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버라이어티 정신

지난 번에 문득 떠오른 생각을 페북에 적었다가 여기에 옮겨본다. 오늘날 우리가 예능이라는 이름으로 특징짓고 있는 특정 성향의 관점 혹은 방식을 성서 해석의 도구로 끌고 올 수 없을까 하는 마음에 이것저것 떠오르는 생각을 적어봤다.
지금 보니 무지 허접한 말들을 짓거린 것 같다. 가능성이 있는지는 떠나서 그냥 아이디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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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평신도 신학은 성서학의 대중화이다. 그리고 그것은 성서학적 연구결과들이 그들만의 리그에서 벗어나 평신도가 접근하기 편하게 오픈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런 의미에서 현재 각 학회의 저널 보급 방식엔 큰 문제가 있다고 본다.

인문학이나 역사학이 아니라 코메디 혹은 예능이 해석학적 도구가 된다면 어떨까? 개그맨이 세상을 보는 방식이 성경의 텍스트와 컨텍스트를 해석하는 틀이 되고 그 안에 담긴 과장과 비틀기와 해학을 오늘의 현살 속으로 가져올 수 있다면… 그렇다면 오늘날의 성서 해석의 키워드는 ‘공감’이 아닐까?

단순히 ‘코미디’라는 언어로 정의될 수 없는 ‘예능’이라는 단어가 가진 독특한 공감대의 영역이 오늘날 존재한다. 그 안에는 단순히 웃음 뿐 아니라 snl의 풍자, 무한도전의 사회의식, 그리고 나가수의 감동까지 포함한다. 때로는 김제동의 말처럼 깨우침을 주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는 진정한 예능인이 아니었을까?

예능에서 ‘과장’,’왜곡’은 거짓말이 아니라 기술이다. 만약 예수가 예능인이라면 그의 말 속에서 과장과 왜곡을 문제 삼는 것은 강용석이 최효종을 고소하는 것과 다름 아니다.

여느 예능처럼 성경의 등장인물에도 설정된 캐릭터가 있다. 이것은 그들이 실제 ‘역사적’으로 어떠했는지와는 관계없다.

그들은 작가가 주어준 것 이상으로 그 상황 가운데 자신의 포지션을 찾아나간다. 그 포지션을 찾지 못한 캐릭터는 이름만 등장하는 병풍캐릭터가 된다.

그렇기에 그 안에는 유재석 같은 1인자 캐릭터도 있고 그의 천적인 박명수 같은 캐릭터도 있으며 때로는 태생적으로 안웃기는 캐릭터처럼 예능의 원래 기능과 반대되는 캐릭터도 존재한다.

예능의 언어는 고정된 의미의 언어, 캐릭터가 아니다 그것은 시청자(독자) 와의 소통 가운데 끊임 없이 창조되고 변화한다. 옛날 정형돈이 지금의 정형돈일 필요는 없다. 다만 그 역할은 누군가를 통해 이어질 수 있다. 뭔소린지….ㅋㅋㅋ

예능의 녹화 현장과 방송본은 다르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촬영 현장에서 ‘역사적으로’ 어떤 일을 했는가가 아니라 그것이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이라는 pd의 편집 작업을 거쳐 어떻게 ‘보여지는가’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입력이 아닌 출력이다.

그리고 실제 녹화 현장은 우리가 방송으로 보는 것처럼 재미도, 의미도 없을지도 모른다. pd의 힘은 그 내용을 조합해 의미화 하고 웃음의 효과를 주는 일… 복음서 저자가 한 일. 이러면 편집 비평이 되나? 그거랑은 쫌 다르지…

편집 비평은 아니고 서사 비평에 가까운 듯…

하지만 내가 집중하고 싶은 것은 그 이야기가 아니라 그것을 이야기하는 사람의 퍼포먼스와 그 반응이다. 이것이 공감에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한다.

혹시 설교에도 슈스케처럼 악마의 편집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ㅋㅋㅋ 이제 막가는구나

예능적 성서해석을 한다고 할 때 중요한 것은 그것은 일반 대중의 공감대 속에 자리잡고 내 이야기로 들려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자리매김은 민중신학의 민중과는 그 위치가 조금 다르다. 시청자층을 잘 타겟팅 해야한다. 시청자층에 따라 편집이 달라진다고 해서 그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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