님, 나를 고쳐 주십시오.


내 마음은 걷잡을 수 없이 떨립니다.

주께서는 언제까지 지체하시렵니까?


돌아와 주십시오, 주님. 내 생명을 건져 주십시오.

주의 자비로우심으로 나를 구원하여 주십시오.


죽어서는, 아무도 주님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스올에서, 누가 주님을 찬양할 수 있겠습니까?


나는 탄식만 하다가 지치고 말았습니다.

밤마다 짓는 눈물로 침상을 띄우며, 내 잠자리를 적십니다.


사무친 울화로, 내 눈은 시력까지 흐려지고,
대적들 등쌀에 하도 울어서 눈이 침침합니다.


악한 일을 하는 자들아, 모두 다 내게서 물러가거라.

주께서 내 울부짖는 소리를 들어 주셨다.


주께서 내 탄원을 들어 주셨다. 주께서 내 기도를 받아 주셨다.

내 원수가 모두 수치를 당하고, 벌벌 떠는구나.

낙담하며, 황급히 물러가는구나.


<새번역>


이 시편은 다윗의 노년에 쓰여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그렇기때문에 이 시편 곳곳에서 우리는 약하디 약해진 다윗을 만나볼 수 있습니다.


뼈가 떨린다던가 눈이 어두워졌다던가 하는 표현은 말년에
다윗이 노쇠하여 이불을 덮어도 따뜻하지 않았다는 성경의 기록을 떠오르게 하는 부분입니다.(왕상 1장)


이 시편에서 우리는 한명의 무너져버린 영웅을 만나게 됩니다.


과거에 전장을 호령하던 위대한 전사는 간데 없고 하나님을 상대로 목숨을 구걸하는 노약한 한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과거엔 천만인이 둘러싸도 두렵지 않았을 다윗왕이지만 이 시편에서는 자신의 대적들로 인해
날마다 눈물로 침상을 띄울만큼 눈물의 나날을 보냈다고 말합니다.


전장의 두려움과 긴장감을 견뎌내기에 다윗은 너무 늙어버렸고 나약해졌습니다.


이 시편에서 드러나는 다윗의 모습은 마치 오늘날 한국 교회를 떠올리게 합니다.


한 때 한국 교회는 너무나도 찬란한 영광을 누리고 살았습니다. 날마다 믿는자가 더해지며 놀라운 부흥의 역사가 있었고 수많은 선교사들을 내보내기 시작하면서 하나님이 한국을 사용하시고 계시다는 것을 누구도 거부할 수 없을 것만 같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한국 교회의 그런 모습들은 찾아보기 힘든 것이 사실입니다.


전 인구의 30%라는 숫자는 교회간에 중복되어지거나 이름만 있는 신자들을 제외한다면 거품이 무너질 것이라는 이야기는 신학생들 가운데 공공연한 이야기였습니다.


이것도 옛날 이야기인 것이… 가장 최근의 국가 조사에서는 그 결과가 어느 정도는 기독교가 이야기하던 통계와 다르다는 것들이 드러났고 이전에 비해서 소폭 감소하고 있음도 알 수 있었습니다. 물론 기독교에서는 조사 자체에 이의를 제기하며 그 결과를 인정하지 않았지만요.


하지만 더 문제는 숫자보다
교회 자체의 성결함의 문제입니다.

더 이상 한국의 기독교는 세상을 향해 칭찬받는 자리에 있지 못합니다.


과거 조국의 역사를 끌어가던 기독교인들의 모습은 그야말로 지나간 이야기처럼 보입니다.


방송과 인터넷을 통해서 공공연하게 기독교를 비판하는 내용들이 올라오고 사실 아니라고 말하지 못할 것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한국 교회는 반성은 커녕 더욱 고자세를 취하고 마치 그들의 비난이 우리가 지고 가야할 십자가인 것처럼 행세하고 있습니다.


세습은 당연한 것이고 목회자 세금은 안내는 것이 맞는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 모두가 지금 한국 교회가 지난날의 화려했던 날과 같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섣불리 인정하려 들지 않습니다.


언제든 다시 돌아갈 수 있는 것처럼 떼거지로 모여서 기도하면 나아질 것처럼 행세합니다.


마치 아파서 병원에 갔으면서 어디가 아프냐고 물어보면 주사 맞을 생각에 안아프다고 발뺌하는 아이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 시편 가운데 나오는 다윗의 고백들은 절대로 정상적인 것들이 아닙니다.


지금 북한의 김정일만 보더라도 어떻게든 그에게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힘을 씁니다.


이젠 많이 늙어버린 할아버지이니 골골한 것이 당연함에도 그의 몸에 이상이 있다는 소식은 세계적인 뉴스가 되기 때문입니다.


실상이 이런데 절대 권력의 왕인 다윗이
자신의 연약함을 구체적으로 하나하나 드러내고 있는 이 시편이 정상적으로 보이십니까?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라며 칭송받던 다윗, 거인 골리앗을 물맷돌 하나로 쓰러뜨린 용사 다윗…


물론 이 칭송들은 과거의 다윗에게 정당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다윗이 늙고 지쳤을 때 다윗은 과거의 모습을 회상하며 마치 지금도 그런 듯 스스로를 속이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않으실 분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아무리 괜찮은 척 아직도 옛날의 그 용맹과 힘을 가지고 있는 척 해도 하나님 앞에는 그저 늙어서 나약하고 눈물많은 사람일 뿐임을 누구보다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


한국 교회가 이 시편을 통해서 배워야 할 것은 다윗의 그 정직함이라 하겠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
자신의 삶이 무너졌을 때 하나님 앞에 어떻게 설 수 있는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 방법에 대해서 다윗은 밧세바를 범한 후 회개하며 지은 시편 51편에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

자신의 삶이 무너진 그 자리에서 다윗은 무엇을 가장 먼저 해야하는지 잘 알았습니다.

그리고 이 시를 통해서 다윗은 하나님 앞에 가장 정직한 모습으로 섭니다.


더 이상 자신이 용사가 아니며 늙고 지친 노인일 뿐임을 가장 정직한 말들로 드러냅니다.


괜찮은 척하고 멋있는 척하고 강한 척하는 것이 더 어른스러워 보이는 때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진짜 어른이 아니지요.

어른은 절대 의사 앞에 가서 안아픈척 하지 않습니다.

가장 정직하게 자신의 상태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그 병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장 빠른 길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더 강해지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 약함을 정직하게 드러낼 때 하니님은 그 인생을 사용하십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도 우리 안에 자꾸 문제가 없다고 말하며 발뺌하기보다는 정직하게 그 문제들을 인정하고 답을 구해야 하지 않을까요?


세상가운데 우리의 약함과 추함을 드러내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헤치는 일일까봐 걱정되시나요?

우리 원래 그런 사람들 아닙니까?

예수님을 죄인의 친구라고 욕먹이던 그 죄인…

내가 정직하게 내 죄를 인정하는 것은 세상의 눈으로 보기엔 하나님을 욕먹이는 일 같겠지만


결국 하나님은 연약한 우리를 통해 강함이 되시며 스스로 영광받으신다고 저는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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