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의 고난 목록의 약함과 자랑 (고후 11:21-31)

나는 우리가 약한 것 같이 욕되게 말하노라 그러나 누가 무슨 일에 담대하면 어리석은 말이나마 나도 담대하리라
그들이 히브리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그들이 이스라엘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그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냐 나도 그러하며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지 아니하더냐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고린도후서 11장 21~30]

바울은 자신의 경쟁자들에 맞서야 하는 상황에 놓여있다. 앞부분에서 볼 때 바울의 경쟁자들은 자신들을 예루살렘의 소위 우두머리 제자들(11:5, 12:11)과 연관시켜 권위를 주장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의 경쟁자들은 그를 향해서 “바울의 편지는 무게가 있고, 힘이 있지만, 직접 대할 때 그는 약하고, 말주변도 변변치 못하다”(10:10)라고 비난했다. 특히나 바울은 화술에 있어서 많은 부분 열세에 놓였던 것으로 보인다.(11:6) 바울의 고난 목록은 이렇게 막다른 상황에 놓인 바울이 자신을 비난하는 자들의 언변을 패러디 하면서 적고 있는 자랑의 목록 가운데 위치한다.

처음 몇가지 자랑은 중복되는 내용처럼 보인다. 히브리인, 이스라엘 사람, 아브라함의 후손… 이것은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서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어지던 이미지들이다. 그 세세한 차이들을 여기서 전부 설명할 수는 없지만 이것은 아마도 바울의 경쟁자들이 주장했던 자랑의 주제이거나 혹은 바울이 스스로의 정통성을 내세우기 위해 끌어들이고 있는 개념일 것이다.

중요한 것은 23절부터 나오는 고난의 목록들이다. 문제는 이 구절이 앞에서 나오는 자랑 목록과 연결되면서도 약함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앞에서 긍정적인 이미지들을 가지고 경쟁자들과의 동등함 혹은 우위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에 비하면 이 부분은 바울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역설적인 이미지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고난의 목록은 왜 ‘약함’이라는 주제와 연관되는가? 이 부분은 너무나 당연하게도 바울의 경쟁자들에 비해서 바울이 더 수고했으며 더 많은 고난을 겪었음을 의미한다. 어쩌면 자신의 수고를 생색내는 것 같은 이 문구가 ‘약함’이라는 주제와 엮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다시 말해 바울이 자랑하는 고난의 목록은 바울에게는 절대 ‘약함’이 될 수 없었다. 그렇다면 바울은 왜 이것을 ‘약함’과 연관시키는가?

우선 이해해야 하는 것은 바울이 제시하는 고난 목록의 내용들이 사람들에게 ‘자랑’이 아니라 ‘약함’으로 이해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바울이 이야기하는 고난의 목록은 크게 두가지로 나뉜다. 첫번째는 여행의 고난이고 두번째는 사람으로부터 받은 박해이다.

먼저 당시 사회에서 여행은 위험한 것으로 인식되었다. 특히나 바다에서의 여행은 더 그랬다. 그렇기 때문에 출항에 앞서 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신을 위로하는 의식을 치뤘다. 이런 ‘신’개념 아래서 바울이 말하고 있는 세번의 파선이 의미하는 것은 두가지 가운데 하나이다. 신이 노했거나 혹은 신이 힘이 없거나… 그렇기 때문에 여행의 실패는 단순히 고생이나 수고의 의미를 넘어선 신과의 관계 문제의 실패로까지 이해될 수 있다. 특히나 죽음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바다에서의 일주야를 지낸 바울의 경험은 어찌보면 하나님의 부재를 의미할 수도 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당한 여러가지 위험은 당시 사람들로 하여금 ‘정말 바울이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 사람일까?’라는 의문이 들게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두번째는 사람에게서 당하는 고난의 문제이다. 바울의 시대는 아직 국가적인 차원의 기독교 박해가 이뤄지기 이전이다. 그렇기때문에 당시 바울이 당한 고난은 지역적인 차원의 박해에서 온 것이고 그것은 대부분 종교적인 문제이기보다는 사회적인 문제였을 것이다. 우리는 이 좋은 예를 사도행전 19장의 에베소 사건에서 발견할 수 있다. 특히나 바울은 자신이 태장을 당했다고 말한다. 이것은 로마시민이라는 바울의 신분에서는 집행될 수 없는 형벌이다. 어떤 사람들은 바울이 로마시민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사용하지 않았다고 말하지만 그보다는 당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사람에 대해 로마시민권을 무시하고 집정관에 의해 임의적으로 태형을 집행한 예들을 통해서 이해하는 것이 더 정직할 것이다. 게다가 바울이 40에서 하나 감한 매와 돌로 맞는 형벌은 신성모독과 같은 특별한 범죄에 해당하는 형벌이다. 여기서 마지막 거짓형제에 관한 부분이 자신의 경쟁자들을 겨냥한 것으로 이해한다면, 바울은 유대인과 이방인이라는 양쪽으로부터 그다지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였음을 알 수 있다. 오늘날 우리가 그것을 꽤나 긍정적인 이미지로 바라보는 것과 달리 집단적 상호성이 지배적이던 당시 사람들에게는 바울에 대한 일종의 부정적인 평판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었다. 바울은 모든 사회에서 꽤나 문제거리인 사람이었다.

바울은 12장에서 말하고 있듯이 다른 경쟁자들에 비해서 분명 자랑할 수 있는 것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오히려 고난의 목록을 제시하고 있다. 바울의 고난 목록은 당시 유행하던 철학자들이나 왕들의 고난 목록 양식을 그대로 차용하면서도 몇가지 차이점을 드러내고 있다. 박익수 교수는 그의 책 [누가 과연 그리스도의 참 사도인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고대 그레코-로만 시대의 고난 목록과 바울이 전하는 고난 목록은 그 형태에 있어서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목록은 견유학파나 스토아학파에서 잘 알려진 것이었다. 이런 고난의 목록은 두가지 반응 결과를 제시한다. 먼저 고난을 잘 견디는 자는 높은 지위를 얻으나, 반대로 잘 견디지 못한 자는 실패자로서 낮은 지위를 얻게 된다. 또한 현명한 사람은 그런 고난을 잘 극복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스토아적인 평행구절들은 고난을 극복하는 인물과 그의 업적을 부각시키면서 고난 자체는 덜 중요하게 취급하는 경향이 있는데, 바울이 고난의 목록을 제시한 것은 두 가지 점에서 그들과 큰 차이를 보인다. 첫째는 고난을 받는 것이 고상한 경험이 아니라 위신과 명예를 손상시키는 경험으로 제시된다는 점에서, 둘째는 명백한 성공과 목적의 달성이 아니라 분명한 실패의 본보기로서 고난이 제시된다는 점에서 스토아적인 고난의 용법과 차이가 난다.  [p.356]

바울의 고난 목록이 ‘생색’이 아니라 ‘약함’과 연결될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실제 바울의 사역에서 실패로 인식될 수 있었고 바울의 권위와 명예를 손상시키고 의구심을 갖도록 만들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것은 바울을 비방하는 경쟁자들의 ‘비방목록’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바울은 경쟁자들에 맞서 자신의 약점으로 인식될 수 있는 조건들을 나열하면서 그것을 자신의 자랑이라고 말한다. 물론 바울이 그것을 자신의 약점으로 인식했을 가능성은 적어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울을 비방하던 사람 혹은 고린도교인들의 인식과 그것을 뒤집고 있는 바울의 고난 인식의 대립이다.

바울은 12장 10절과 13장 4절에서 자신의 약함을 그리스도의 약함과 연결시키는데에서 파악될 수 있다. 여기서 바울이 그리스도의 약함을 어떻게 이해했는지의 문제가 제기된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약함에도 이 두가지 인식이 교차하고 있는 것으로 본다. 그리스도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아래 있는 자(갈 3:13)”라는 율법의 정죄 위에서 십자가를 지셨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죽음이 어떤 영웅적 죽음이 아니라 실패한 선지자이며 하나님의 저주를 당한 사람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것이 바울이 말하는 그리스도의 약함이다. 그리고 그것은 세상이 보기에 ‘약함’, ‘약점’, ‘실패’로 인식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약함이 하나님 앞에서 강함이 되었다는 것이다. (고후13:4)

바울은 자신의 약점으로 여겨지던 것을 역설적으로 자랑목록에 놓음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약함과 자신의 약함을 동일시한다. 이것은 당시 외적이나 사회적으로 열세에 놓여있던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향해서 던지는 한판뒤집기인 것이다. 이런 뒤집기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를 위한 고난이듯이 자신의 고난 역시 고린도교회를 위한 고난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그의 경쟁자들이 자신들을 ‘그리스도의 일꾼’이라고 소개하던 말을 받아치면서 바울이 ‘나는 더욱 그러하다’라고 말하면서 고난 목록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을 수 있는 이유였다. 그의 고난은 교회를 향한 염려에 기반한다. 그것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성령님의 탄식(롬 8:26)과도 연결될 수 있을 것이다.

바울의 경쟁자들은 소위 ‘큰 사도들’의 권위를 등에 엎고 있었다. 실제 그들이 예루살렘과 연관이 있는지는 증명될 수 없으나 적어도 그들은 사도들의 추천장을 가지고 있었고 그 연속성을 자신들의 자랑으로 여겼다는 것이다. 이것은 바울에게 있어서는 꽤 큰 도전이었을 것이다. 예수를 직접 보았던 제자들에 비해서 바울의 사도성은 언제나 의심받아 왔다. 이런 사도 개념에 대해서 바울은 그들의 자랑이 아니라 자신의 약함이 진정한 사도성의 근거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어떤 힘을 등에 업고 자기 자랑거리들을 앞세우는 세상의 법칙을 약함을 통해 하나님의 강함이 드러나는 하나님 나라의 법칙으로 전환시키고 있는 것이다.

특히나 바울이 자신의 실패를 내세우는 것은 오늘날 사회 가운데 큰 도전을 준다. 오늘날 우리는 끊임없는 경쟁 속에서 1등이 아니면 곧 실패자로 낙인찍히는 세상 속에 살고 있다. 목회도 사람을 많이 모아야 하고 학생은 성적을 잘 받아야 하고 기업은 실적을 높여야 하는, 그래야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는 세상 속에 살고 있다. 이런 세상을 향해서 바울은 성공이 아니라 실패가 자신의 자랑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결과를 통해 사람의 가치를 평가하는 세상의 법칙이 아니라 역으로 가치를 통해 결과가 평가되는 새로운 삶의 방법이다. 똑같은 목록을 놓고 어떤 이들은 ‘약함’이라 말하고 어떤 이는 ‘강함’이라 말한다. 바울에게도 자신의 자랑거리들이 있었을 것이다. 12장 1-5절에 나오는 경험은 어쩌면 경쟁자들에게 맞서서 제시할 수 있는 좋은 무기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바울은 이런 것들을 자랑하지 않는다. 고린도교회의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몇마디 하긴 했지만 바울에게 이것은 참 불편한 일이다.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만일 자랑하고자 하여도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아니할 것은 내가 참말을 함이라 그러나 누가 나를 보는 바와 내게 듣는 바에 지나치게 생각할까 두려워하여 그만두노라 (12:6)

오늘날 우리는 이 두려움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흔히 ‘약할 때 강함되시네’라고 찬양한다. 하지만 정말 우리가 그리스도 앞에서, 그리고 세상 앞에서 약해지려 하는지 생각해봐야한다. 오히려 몸집을 불리고 더 많은 사람을 모아서 우리의 힘을 과시하려하고 있지는 않은지… 이런 자랑들을 통해서 정작 세상을 향해 그리스도가 가려지고 있지 않은지… 오늘날 한국 사회에에 바울이 던지는 외침은 큰 울림이 되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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